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요한)

 

정약용(요한)은 조선시대 후기에 발달한 실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학자이며, 당시의 실정을 올바르게 파헤쳐 곤궁한 농민들을 구제하려 했던 경세가였다. 또한 그는 천주교의 교리를 이해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과 사회를 구원하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흔히 요한을 가리켜 배교자(背敎者)라고 단정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표면적인 오인이며 사실은 누구보다도 천주교의 교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의지와 정신을 피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열심한 신자로서 죽음에 임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에 대한 기록을 들추어 냄으로써 우리는 그의 내면에 있던 진실된 신앙심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그에 대한 오인을 명백히 이해할 수가 있다.


  요한은 진주 목사(晉州牧使)를 지낸 정재원(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1762년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의 마재(馬재 ; 현재의 楊州郡    面  內里)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유명한 학자요 시조가였던 윤선도(尹善道)의 6대 후손이었으며, 이승훈(李承薰)과 더불어 신앙 운동을 전개하였던 정약전(丁若銓)은 그의 둘째 형이었고,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순교한 정약종(丁若鍾․아우구스띠노)은 그의 셋째 형이었다.


  이 셋째 형의 집안은 1839년 기해교난(己亥敎難) 때의 대표적인 순교일가로서, 부인 류 소사(柳召史․체칠리아)와 그의 아들 정하상(丁夏祥․바오로), 그리고 조카 딸 정정혜(丁情惠․엘리사벳) 등이 이때 순교하였으며, 이들 세 명은 1984년에 성인의 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특히 요한의 조카인 정하상 바오로는 조선 교회의 부흥에 앞장을 섰던 지도자로 호교론(護敎論)인 「상재상서(上宰相書)」의 작자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그의 가계로 보아도 그 집안에 얼마나 천주교의 신앙이 깊었던가를 일견하여 알 수가 있다.


  천주교를 옹호하던 남인 시파(南人時派)에 속하였던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 조정에서 높은 벼슬에 올라 있었다. 이러한 집안에 태어난 요한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자질을 발휘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의 어렸을 때 작품집인 「삼미집(三眉集)」은 이러한 그의 총명함과 학문적 토대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1776년 정조(正租)가 즉위하면서 시파(時派)가 득세하게 되자 낙향하여 있던 부친이 호조 좌랑(戶曹左郞)으로 승품되어 요한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17세에 이르러 요한은 이가환(李家煥), 이승훈을 따라 남인의 대학자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읽게 되었는데, 이후 그는 이익의 사상에 크게 감동되어 정치와 경제를 중심으로 한 현실적인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실학의 정신을 토대로 당시 조선 사회의현실을 바로잡는 데 일생을 보내게 된다.  


  한편 그는 당시에 유입되어 있던 천주교 사상과 서양 과학기술을 연구하려는 새로운 학문인 ‘서학’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현실적인 면에 힘을 기울인 조선 후기의 학자들은 중국의 과학보다 더 합리적인 서양 과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요한이 서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는 1784년경부터 남인의 학자요, 열심한 교우였던 권철신(權哲身)․일신(日身) 형제와 이 벽(李壁), 그리고 이승훈 등과 깊이 사귀면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점차 이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벽은 특별히 그에게 신앙심을 갖도록 권유하고 교화하여 마침내 이승훈으로부터 요한이라는 교명(敎名)으로 영세를 하도록 하였다.


  천주교에 정신으로 입교하기 이전인 22세 때 요한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 길에 나섰고, 이듬해 1784년에는 정조 왕에게 「중용(中庸)」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이때 의문나는 점이 있으면 이 벽을 찾아가 문의하였다고 한다. 청년 관리로서 정열을 기울였던 이「중용」의 어전 강의는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는 훗날 유배를 당한 후 이를 정리하여 「중용 강의(中庸講義)」라 하였는데, 그 내용에서 우리는 요한뿐만 아니라 이벽의 신앙적 이론도 탐지할 수가 있으며, 동시에 천(天)․상재(上宰) 등에 관한 그들의 이해가 천주교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요한은 정조 왕에게서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정승 채제공(蔡濟恭) 같은 이도 그를 남인의 중요한 인물로 여겨, 그는 같은 남인 사이에서도 질시를 받게 되었다. 1785년 천주교를 신봉하던 남인 일파의 사람들이 형조에 체포되었으나 중인 김범우(金範禹)만이 유배되었을 뿐 양반 자제들은 석방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남인들은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서파(信西派)와 이에 반대하는 공서파(攻西派)로 분리하게 되었다.


