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뫼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고 붙여진 솔뫼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지이며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을 따라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사셨던 곳입니다.


  솔뫼가 위치한 내포지방(아산,예산, 면천, 당진, 해미,서산, 덕산,태안)은 한국 천주교회의 태동지인 천진암에서 권철신,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이곳에 전교한 이존창 루도비꼬에 의해 천주교 사상의 수용이 어느 지역보다 빨랐던 곳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울술라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 신부님의 집안이 처음 천주교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788년 김 신부님 할머니의 삼촌되는 이존창에 의해서이며 이때 이존창의 활동으로 내포지방에 그리스도의 신앙이 뿌려지고 가꾸어져 많은 교인이 생겨났습니다. 솔뫼의 훌륭한 양반집에서 태어나서 이 지방에서 벼슬을 지내던 신부님의 증조부께서 복음을 전해 받고는 곧 벼슬을 버리고 신덕을 쌓는데 전념했습니다. 김진후는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벌어진 박해인 신해년 진산 사건으로 인해 천주교의 대한 탄압이 충청도에 미치자 붙잡혀 홍주(지금의 홍성), 전주, 공주 등지의 옥문을 드나들었다. 신유박해(1801년)때는 귀양을 가고 죽음만은 면하는 것 같았으나 귀양에서 풀린지 얼마 안되어(11805년) 다시 해미 감옥에 갇히게 되어 1814년 10월에 76세의 나이로 옥사하셨습니다.


  증조부의 순교가 있은 2년 뒤 종조부 김한현 안드레아는 안동 땅으로 박해를 피해 가서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1815년 을해박해 때 대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셨고 김대건 신부님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는 1939년 기해박해 때 국법을 어기고 그의 아들을 해외로 내 보낸 사학도로 몰려 서소문 밖에서 44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하셨습니다. 이 박해 때 김대건 신부님의 왕고모인 김 데레사(김한현의 딸)도 순교하셨으며 이처럼 김대건 신부님의 가문은 증조부와 종조부, 부친 김제준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함으로써 4대가 순교하는 비극과 영광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이미 증조부와 작은 할아버지께서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어느 때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조부인 김택현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솔뫼에서 가솔들을 데리고 골배마실(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피신 하셨는데 이때 김대건 신부님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신앙심과 총명함으로 주목을 받았던 김대건 신부님은 선교사로 오신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모방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충남 청양 다락골 출신 최양업 토마(성 최경환 프란치스꼬의 아들)와 충남 홍성 출신 최방제 방지거(최한지의 아들)와 함께 신학공부를 위해 1836년 12월 마카오로 떠났습니다.  1837년 6월부터 1842년 3월까지 유학 6년만에 신학공부를 마치신 김대건 신부님은 서품 받기 전 잠시 귀국의 길에 오릅니다. 수학 도중 함께 했던 최 방지거는 병사하고 김대건 신부님은 부제서품을 받고 조선 입국을 시도 경비가 삼엄한 국경선을 넘느라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고국을 떠난지 8년만인 1845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미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셨고 어머니는 일구월심으로 아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본인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일시 귀국이라 할 일이 너무 많고 어머니를 만나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러했습니다


   귀국 후 3개월 동안 선교사를 모셔 오기 위해 순교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조선 지도를 작성하며 치밀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1845년 4월 30일 만주에서 입국의 손길을 기다리는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모셔 오기 위해 1백 50냥의 돈으로 한 척의 배를 사가지고 현석문 등 11명의 신자와 함께 그 배를 타고 한 개의 작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중국 상해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11명의 신자 중에는 1명의 목수와 4명의 어부와 배를 타 보지도 못한 6명의 농부가 있었으니 이들은 김대건 신부님을 익숙한 뱃사람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배를 띄운 첫째 날에는 순풍에 돛을 달고 잔잔한 파도 위를 달렸으나 다음날부터는 폭풍우를 만나 3일 동안을 밤낮 할 것 없이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배가 뒤집힐 듯 몹시 흔들렸으므로 할 수 없이 김대건 신부님은 끌고 가던 뗏목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은 두개의 돛대를 베어 버리고 무거운 짐들도 물에 던져 버리게 하였습니다. 뱃사공들은 배멀미에 시달려 넓고 젋은 바다 위에서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배멀미에 몹시 시달렸으나 힘써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보이고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내보이면서 “겁내지 마시오. 성모 마리아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하며 모든 사람을 격려하여 주었습니다. 배는 여전히 사나운 파도 때문에 이리 저리 들까불리다 가장 중요한 키조차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돛을 둘둘 말아서 바다에 던져 키 대신으로 쓰게 하였으나 이것조차 얼마 안가서 끊어졌습니다. 이에 다시 멍석 을 나무토막에 싸매어 키로 써 보았으나 이것마저 파도가 삼켜 버렸습니다.


