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나고라스

 

아테나고라스


아테나고라스는 고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에 그의 인물이나 생애에 관하여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아무것도 없다. 남아 있는 그의 두 작품에 관한 중요한 수사본인 914년에 씌어진 파리 아레타스 사본 415호에는 호교서의 제목과 함께 그를 “아테네 출신의 철학자”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 제목이 고대부터 유래한 것인지, 아니면 사본이 씌어질 때 첨가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와 달리 시데의 필립보의 작품을 발췌한 14세기의 또 다른 수사본은 아테나고라스가 알렉산드리아 학교의 첫번째 책임자였다고 전한다. 물론 시데의 필립보의 증언을 다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렌드는 아테나고라스의 고향이 소아시아일 수도 있다고 추론한다.


또한 남아 있는 두 작품 「그리스도인을 위한 청원서」와 「죽은 자들의 부활」의 연도도 논의의 대상이 된다. 더구나 두번째 작품은 진본 여부가 문제된다. 고대의 작품들은 그가 호교서를 저술하였다고 증연하다. 반면 「죽은 자들의 부활」 뒤에 res라는 라틴어 낱말은 후대의 사본에서 덧붙여졌다. 이는 아테나고라스가 호교서의 끝부분에서 그가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문제를 훗날에 다루려고 한다는 사실을 나태내는 것이다. 따라서 아레타스 사본에서 res는 “동일한” 작품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최근 이 작품의 진본 여부에 관한 새롭고 충분한 논의가 있었으며, 아직도 논의되고 있다.




2.4.1. 「호교서」


아테나고라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이며 공동 통치자인 콤모두스에게 「호교서」를 바쳤다. 따라서 작품의 저술 연도는 틀림없이 176년 11월 27일(콤모두스가 공동으로 통치히기 시작한 때)과 180년 3월 17일(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망) 사이아다. 전 세계가 평화로이 지내고 있다는 1장의 진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호교서를 개인적으로 바친 작품이냐, 아니면 단지 문학적 관습으로 황제에게 헌정하였느냐에 따라, 그리고 아테나고라스의 거주지가 어디였는가에 따라 연도에 관한 정확한 사실들이 밝혀질 수 있다. 포르타는 아테나고라스의 호교서가 177년 8월 박해받는 비엔과 리용 공동체의 편지에 대한 답변으로 저술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호교서」는 그리스도인을 두고 대중적으로 비난하는 무신론, 근친상간, 인육식사를 논박한다. 아테나고라스가 세 가지 비난 가운데 어디에 강조점을 두고있는가는 「호교서」에서 다룬 주제의 분량으로 알 수 있다. 곧, 그는 총 37장 가운데 무신론은 28장에, 근친상간은 3장에, 인육식사는 2장에 걸쳐 다룬다. 사람들이 무신론자의 여러 행동방식의 특징을 고려하지 않고 무신론자를 국가의 적으로 생각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아테나고라스가 왜 무신론자에 관해 상세히 다룬지를 이해할 수 있다.


아테나고라스는 통치자들의 호의를 얻는 것, 로마제국 내의 매우 다른 종교적 관습의 묘사, 통치자들의 크나큰 관용,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에 대한 찬양으로 서문을 시작한다. 그는 제1부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무신론이 아니라 이미 유명한 그리스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주장한 유일신론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교는 한 분이신 참된 신성에 대한 계시종교라는 것이다. 이렇게 전통적인 내용을 논증한 뒤, 아테나고라스는 8장에서 처음으로 이른바 공리적인 신神 증명을 한다. 신은 정의상 창조되지 않았으며, 나누어질 수 없다. 더욱이 세계의 창조주가 그의 피조물을 위해 모든 공간을 채운다면, 그밖의 자주적인 신을 위한 공간은 더 이상 아무 곳에도 없다. 제신은 단지 인간의 작품이거나 사람들이 신으로 받드는 사람들 또는 자연현상들, 그리고 이것들 안에서 기껏해야 악마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제신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히 거부할 수밖에 없다. 아테나고라스는 마지막으로 근친상간과 인육식사에 대한 비난을, 그리스도인의 덕을 미워하는 부도덕한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간단히 처리하였다.


아테나고라스의 논증 방법을 앞서 말한 호교가들의 논증 방법과 견주어보면, 방법론의 근본구조가 세부적으로는 달라도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호교가들은 처음에 황제의 호의를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로마 철학에서 이미 언급되는 증명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가 무신론이라는 비난을 논박하였다. 이로써 그들은 철학적 신에 대한 신앙과 신화적 신들에 대한 실제적 존경 사이의 모순을 재치있게 이용하였다. 마침내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근본적으로 시인하게되면, 그밖의 모든 비난은 타락한 사람들이 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시기하는 것으로 간단히 다룬다. 아테나고라스는 「호교서」에서 대부분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고대의 많은 저자를 인용한다. 이로써 이성적․철학적 논쟁의 수준에서 이러한 철학적․문학적 교육을 바라는 교양있는 이교인 독자의 주의를 끌었다.




2.4.2. 「부활론」


최근의 논의와 관계 없이, 많은 학자가 진본으로 인정한 아테나고라스의 두번째 작품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아마도 호교서보다는 신학사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아테나고라스는 당시 매우 널리 알려진 두 가지 이의(①죽은 사람의 부활은 불합리하다. ②부활은 심판을 위해서만 일어난다)에 대해 죽은 사람의 육체와 영혼의 부활 가능성과 합리성을 변론한다. 위의 이의에 대해 아테나고라스는 인간 창조의 의미와 목적은 완전한 인간, 곧 영혼과 육체를 지닌 인간이 영원히 산다는 근본적인 전제를 논제로 삼는다. 그는 제2부에서 이에 관하여 상세히 논증한다. 따라서 육체가 모든 인간의 운명에 따라 죽었을 경우, 세상에서 없어지기 위하여 죽지 않은 영혼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면, 육체와 영혼은 부활을 위해 필연적으로 다시 결합되어야 한다. 창조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신체의 모든 요소를 그가 본디 만든 대로 다시 결합할 수 있기 때문에, 부활은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며 하느님께는 당연한 일이고 그분의 의지를 잘 표현한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문제점, 곧 물질적․물리적으로 제시된 매우 구체적인 문제점을 독창적인 자연과학적․의학적인 가정으로 푼다. 동물이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 또는 다른 동물이 그 동물을 잡아먹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요소는 동물이나 다른 인간에 동화되지 않고 변화하지 않은 채 남는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첫번째 논문을 쓴 아테나고라스의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없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일어난 부활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많은 문제가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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