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환

 

이가환은 영조 18년에 태어났다. 이용휴(李用休)의 아들이며, 성호(聖湖) 이익(李瀷)의 종손으로서 본관은 여흥이다. 호는 금대(錦帶) 혹은 정헌(貞軒), 자는 정조(廷藻)이다.


  이승훈의 숙부인 그는 남인 학자 안정복, 정약전, 이 벽, 권철신 등과 학문적으로 교류하는 친구 관계였다. ‘황사영 백서(帛書)’의 기록에 의하면, 이가환은 어렸을 적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으며, 장성함에 따라 풍채와 태도가 우람하고 당당하였다. 도량이 크고 문장이 전국에 으뜸이었고, 아니 본 책이 없으며, 기억력이 뛰어나 보통 인간과 같지 않았다 한다.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하여 일찍이 그 자신 스스로 ꡒ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ꡓ고 할 만큼 수학에 뛰어난 학자였으며, 정조 왕이 ‘진학사’라고 붙일 만큼 대학자였다.


  그는 서른 살이 넘어서 진사(進士)에 오르고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는데 선왕이 훌륭한 그릇이라 하여 애중(愛重)하였다.


  갑진(甲辰), 을사(乙巳)년 무렵에 그는 이 벽 등이 성교를 믿는다는 말을 듣고 꾸짖어 말하기를 ꡒ나 역시 서양 서적 몇 권을 보았는데 (그의 집에 「직방외기(職方外記)」「서학범(西學凡)」등이 있었다), 그것은 기이한 글 괴벽한 책으로 다만 내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소. 그것이 어찌 생사의 도리를 깨달아 내세에 마음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이겠소?ꡓ라고 하였다. 이 벽이 이론(理論)에 의거하여 대답하니, 가환은 말이 막혀 마침내 책을 가져다 자세히 읽어 보겠다고 하였다.


  이 벽은 초함(初函) 책 몇 가지를 주었는데, 그때 「성년광익(聖年廣益)」한 권이 있었으나 이가환이 영적(靈蹟)을 믿지 않을까 보아 빌려 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가환은 기어코 달라고 하여 이 벽이 그때 가지고 있던 성교 서적을 모조리 가지고 가서 정신을 가다듬어 되풀이해 읽어 보고는 믿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ꡒ이것은 진리요 정도(正道)다. 진실로 사실이 아니라면, 이 책 가운데 한 말은 모두 하늘을 모함한 것이요, 하늘을 업신여긴 것이나 서양 사람이 바다를 건너와 전교하지 못하고 마땅히 벼락을 맞아 죽었을 것이다ꡓ하고 마침내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화하고 비밀히 이 벽 등과 아침저녁으로 왕래하여 상당히 열심이었다.


  이때 이승훈 등이 망령되게 함부로 성사(聖事)를 행하였는데, 가환은 남에게 권하여 그에게 세례를 받게 하였으나, 자기는 그러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자기가 사신이 되어 북경(北京)에 가서 서양 사람에게 영세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세가 어려워짐을 보고는 마침내 공과(功課)를 폐지하여 버렸는데, 성교를 믿는다고 비방받는 사람은 대부분 가환의 일가 친척들이었으므로 악한 무리들이 항상 그를 교주(敎主)라 지탄하여 배척하였다.


  신해년(辛亥年) 박해 때 그는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있어 성교를 많이 해침으로써 자기를 변명할 계책을 삼았다. 교우에게 ꡒ도둑 다스리는 법ꡓ조문을 적용한 것도 가환에게서 시작된 일이다. 신해년 이후에 선왕이 남인을 많이 등용하자, 가환은 기회를 타 여러 높은 벼슬을 역임하고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을묘년(乙卯年)에 세 사람이 순교한 후에 악한 무리들은 신부님의 일은 모르고 그 죄를 이승훈과 이가환에게 돌려 잇달아 상소하여 번갈아 공격하였으므로 선왕도 하는 수 없이 승훈을 예산(禮山)으로 귀양보내고 가환을 좌천시켜 춘주 목사로 삼았다.


  충주에 한 교우가 있었는데, 전부터 남들에게서 비난을 많이 받아 왔다. 가환은 그를 혹독한 형벌로 다스리며 억지로 배교하라고 명령하였다. 교우에게 주뢰(周牢)를 사용한 것도 가환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그가 또 고 관기(官紀)로 첩을 삼았는데, 이러한 것이 다 자기에 대한 비방을 벗으려고 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버림받고 다시 등용되지 아니하여 집에서 글로써 스스로 즐겼다.


  그의 아내는 본래 성교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딸과 며느리와 첩과 여종을 권유하여 감화시켰으며, 혹 성서가 탄로나도 가환은 조사하여 금하지 아니하였다.


  무오년(戊午年), 기미년(己未年) 사이에 그는 지방에서 박해가 잇달아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그에 대한 자기의 소신을 말하기를 ꡒ이것을 비유하면 막대기로 재를 두드리는 것과 같은 일이라서 치면 칠수록 더욱 더 일어나오. 주상께서 아무리 금하려고 하셔도 끝내 어찌하지 못할 것이오ꡓ하였다.


  처음에 금부에 잡혀 들어갔을 때에는 오히려 스스로 변명하고 죄를 승복하지 아니하였으나, 옥사를 다스리는 자가 모두 평시에 그를 원수처럼 미워하던 사람이라 기어코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그 스스로 마침내 본심을 드러내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변하지 아니하여 혹독한 매질과 불로 지지는 형벌아래 순교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60세였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