모두들 기진맥진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과 성모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하느님의 도움을 빌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다행히 바람이 자고 비도 멈추어서 모두 이제는 살아났다고 하며 나무 조각을 주워 모아 급한 대로 키와 돛대로 쓰게 하고 바람을 거슬러 항해를 계속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성모님의 보호 아래 김대건 신부님의 대담함과 침착함으로써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조국 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페레올 주교님의 집전하에 서품식을 받은 날이 1845년 8월 17일,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모시고 다시 뱃길로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도 폭풍을 만나 제주도 가까이까지 표류하였다가 마침내 강경 나바위에 상륙하여 무사히 서울로 잠입하였습니다. (1845.10.12) 김대건 신부님은 페레올 주교님이나 다를뷔 신부님보다 월등한 위치에서 전교 활동을 펼 수 있었는데 언어나 활동의 제약이 덜했기에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사목활동을 하셨습니다.


   세 분의 성직자가 활동하고 계셨지만 만주에서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와 동료인 최양업 토마의 입국을 위해서 주교님의 편지와 연락문, 해로로 입국할 때 사용할 지도를 가지고 백령도 해역 순위도에 고기잡이 나온 중국 어선에게 전달하고 오시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선 체포되어 해주 감옥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엄중한 문초와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취조 과정에서 일찍이 천주 성교를 위하여 해외 유학으로 6년간의 마카오 유학 생활, 4년의 중국 만주 대륙에서의 활동을 통해 얻어진 학식과 견문은 조정의 박해자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선 사학죄인이란 죄목으로 군문효수형의 선고를 받고도 담담하셨고 태도가 의연하였으며, 옥중에서 당신을 교육하고 꾸준히 돌보아 준 마카오 장상 신부님들에게 조선교회의 장래를 부탁하는 서한을 남겼고, 페레올 교구장님에게 조선교회의 모든 일을 당부 드렸으며, 어둡고 더러운 옥중에서 형벌로 상처난 아픔을 참아 가며 그가 돌보던 조선 교우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회유문을 남기셨습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26세의 젊은 사제로 군문효수형에 처하여 순교하셨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하였으나 김대건 신부님은 당시 목자의 보살핌에 굶주린 교우들에게 모국인 사제에게서 성사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그들의 영성지도자로서 자리 매김이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골배마실에서 전교활동을 할 때 사제직을 꿈꾸던 이민식(원선시오)은 김대건 신부님의 치명 소식을 듣고 시신을 거두기로 마음먹고 새남터로 달려갔으나 14일간이나 모래밭에 가매장된 시신은 국사범인 관계로 군졸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이민식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시신을 옮기게 됐습니다. 수의에 곱게 싼 머리는 가슴에 안고 동체는 걸방하여 짊어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끊임없이 묵주신공을 바치며 밤을 틈타 시신을 옮기던 이민식은 용인 땅에 들어서서야 한숨을 돌렸다합니다. 은이마을(골배마실)에서 미리내까지는 신덕, 망덕, 애덕이라 불리우는 험한 고개 셋이 있는데 마지막 애덕고개에서 날이새는 바람에 시신을 콩밭에 숨겨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해가 중천에 뜨자 농부들이 가을걷이를 하느라 콩밭으로 오는게 보였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는 마음 졸이며 천주님과 성모님께 제발 무사하길 빌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농부들이 돌아가 시신을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으며 10월 26일에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미리내에 있는 그의 선산에 모실 수가 있었습니다.


  부모 슬하에서 15년, 해외생활 10년 ,사제생활 1년 1개월(옥중생활 4개월 포함)만에 영광의 순교를 하신 신부님께선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하여 시복되시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2세에 의하여 성인품에 오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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