  1787년 겨울에 요한은 이승훈 등과 더불어 과거 공부를 빙자하고 반궁(泮宮)에서 천주교서(天主敎書)를 강습하였다. 이때 이 현장을 목격한 이기경(李基慶)이 홍낙안(洪樂安)과 더불어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고 성토하게 되었는 바, 이것이 소위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다. 또한 이 무렵 요한은 권일신, 이승훈 등 유력한 교우들과 함께 복음의 전파를 보다 쉽게 하고 신입 교우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하여 가성직(假聖職)의 교계 제도(敎界制度)를 세우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이 없던 당시의 교회에서 이들은 교회가 지도자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년 후 이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瀆聖罪)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는 곧 중단하였다.


  1792년 진주 목사로 있던 부친이 사망한 후 요한은 수원성(水原城)의 축조에 가담하여 청나라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이용한 서양식의 「기중가설(起重架設)」로 크게 공헌하였다. 이 사실은 ‘서학’에 관심을 많이 나타냈던 그가 실제로 그 학문적 이론을 현실에 적용시켰던 예이다.


  이보다 한 해 앞서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의 권상연(權尙然)과 윤지충(尹持忠) 등이 위패(位牌)와 제사 들을 폐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을 발단으로 하여 공서파의 이기경, 홍낙안 등은 신서파를 공격하였는데, 요한도 그 가운데 휩쓸리게 되었다. 이기경은 당시 너무나 격렬하게 천주교 신자들을 공격한 나머지 정조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이 도리어 남인들 사이에서 천주교 신봉을 크게 문제삼도록 하였으며, 이에서 신유교난(辛酉敎難)이 발생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무렵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의 문객 한 사람이 향교(鄕校)를 옮겨 그 땅을 관찰사에게 주고, 관청의 곡물로 폭리를 취하는 등 세력을 뒷받침으로 하는 협잡을 일삼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요한으로 암행어사를 삼아 경기도 일대를 돌아보도록 하였다. 이것을 기회로 그는 농촌의 궁핍한 실정을 많이 목도하였으며, 이로써 훗날 그의 학문에서 현실적인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방 순찰에서 돌아온 요한은 복명서(復命書)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그는 백성을 중히 여기고 나라의 법을 존중하여 협잡과 부정에 대해서는 공정 무사하게 처리할 것을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서용보는 이에 요한을 질시하고 그를 배척하는 데 항상 앞장을 서게 된다.


  이듬해인 1795년 조선에 입국한 이래 천주교 포교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체포되면서, 요한은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이 사건에 연루되어 충청도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되었다. 이곳에서 농부들의 생활을 다시 한 번 목도하면서 나날을 보내던 그는 그해 12월 임금의 명으로 다시 조정에 들어와 규장각의 편찬 사업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이때 그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류득공(柳得恭), 이가환(李家煥), 이만수(李晩秀), 박제가(朴濟家), 이서구(李書九), 이상황(李相황) 등 유명한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를 반대하는 벽파(僻派)의 무리들은 항상 요한을 관직에서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요한은 이에 <자명소(自明疏)>를 올림으로써 반대파들의 질시를 면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자기 변명의 이론을 제시한 것으로 천주교에 대한 그의 태도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문헌이다. 이 <자명소>로써 그를 배교자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가 이러한 변명을 한 것은 자신의 연명책(延命策)이 아니라 관료학자로서 이 사회를 개선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많았던 때문이었다.


  ‘서학’에 있어 천문(天文), 역상(曆象), 농정(農政), 수리(水利), 측량(測量) 등의 과학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게 할 정도로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학문으로서의 흥미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통하여 조선의 현실을 발전시키는 데 밑바탕이 되는 문제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일념이 실현화되기도 전에 그를 모함하는 무리들은 그의 정신적 천주교 신봉을 트집 잡았던 것이다. 이에 그가 일시적으로 피하기 위하여 <자명소>를 내놓았지만, 반대파들의 거센 반발 때문에 임금은 마침내 그를 황해도 곡산 부사(谷山府使)로 보내어 공격의 화살을 피하게 하였다.


