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은민(마르띠노)

 



  인은민(印隱敏․마르띠노)은 충청도 덕산(德山) 지방의 주래(현, 예산군 삽교면 용동리) 고을에 사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성격이 온순하고 꿋꿋하였으며, 성장하면서는 학식도 풍부하여 누구에게나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마르띠노가 입교한 것이 정확히 몇 살 때인지 알 수 없으나 50대 후반에 이르러 황사영(黃嗣永․알렉산델)과 친분을 맺으면서 그로부터 천주교를 배우게 되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마르띠노는 곧 교리의 본분을 그대로 실천하여, 그 때까지 모셔 놓고 있던 조상들의 신주(神主)를 단지에 넣어 강물에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자식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서 전교 활동을 하고 있던 주문모 신부에게서 영세하였다. 그후 그는 요셉이라는 본명을 가진 맏아들을 신부 옆에 남겨 두고 둘째 아들은 당시 유명한 교우의 집과 혼인하도록 하였다.


  한편, 자기 자신은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 고을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외교인이었던 친척들은 이러한 그의 괴상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비난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그 이유를 솔직히 말하면서 그들에게 천주교를 이해시키려고 하였지만 세속에만 젖어 있는 친척들이 그의 진실된 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공주에서 몇 해를 생활하던 중 신유 교난이 일어나고, 이어 그 박해는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공주의 관청에서는 곧 마르띠노를 박해 대상자로 지목하고 포졸들을 보내어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관아에 당도한 그는 자신이 천주교인임을 명백히 밝힌 다음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관리들에게 고백였다.


  마르띠노는 청주로 이송되어 그 곳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여 마침내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심은 언제나 한결 같았고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를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향의 진영(鎭營)이 있는 해미로 다시 이송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그는 걸을 수가 없었으므로 역첨(驛沾)에서 역첨으로 말을 타고 가야만 하였다.


  해미의 영장(營將)은 마르띠노를 여러 차례 심문하고 또 형벌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한 순간도 변하지 않자 크게 화가 나서 때려 죽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은 곧 이행되어 마지막 식사가 그에게 주어졌으며, 20여 명의 포졸들이 그를 붙들어 매고 형의 집행을 시작하였다.


  매질을 당하는 동안 그는 ꡒ그렇구말구,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나의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ꡓ라고 되뇌이면서 환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포졸 한 명이 큰 돌로 그의 가슴을 내리쳐 숨을 거두게 하니, 이 때가 1799년 12월 15일(음력)이었으며, 이때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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