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완숙(골룸바)

 

강완숙(골룸바)은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여인 중에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국내의 사료에서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국외의 사료(파리 외방전교회에 소장된 한국측 자료)들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녀는 조선시대 영․정조(1761~1801년) 때의 여인으로서 교회 내에서의 활동은 남성들을 능가하였으며, 그 시기에 끼친 영향과 업적은 대단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선교사들의 찬사와 함께 여러 가지 역사적 사료들이 충분히 이를 입증하고 있다.


  강완숙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의 위치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여성사 안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 시기 대부분의 여성들은 가정에서만 생활하였고, 모든 행동을 제약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 시대에 있어서 가정을 벗어나 사회에까지 그 활동 범위를 넓혔다.


  그녀는 최초의 활동 무대가 교회 안이라는 정해진 곳이기는 하지만, 여성 단체를 조직하였고,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더 나아가 동정녀들이나 과녀(寡女)들을 모아 교육활동까지 지도하였다. 그리고 명도회의 여회장직도 맡았다. 이는 당시 유교 일색인 양반사회에서는 실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주목할 만한 일이다.


  강완숙은 내포(內浦) 지방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말재주가 있었으며 용감하였다. 그리고 생각과 취미가 고상하여 한때 수도자가 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덕행을 실천하기 위해 한때는 불교에 귀의도 해 보았으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법공(法供)과는 완전히 인연을 끊었다.


  그녀는 덕산에 사는 홍지영의 후처가 되었다. 남편이 용렬한 까닭으로 그와 마음이 맞지 않아 항상 우울하고 답답한 나날을 보내면서 속세를 떠날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마침 충청도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천주교’란 말을 듣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敎)의 이름이 바르니, 교의(敎義)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책을 구하여 읽어 보고 마음을 기울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총명하고 부지런하였으며 매사에 열성적이었고 자제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먼저 가까운 친척과 가족들을 교화시키면서 이웃 여러 마을에까지 전교하였다. 한편, 그녀는 남편에게도 온 힘을 다하여 신앙을 갖게 하려고 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신해년(1791년) 박해 때는 고향이 소란해지자 남편 전처의 한 아들과 시어머니를 데리고 상경하였다. 그당시 그녀는 이미 남편에게 쫓겨나 있었다. 남편 홍지영은 열렬한 신자인 아내때문에 자기도 피해를 입게 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그녀는 지 황(사바)과 윤유일(바오로) 등이 주문모 신부를 영접하는 행사에 참여하여 경제적 일을 담당하였으며, 교회내의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많은 일을 도왔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주신부는 그녀의 영리함과 성실함을 인정하여 여회장으로 임명하고 여신도들을 돌보게 하였다.


  1794년 5월 박해 때, 그녀는 주문모 신부를 단독으로 자기의 본가에 숨겨 두고 힘을 다해 보호하였다. 포졸들이 문 앞까지 왔지만 안으로 감히 들어올 수 없도록 만드는 등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박해가 지난 후, 주 신부는 그녀의 집으로 아주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그후 6년 동안 자신의 집에 주 신부를 모시고 교회의 모든 중요한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였으며, 그의 신임을 받았다.


  강완숙은 물심 양면으로 주 신부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교회내의 경영과 적응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다.


  또한 그녀는 동정녀들과 과부를 많이 모아 지도한 후, 그 과정이 끝나면 그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방문케 하여 신앙을 권유토록 하고, 자기 자신도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남을 권유해서 감화시키기에 전력을 다했다.


  그녀는 대단히 능란한 언어 구사와 이치에 합당한 말로 교리를 잘 가르쳐서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또한, 일처리를 과단성 있게 하였고 위엄도 있어서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다. 1801년(신유년)에 그녀는 관가에 체포되어 주 신부의 종적에 대하여 신문을 받았으며 주뢰(周牢)의 고문까지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변함없이 태연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많은 형고(刑苦) 끝에 참형을 당해 순교하였는데 그의 나이 41세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황사영 백서(帛書)에 나타나 있다. 황사영은 그 당시 강완숙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주문모 신부에게서 영세하여 입교하고 그녀와 함께 활약하였다. 그는 그녀의 일거일동을 모두 관찰할 수 있었고 매사에 함께 활동하였다. 황사영이 그의 백서에 남긴 강완숙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며, 그녀의 전기적 내용으로서 매우 객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그녀의 활동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그 시대에 강완숙과 함께 활약했던 일련의 부녀자들의 교회 내에서의 활동과 그 의식의 개화를 살펴보자.