  곡산에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마친 정약용(요한)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신헌조(申獻朝), 민명혁(閔命赫) 등이 다시 천주교 문제를 들고 나서자, 요한은 그가 37세 되던 1798년에 관직을 물러나고 말았다. 1800년 봄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이로써 그는 근 15년간의 관직 생활에서 아주 물러나게 되었다. 비록 높은 자리에 올라서 경륜을 마음껏 펴 보지는 못하였지만 성실한 관리로서의 생활은 그의 학문에 많은 이점을 제공하여 주었다.


  관직을 떠나 있던 요한을 다시 불러들이고자 정조 왕은 여러 사람들의 비난을 외면하였다. 그러던 왕이 1800년 세상을 떠나고 이어 순조(純祖)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순조 왕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의 증조모이자 영조(英祖) 왕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섭정을 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실시하였다. 이 대왕대비 김씨의 친척들은 모두 노론과 벽파(僻派)에 속해 있어 이들은 다시 얻은 권력을 이용하여 남인과 천주교인들을 배척하려고 하였다.


  정조 왕의 장례식이 끝난 후 곧 대왕대비 김씨는 시파(時派)의 모든 고관들을 파직하고 전국에 천주교를 금하였다. 그리하여 어린 임금과 김씨의 이름으로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공포되었다. 요한은 이러한 물결에 의해 다시는 관직에 나갈 수 없게 되었으며, 이로써 뜻있는 경륜을 펴고자 열망했던 그의 정신도 실현할 수가 없었다.


  박해의 명령이 내리자 전국 도처에서는 수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수상하다고 생각된 집은 무조건 수색을 당하고 유린되었다. 대왕대비 김씨는 오가작통(五家作統)의 법을 만들어, 만일 다섯 가구 중에서 천주교를 따르는 집이 하나라도 있으면 나머지 모두가 연대 책임을 지도록 하여 천주교의 전파를 강압적으로  막았다. 1801년에 시작된 이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그 해 2월에 요한과 함께 이가환이 체포되어 투옥되고 이어서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이기양(李其讓), 권철신, 오석충(吳錫忠), 홍낙민(洪樂敏), 김건순(金健淳), 김백순(金伯淳) 등이 체포되어, 그중 이가환, 이승훈 등과 함께 요한의 형 약종이 사형을 당하였다.


  요한은 그의 학문과 공적으로 해서 석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경기도 관찰사였던 서용보 등이 고집하여 경상도 장기로 유배형을 받았다. 그의 셋째 형 약종과 몇몇 교우들은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고, 둘째 형 약전도 전라도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었다.


  유배형이 내리자 요한은 즉시 밤길을 떠났다. 집안 사람들과 작별을 하고 충청도 조령(鳥嶺)을 넘어 3월 9일에는 장기에 도착하였다. 유배지에서 그는 한 군교(軍校)의 집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그가 너무나 출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군교가 밖에 나오도록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 곳에서 요한은 자신의 학문을 재정리하면서 새롭게 체계화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미 서울에서는 천주교인들의 탄압이 확대되어 수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고 이 중에 사형되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한 이 사실을 북경 주교(北京主敎)에게 전하고자 한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가 발각됨에 이르러서는, 천주교 반대파들이 요한을 사형에 처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하였다.


  이때 황해도에서 돌아온 정일환(鄭日煥)이 요한의 공적을 크게 여겨 ꡒ죽일 수 없는 사람ꡓ이라고 주장하여 결국 죽음만은 면하게 되었다. 다만 황사영의 백서 사건만은 면할 수 없어 다시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다. 둘째 형 약전도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며, 이 길이 형제 사이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요한은 당시 형의 권고와 간청으로 배교하고자 하는 나약한 마음을 나타냈었다. 일시적으로 약함을 나타냈던 그는 몇 해 후에 귀양이 풀리고 나서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통회하였고, 모범적인 열심과 극기로 교우들을 위로하였다. 그는 여러 종교 서적을 남겼고, 특히 한국 복음 전래사(韓國福音傳來史)를 서술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전래와 전파, 그리고 당시의 사정들을 자세히 기록하여 놓기도 하였다.


  강진에 도착한 요한은 일체 출입을 하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았으며 자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진의 현감은 그의 죄를 꾸며내어 조정에 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아무 근거도 없었으므로 그는 무사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를 석방시키려는 사람들과 이것을 막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오고 갔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마침내 그가 57세 되던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에 의하여 귀양이 풀리고 고향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불안과 궁핍으로 보낸 18년간의 유배 생활은 그에게 모든 학문을 체계화하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었으며, 천주교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그의 이론이 정리되도록 하였다. 즉, 이 곳에서 쌓아올린 그의 학문 체계는 ‘서학’을 바탕으로 유교의 정신세계를 전면적으로 이해하며, 이것을 전제로 하여 제도(制度), 법제사(法制史)․정치․경제․국방 등 광범위한 분야를 연구한 것이었다.


