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상 파괴논쟁(19-23)
1)성화상숭경에 대한 교회입장
성화상 파괴의 이론적 근거는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 숭배에서 구하고 신의 불가시의 영적 본성을 살리기 위하여 어떠한 형태의 모상을 만들어 공경하는 것을 금지하신 가르침에 기원하였다.(출애20,4;레위26,1;신명4,16)
그러나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이 가시적 인간의 모습을 갖춘 이후로 모상 금지는 더이상 구약 시대의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초대 교회는 오랫동안 모상 사용을 경고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초상보다는 상징을 택하였다. 5세기에 이르러 성화상은 특히 동로마 제국의 동방 교회에서 많이 등장하여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신심의 대상이 되었고 6-7세기에는 성화상 공경이 개인 신심이나 대중 신심에 있어 핵심 요소를 이루고 있었고 신심의 외적 표현이 성화상에 대한 입맞춤,무릎꿇음,분향,엎드림 따위로 나타났다.
이러한 성화상 공경의 발생동기는 지상,연옥,천국에 있는 교회 구성원 사이의 영적 교류인 성인통공의 교리에 근거하였다.따라서 신자들은 성화상이 인간사를 좌우하고 질병에 대한 효과 있는 구제약이며 영적 및 세속적 축복을 내리고 하느님 은총의 유력한 통로라고 믿었다.
그러나 성화상 신심이 성공적 발전을 보게 된 이유에는 일반 대중이 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전설이나 기적들을 쉽게 믿고 공경한 데에 있다.
그러나 한편 성화상 공경을 배격하는 견해도 강하였다. 특히 이단 바울루스파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분에서 성화상에 대해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또한 칼체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된 단성론의 영향이 강하였는데 이는 예쑤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주장하고 그분의 완전하고 참된 인성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성화상 공경을 배척하고 있었다. 그외에 비잔틴 교회 안에서도 성화상 공경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이 모상과 그것이 뜻하는 대상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신심 행위가 오히려 우상 숭배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더우기 육화한 그리스도의 모상은 신성과 인성을 내포해야 하는데 신성은 나타날 수 없었고 인간의 모습만이 표현됨으로써 성화상 공경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이단인 네스토리우스 사상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는 논증에 대해 제 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629)는 성화상의 침묵의 설교.하느님 신비를 담은 기록,문맹자들을 위한 교리서 일뿐만 아니라 성화한 물질의 표상은 그리스도의 육화에의해 가능하게 되었다고 신학적 설명을 달았다.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학과 성화상의 의미를 연결시켰고 하느님과 성인에 대한 공경을 정립,구분하였는데 흠숭은 하느님,상경은 성모님,공경은 성인에게 드리는 것이었다. 또한 성화상 공경의 대상은 성화상 자체가 아니라 성화상이 표현하는 주제를 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제국에서는 성화상 문제가 수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성화상 파괴 운동으로 발전하여 동방 교회를 격심한 대립 세력으로 양분하였고 교회 박해.폭력사태.정치-사회 혼란을 야기하였다.
성화상 파괴 논쟁의 발단에 대해서 두가지 견해가 있다.
1.성화상 파괴 운동을 일으킨 사람이 동로마 제국 호아제 레오3세라고 주장-이 견해에 따르면 황제는 이슬람과 유다교 및 바울루스파의 영향을 받아 이미 성화상에 대해 적의를 지니고 있었다 -이 견해는 역사적 증거가 없고 추측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
2.성화상 공경 반대가 교회 지도자,특히 소아시아의 주교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이 주교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제르마누스에게 성화상 공경 반대 조처를 내리도록 요청하였으나 총대주교에게 거절을 당하여 황제에게 찾아가 동의를 얻어냈다.주교들은 교구로 돌아가 성당에서 성화상을 제거하고 성화상 공경을 금지하였다.
726년에 황제는 칙서를 반포하여 국민들에게 성화상 공경을 포기하도록 권고하였고 황궁문에 있는 그리스도 초상을 제거하도록 조처하였다.이 조치는 국민의 폭동을 야기하였고 성화상을 제거하던 군인들은 살해당하였다.
730년에 황제는 제르마누스 총대주교에게 그의 성화상 문제에 대한 정책을 지지하도록 설득하였으나 실패하고 성화상 공경을 금지하는 칙서를 공포하여 성당의 성화상 철거를 명령하였고 성인들의 유해는 파괴 또는 소각되었다.
콘스탄티누스5세의 시대에 이르러 성화상 파괴 운동은 극에 달하였다.황제는 75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338명의 참석 주교들의 만장 일치로 성화상 공경을 우상 숭배로 금지하였고 성화상 공경을 주창하던 교회 지도자들,특히 수도자들을 처형하였다. 따라서 성화상 파괴 운동은 반수도원 운동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레오4세가 황제에 오른뒤에 성화상 공경 지지자였던 아내 이레나의 영향으로 온건 정책을 시행하며 수도자 박해를 중지하였다. 레오 4세의 서거 후에 이레나가 섭정하면서 786년에 성화상 신심을 회복시켰고 787년에는 제2차 니체아공의회를 개최하여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로 단죄한 754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회의의 결정을 무효화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