  당시 교회 내에서 강완숙의 가장 두드러진 활약상과 업적을 몇가지 관점에서 다음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명도회 여회장으로서 남인 양반과 중인들로 구성된 남교우들과 더불어 펼쳤던 다양한 선교 활동이다. 둘째는 당시 사족가(士族家)의 부녀자들을 입교시켜 일종의 동정녀들과 과부들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그들을 교육시킨 최초의 지도자로서 한국 종교 사상 수도회 성격의 단체를 처음으로 조직하였다. 나아가 선교와 자선적인 교회 사업의 다반사에 참여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과 확장에 많은 공헌을 한 점이다. 셋째는 가장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중국인 선교사였던 주문모 신부를 6년 동안이나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고 보호하면서 당시 한국교회의 모든 일처리를 순조롭게 했다는 점이다. 끝으로 그녀의 가장 큰 행업(行業)은 역시 그녀가 불굴의 의지로 신앙을 지킨 순교자라는 점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그녀의 업적과 활동의 양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서 그녀의 활동이 한국 초기 교회에 끼친 영향의 심도(深度)를 고찰해 보자.


  강완숙은 선교 활동으로 먼저 그녀의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 홍필주를 개종시켰다. 그 아들은 다음에 순교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황사영 백서에서 ꡒ권화전가(勸化全家) 방린급리(蒡隣及里)ꡓ하였다고 한 바와 같이 선교 영역도 대단히 넓어 전 가족은 물론 이웃 동리에까지 미쳤다. 먼저 그는 시어머니를 입교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어머니는 하느님을 섬기며 천주교의 신심 생활은 하려고 했으나 조상에 대한 제사를 버릴 결심은 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시어머니에게 권하고 완전한 회개와 개심을 얻기 위해 열렬한 기도를 드렸다. 그 결과 마침내 그녀의 시어머니는 가묘(家廟)를 헐어 자신의 미신을 완전히 벗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 후 그녀는 자기 친정 부모도 입교시켜 임종을 잘 마치게 했다고 한다.