  조선의 봉건사회를 이해하고 이를 개혁하려고 하였던 그의 현실적 정신은 천주교 신자요 관료학자였던 그로 하여금 경학(經學)이나 정치․경제의 이념을 조선의 현실 사히에 결부시키는 데 힘쓰게 하였다.


  요한이 지은 저서는 총 5백여권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저술은 약간 유루(遺漏)가 있으나 오늘날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그 대부분이 수록되어 우리에게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도록 하여 주고 있다. 특히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실학자로서의 그의 면목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인바, 전자는 중앙 행정기구 중에서도 특히 국가의 산업과 경제를 바로잡기 위한 새로운 기구 개편안이고, 후자는 지방 수령들이 지켜야 할 치민(治民)의 도리를 중심으로 하여 지방 행정과 농민 경제를 정비․향상시키려는 지침서였다.


  「경세유표」는 미완성된 것으로 형(形)․공(工)에 관한 내용은 작성되어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를 저술하는 도중에 농촌경제를 보다 시급히 생각하였던 그가 「목민심서」로 붓을 옮긴 때문이었다. 유배지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요한은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저술하여 당시 문란했던 재판과 형정상(刑政上)의 여러 가지 주의점과 시정책을 상세히 지적하였다.


  현실의 개혁에 대한 이념과 함께 요한은 도처에서 천주교 신앙에 대한 사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그의 굽히지 않는 의지와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만천유고(曼川遺稿)」의 내용이나, 「중용 강의(中庸]講義)」, 「제례고정(祭禮考定)」, 「상의절의(喪儀節義)」등의 저서에서 나타나는 사상은 바로 천주교의 교리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자찬 묘지명(自撰 墓誌銘)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피력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요한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교회의 모든 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언제나 방에 들어앉아 몇몇 친구들 밖에는 만나지 않았다. 그는 자주 대재(大齋)를 지키고, 그 밖에 여러 가지 극기를 행하여 몹시 아픈 쇠사슬 허리띠를 만들어 두르고는 한 번도 그것을 풀어 놓지 않았다. 또한 오래 묵상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는 이 묵상의 일부를 적어 놓았고, 또 외교인들의 미신을 반박하는 저서와 신입 교우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리 해설서를 저술하였다. 오랫동안 천주교를 원망하여 신앙(信仰)을 멀리하였던 그의 큰아들 학연(學淵)은 이러한 요한의 생활에 힘입어 점차 회개하기 시작하였으며, 죽기 몇해 전에는 성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6세에 과부가 되어 외로운 일생을 보내고 있던 요한의 누이 한 명도 늦게나마 신앙을 얻었고, 1851년에는 최양업(崔良業)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기까지 하였다.


  요한이 이렇게 고향에서 생활하던 중 1830년에는 젊은 순조(純祖) 왕의 아들 효명세자가 중병에 들어 위독하게 된 일이 발생하였다. 전국에 있는 의원들이 모두 임금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불려졌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때 궁중에서는 요한의 의술이 유명하다 하여 그를 궁중으로 부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가 관직에 복직되지 않아 야인(野人)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관습상 대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며, 더구나 임금을 접견할 수는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왕명으로 요한의 모든 명예와 관직을 회복시키고 그 가족에게도 습작(襲爵)을 회복시켜 주었다.


  대궐로 들어간 요한은 임금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어린 임금의 병이 너무 악화되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효명세자는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 과정에서 흉한 일이 발생하였다. 빈궁(殯宮)에서 화재가 나서 이 불이 재실(梓室)에까지 번졌고 상청(喪廳)으로 꾸민 방에 있던 관이 반쯤 타고 관을 덮었던 장식품도 타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일로 복권(復權)이 된 후에도 요한은 고향에서 생활하면서 그의 생활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아니하였다. 날로 더해 가는 그의 열심은 모든 신자들을 기쁘게 하고 감화시켰다. 깊어진 신앙심으로 그는 이제 천주의 진리를 항상 생활에서 표현하였으며, 주님의 품안에서 모든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1835년에는 이미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고향 마재의 집에서 주님의 영광 안으로 떠나게 되니, 이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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