떼르뚤리아누스-아프리카 교회

 

19. 떼르뚤리아누스




19.1. 아프리카 교회


교부학에서 아프리카 교회라고 할 때에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리비아 북부 지역의 교회를 국한하여 지칭하며, 그 중심 도시는 카르타고였다. 이 지역은 기원전 2세기에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에 나설 만큼 일찍부터 도시들이 번창하였고, 로마제국 시대에도 이탈리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관계로 중요한 무역 상대가 되었다. 아프리카 교회는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로마 교회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으며, 따라서 로마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로마제국 어느 곳에서나 교회가 박해를 받았지만, 이 지역의 복음 전파의 속도는 가히 놀랄 만하다. 떼르뚤리아누스는 197년에 쓴 ‘호교론’ 1,6-7에서, “우리 크리스찬은 괄목할 만큼 많다. 도회지에 국한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시골 벽촌, 산간 지역, 섬들에도 많다. 우리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마치 폐허에서 소생하듯 남녀노소, 고위층의 사람들까지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보다 약 50년 후에 카르타고의 주교 치쁘리아누스는 카르타고 주교 회의에 모인 주교들의 숫자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252년 회의에 42명, 253년 회의에 66명, 256년 1차 회의에 71명 그리고 2차 회의에 87명의 주교들이 모였다고 증언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아프리카 교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교세 신장의 이유들 중에 하나는 아프리카 교회 안에서 일찍부터 라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이 지역의 중심지인 카르타고에는 로마의 관리, 군인, 상인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므로 주로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현존하는 라틴어 교회 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80년에 저술된 ‘쉴리움의 순교자 행전’인데,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지방 출신인 여섯 순교자들이 카르타고에서 심문받고 참수된 기록이다. 그리고 카르타고의 떼르뚤리아누스가 197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라틴어로 저술하기 시작하였으며, 치쁘리아누스 주교가 그 뒤를 이었다. 이것은 250년경에야 라틴어 저서들이 나오게 된 로마교회에 비해 50년 가량 앞선 것이다. 떼르뚤리아누스, 치쁘리아누스, 라르노비우스, 락딴시우스, 아우구스띠누스로 이어지는 아프리카 교회의 신학 주류는 로마교회의 신학을 능가할 만큼 뛰어났으며 라틴교회의 신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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