  1791년 신해교냔 때, 강완숙은 자신의 고향에서 음식을 만들어 옥에 갇힌 교우들을 방문하였고 그로 인해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그런 뒤에 신앙 생활에만 더욱 전념하기 위해 상경하였고, 상경한 다음에는 주문모 신부를 모셔 오는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지 황과 그의 동료들의 활동에 협력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 즉시 신부의 눈에 띄었고 그의 활동의 역량을 목격한 주 신부는 그녀를 즉시 여회장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한편, 주 신부는 입국 후 밀고자들 때문에 자신의 소재가 들어난뒤부터 강완숙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그녀의 집은 그가 여회장직을 맡고 있었기에 교해 내의 제반 행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와 같은 모임에서 주인이었던 강완숙은 모든 일처리를 규모 있게 잘 진행했다. 또한 새로 들어오는 신입 교우들에게 교리와 영세 준비 븡을 마련했으며, 여러 기록에 의하면 교리 강습회 및 강연회를 자주 집회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강완숙에게 지도를 받아 일련의 양반가 부녀자들이 새로 입교하였다. 황사영의 서술에 따르면, 강완숙이 주 신부를 보호한 공이 있고 재능이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모든 대소사가 그녀에게 맡겨졌으며, 모든일을 열심히 일을 처리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사족가의 부녀자들을 많이 입교시켰다. 이는 당시의 국법에 역적만 아니라면 양반의 부녀자에게는 형벌이 미치지 않았기에 그들은 금령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문모 신부가 그러한 점을 감안해서 천주교를 널리 전파할 기반으로 삼고자 여교우들을 특별히 후대하였으므로 당시 교회내에 여교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편, 첨례(瞻禮)를 보는 장소로도 강완숙의 집이 dmEMa이 되었다. 당시 서울의 첨례 보는 장소로는 「사학징의(邪學懲義)」등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김이우․황사영․정광수․최필제․손경태 등의 집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강완숙의 집에서 거행된 첨례가 횟수로 보거나 참석자의 수로 보아 제일 많았을 것이다. 거기서 거행된 첨례에 빠짐없이 참석하였던 윤점혜(尹占惠)의 말에 의하면, 매월 6, 7차 또는 10여차 첨례에 함께 모여 기도하였고, 첨례하는 날에는 각처에서 남녀 교우가 많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매월 첨례를 거행한 것이 적어도 6, 7차였다면 그 횟수로 미루어 주일과 판공첨례날만이 아니라 일반 축일에도 첨례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이전의 교우가 4천명에 불과하던 것이 후기에 1만명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발전의 모든 요인을 강완숙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정도로 그녀의 선교 활동은 폭이 넓었다. 강완숙은 상식과 지식에 재치 있는 말재주까지 겸비하였기에 당시 부녀자들을 많이 입교시켰고, 그 중에는 지체 높은 양반집 부녀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양반 출신의 여교우로서는 한신애(아가다)와 그의 딸 조혜의, 홍필주의 일가인 홍정호의 어머니 이 소사, 그의 며느리이고 이윤하의 아내이며 이경도와 이 누갈다의 어머니인 권 소사, 윤점혜와 윤운혜 자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임 소사, 정광수의 누이 동생 정순매, 조 섭의 아내 이 희와 그의 딸 조도애, 죽은 참판 이중복의 아내 신 소사 등이 있다. 이러한 사족가의 부녀자들은 거의 강완숙의 선교 활동에 의하여 입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강완숙의 특이할 만한 선교 활동은 역시 왕가의 부녀자들과 궁내의 나인(內人)들에 대한 선교이다. 즉, 강화도에 유배중인 은언군 이인의 아내 송씨와 그의 며느리 신씨부인의 입교와 영세 및 그들의 순교(사약을 받고 순교됨)는 모두 강완숙의 선교 활동의 결과이다. 또한 폐궁나인(廢宮內人)인 강경복과 서경의가 그녀의 선교로 입교하였고, 그들을 중개로 하여 폐궁에 남아 있던 은언군의 아내 송씨와 그의 자부 신씨와 자주 연락을 취하고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한편 신궁나인(新宮內人) 문영인은 강완숙에게 직접 문교(問敎)한 것은 아니지만 그와 친숙하게 지내며 교리와 신심을 익혔다. 그리고 그녀는 이조판서 이가환의 동서 박생원 등 남인 명사들과도 자주 연락을 가졌었다. 그녀의 집에 거처했던 주문모 신부와 접촉했던 수많은 남교우 인사들(김의호, 송재기, 황사영, 정광수, 이용겸, 김계원)과도 빈번한 접촉과 상호 교류가 있었다. 이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당시 여성으로 볼 때는 특출한 선교 활동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선교 활동으로 강완숙은 양반가의 부녀자들을 직접 가르치거나, 아니면 그들이 그녀의 집을 왕래하면서 자주 그녀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을 중심으로 초기 교회의 제반사가 운영되었으며, 그들은 더욱 신심을 익혔고 교회의 확장을 시도했다. 강완숙은 불행하고 의지할 데 없는 여자들을 거두어 그의 집에서 살게 하며 교리를 가르쳤다.


