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승(베드로 )

 

  이국승(李國昇) 베드로는 「성겸」이라고도 하는데, 충청도 음성 고을 출신으로 후에 충주 고을로 이사하였었다.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철저히 배우기 위하여 양근 권씨 형제들에게 가서, 은총으로 마음이 움직여 즉시 교회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 그의 외교인 선생이 있는 구변을 다 써서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으며, 이국승 베드로는 그의 모든 궤변을 쉽게 반박하였다. 처음 1795년에 잡혔을 때는 배교의 말을 하여 석방되었으나, 나중에 진심으로 그것을 뉘우치고 오랫동안 보속을 하였다. 그의 부모가 결혼을 시키려 하였으나 아내와 아들을 갖는다는 것이 천주교 본분응ㄹ 지키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끈질기게 거절하고, 끊임없는 재촉을 피하기 위하여 급기야 서울에 가서 살았다. 착한 일을 하는 데만 지극 정성일 뿐, 집안일에는 도무지 걱정이  없었으므로, 그는 남을 가르치는 데 쉽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애덕의 일에 온전히 자기를 바쳤고, 그의 말은 교우와 외교인 가운데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었다.


  대박해 때에 체포되자, 그는 옥에 들어가는 때부터, 방금 배교를 한 고광성(高光晟)에게 뉘우치라고 권고함으로써 자기의 열성을 발휘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성공을 거두어 고광성에게 순교의 영광을 얻게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자신도 형벌의 시련을 받아 배교한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관원이 고문을 중지시키고 석방하려고 할 때에 갑자기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풀려나면 곧 전과 꼭 마찬가지로 다시 나의 종교를 신봉하겠다고 외쳤다. 배교를 했다가 곧 이어 취소를 하는 이같은 장면이 여러번 되풀이된 모양이다. 이처럼 이국승 베드로는 자기 기질의 모든 장점과 더불어 모든 결점도 함께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성질이 급하고 열렬하며 열성이 가득한가 하면, 때로는 변하기 쉬고 끈기가 없어 여러 경우에 유감스러운 경솔을 보여 주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시어 당신 종의 일체의 교만과, 자신에 대한 일체의 과신을 완전히 없애 주시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잘못을 저지르게 허락하신 뒤에, 꾸준히 신앙을 굳세게 증거하고 사형선고를 얻어내는 데 필요한 힘을 그에게 주셨다. 그는 참수당하기 위하여 공주로 하송되었다.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그를 따라 오는 구경꾼들에게 여러 번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ꡒ당신들은 나를 동정하는 것 같은데, 참으로 불쌍한 것은 당신들이오.ꡓ이국승(李國昇) 베드로는 5월 26일이나 27일에 참수당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30세였으며 그의 시체는 조카들에 의해 공주에 매장하였다.


  끝으로, 5월 23일 선고를 받은 이들 중에 고광성(高光晟)과 이국승(李國昇), 그리고 아마도 황(黃)포수가 들어 있으니, 이제는 이들에 대하여 몇 마디 해야 하겠다. 고광성은 황해도 평산 고을의 양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떤 경위로 입교하였는지 알 수 없고 그의 신문 내용도 알 수 없다. 서울 옥에 갇히어 불행히도 배교를 하였었는데, 그 때 하느님께서는 이국승이 같은 옥으로 끌려오게 허락하셨다. 이국승은 그의 잘못을 심히 나무라고 취소할 것을 권하여, 순교하는 일을 돕기 위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를 알려주었다. ꡒ배교한 것은 자네가 아니고, 마귀가 자네를 속여 자네 입을 빌어 말한 것이라고 관장에게 아뢰게.ꡓ이런 권고를 받은 고광성은 취소를 하고 나서 세 번이나 새로 신문을 당하였는데, 그후로는 아무런 나약의 표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자기 고향인 평산으로 이송되어 참수를 당하였는데, 사형에 쓰는 일반적인 연장이 아니라 도끼로 참수되었다. 그의 죽음은 서울에서 평산까지의 거리로 보아 동월 27일이나 28일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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