  그녀의 집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살아가던 과부 김순이와 김월임, 그리고 머슴이나 하녀로 있던 김홍년, 김소명, 김정임 등이 모두 그러한 인연으로 입교하였다. 이 밖에도 권 생원의 비자(婢子)로 알려진 복점, 선혜청의 사고직인 김춘경의 아내 유덕이, 포교 강득녕의 어머니 홍언인애 기연이, 청상과부인 이을인애기 등이 강완숙의 인도로 입교하였다. 그녀의 포교는 당시의 양반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상하의 계급적인 구별 없이 실행되었다. 이에 상하 계급이 뚜렷했던 조선 사회의 전통적 인습을 완전히 흔들어 놓은 그녀의 평등 의식이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강완숙의 광범위한 선교 활동 및 강완숙의 집을 중심으로 주일과 첨례날에 모인 각계각층의 남녀 교우들과의 접촉, 각계각층의 신자들과 연락을 긴밀히 한 관계로 해서 강완숙에 대한 관찬 기록이나 실록 등은 그녀를 ꡒ스스로 사학(邪學)의 괴수가 되어 여러곳의 남녀 교인들을 불러들여 밤낮으로 강습하여 곳곳마다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 일세(一世)를 미혹케 하였다ꡓ고 묘사하였다. 또한 그 아들의 공술(供述)에서도 ꡒ일가 노소(一家老少)를 교유(敎誘)하고 각처의 사흉(邪凶)과 체결(締結)하여 소굴을 만들어 스스로 사괴(邪魁)가 되었다.ꡓ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선교 활동의 범주가 어떠했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강완숙이 당시 초기 교회에 공헌한 가장 큰 업적은 역시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숨겨 보호하여 초창기 한국 교회의 확장을 도왔던 점이다. 강완숙이 초기 한국 교회에 공헌한 점도 그것이요, 또한 그녀가 체포되어 생명을 잃게 되는 원인도 주문모 신부를 자기 집에 수년간 숨겼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러한 공헌을 했던 것이다. 즉, 강완숙은 남녀 칠세 부동석을 운운하는 당시 유교 사회의 인습으로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많은 사료나 기록에서 그녀의 ‘주문모 신부 은닉 사건’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데, 강완숙이 주문모 신부를 은닉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달레는 정확하게 언급하였다.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기 이전에 벌써 서울에 도착하여 지 황 등의 신부 영입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원으로 활약한 것 같다. 그녀는 주 신부를 영입하는 데 수용되는 모든 비용의 거출이나 경비를 담당하였다. 주 신부가 입국하자 강완숙은 주 신부에게서 정식으로 영세를 하였다. ‘골룸바’라는 영세명은 이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주 신부가 국내에 들어온 것이 알려져서 그가 포졸에게 쫓기고 있을 때, 강완숙은 그를 구할 수 있다는 용감한 생각을 하였다. 즉, 그녀는 주 신부가 사상 최초로 입국한 이 나라의 정신적 인도자라고 생각했다. 성직자의 존재로 당시 조선 사회에서 얼마나 귀한 것이며 중대사인가를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자기 힘으로 신부를 구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녀는 우선 자기 집 장작 광에 주 신부를 숨기고 시어머니와 아들 홍필주까지도 모르게 석 달 동안 그 곳으로 음식을 날랐다.


  그는 주 신부에게 좀더 편한 피신처를 마련하여 드릴 수 없는 것을 괴로워하여 시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 볼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그 한 방편으로 계속하여 울며 기도하고, 먹지도 않고,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잃을까봐 겁이 나서 그렇게 근심하는 까닭을 묻게 되었다. 강완숙은 주 신부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조선인들의 영혼을 구하려고 이곳에 왔는데 조선 사람은 아무 것도 한일이 없고 피신시킬 곳도 없게 되었다는 것과 남장을 하고서라도 사방을 다니면서 신부님을 보호하여 피신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때 그의 시어머니는 ꡒ네가 그렇게 하면 내가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느냐. 그러나 나도 너를 따라가서 함께 죽겠다.ꡓ고 하였다. 이때 강완숙이 ꡒ어머님, 저는 어머님의 덕행이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보고 매우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는 물론 신부님을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내놓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는 우리가 신부님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고 공연히 위험만 당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며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천주께서 우리의 착한 뜻을 보시고 신부님을 우리 있는 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이 거기에 동의하신다는 확약만 주신다면 저는 곧 마음의 평화를 얻겠습니다. 저는 전에 가졌던 기쁨을 되찾아 어머님께 죽을 때까지 효성을 다하겠습니다.ꡓ라고 하였다.


  시어머니는 ꡒ너하고 떨어지기는 싫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ꡓ하고 승낙하였다. 강완숙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며 신부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를 안사랑에 모셔들였다. 주 신부는 거기서 외부 사람들이 양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는 조선 관습의 보호로 6년간 머물렀던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달레가 「한국교회사」에서 강완숙이 주문모 신부를 은닉했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황사영 백서」와 「사학징의」및 「실록」등의 관찬 기록에서는 ꡒ주문모 신부를 숭봉(崇奉)하여 골룸바라는 이름을 받고 6년 동안 숨겨 두었다.ꡓ라고 하였으니, 6년간이나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면서 교회안에 모든 집회를 인도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조선 초기 교회의 남녀 교우들 중에서 얼마나 중요한 활약을 하였는지 알 수 있다.


  1801년 초부터 신유년 교난이 발발하여 신자들의 체포령이 내려, 2월 24일에 강완숙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녀는 천주교인 가운데서도 가장 간악한 요녀(妖女)로 취급되었다. 주 신부의 행방을 찾는 관리들은 그녀에게서 신부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 온갖 악형을 가했다. 그녀가 이와 같은 혹형을 초인적인 능력으로 감내하는 것을 목격한 형리들은 그녀를 ꡒ귀신ꡓ같이 생각했다고 한다.


  더욱 그녀는 옥중 관리들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모든 고금의 성현들을 끌어내어 천주교와 비교 설명했기 때문에 관리들마저 감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관리들이나 수감자들은 그녀를 ꡒ유식한 여인네ꡓ, ꡒ비길데 없는 여자ꡓ, 혹은 망연자실할 정도로 ꡒ놀라운 여자ꡓ라고 표현했다. 형리들은 그녀를 배교시키려고 더욱 간혹한 형벌을 그녀에게 가하였으나 언제나 실패하였다.


  그토록 그녀는 비상한 초자연적인 힘으로 이 형벌을 이기면서 주문모 신부의 거처를 대거나 배교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의 교리를 해설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녀는 양반가의 부인으로서는 당시의 어떤 형법 조목에도 없는 예외의 특령에 의하여 체포되어 많은 법외의 형벌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그녀는 옥중에서도 몇가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중의 하나는 그녀와 함께 체포되어 다른 옥에 갇혀 있었던 그녀의 전실(前室) 아들이며 그녀와 함께 상경했던 홍필주(필립보)가 혹심한 형벌로 인해 마음이 약해져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이다. 그녀는 아들에 옥에서 법정으로 나가는 어느날 먼발치로 아들을 보고 큰소리로 ꡒ내 아들아 용기를 내고 천당 복을 생각하여라. 예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너는 눈이 어두워져서 스스로 멸망할 수 있겠는가?……ꡓ라고 격려하였다. 그 아들은 결국 끝까지 배교하는 일 없이 몇달 후에 순교하여 순교자들의 반열에 기록되었다.


  또한, 그녀가 옥에 갇혔을 때 주 신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옷자락을 찢어서 거기에 주 신부의 사도적인 업적을 기록하였다. 그녀의 의식속에는 한 위인의 행적을 길이 남기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비단조각은 이를 맡았던 여교우의 소홀로 불행히도 없어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강완숙은 열렬한 기도 생활과 신심으로 함께 옥에 갇혔던 다른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많은 약한 여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천주님께 합당하려는 마음밖에 없었으며, 순교의 순간이 다가오기를 간절히 갈망하였다. 그들이 죽기 전날은 기쁨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드디어 그녀는 신자들, 즉 최인철, 김현우, 이 현, 홍정호, 김연이, 강경복, 한신애, 문영인 등과 함께 5월 23일(양력 7월 3일)에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으로 가는 동안 그들은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그치지 않았다. 군중은 그들의 얼굴에 거룩한 기쁨이 빛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형장에 이르러 강완숙은 사형을 주재하던 관리에게로 몸을 돌려 말하기를 ꡒ국법에서는 사형을 받아야 하는 자들의 옷을 벗기라고 명하고 있으나, 여인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온당치 않을 것이니, 우리는 옷을 입은채로 죽리를 청한다고 상관에게 알리시오ꡓ라고 하여 그 허락이 내려져서 옷을 입은 채 십자 성호를 긋고 맨 먼저 머리를 형리들에게 내밀어서 참형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41세였다.


  그녀는 남다른 생애를 살았고, 그 당시 여성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혁명적인 행동과 비록 교회내에서였지만 엄청난 사회활동을 했다. 사회적으로 개척적인 조선시대 여성상을 구현함으로써 한국 여성사에서 지울 수 없는 여인이 되었던 것이다.


  1801년 신유교난을 전후하여 남녀 신도 가운데 가장 큰 활약으로 한국 초기 천주교회의 내외에 명성을 떨쳤던 강완숙은 사족가(士族家)의 부녀자로서 당시 사회의 모든 계층을 가리지 않고 선교하였다. 또한 강완숙은 그 시대의 여성으로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인습 때문에 당해야 했던 억압이나 유교적인 제한 등 당시 여성의 한계성을 극복하면서 자유롭게 행동했던 특출한 여성이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와 같은 그녀의 역량과 능력은 역시 천주교라는 종교의 신앙심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ꡒ이웃에 대한 형제애ꡓ를 실천했으며, 남녀의 차별이나 계급간의 차별을 넘어선 평등 사상을 행동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유교적인 봉건사회에 대하여 어떤 도전을 했다든자. 여필종부가 가부장적 제도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도전했다기 보다는 결과적으로 그녀 활동 영역에서 그런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유학적인 당시 사회의 교육이나 전통이 강완숙의 새로운 종교 활동에 오히려 하나의 기반으로써 이용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많은 사가(史家)들은 신유년 박해 이전에 한국 천주교가 그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강완숙의 선교 활동에서 기인되었다고 찬사를 이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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