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가톨릭 교회(1)
20세기의 교황
비오 10세(1903-1914) : 비오 10세는 경건한 신앙인으로서 16세기 이후 처음 ꡐ성인 교황ꡑ이 되었다. 그는 1858년에 사제가 된 후에 본당 신부, 신학교 영신지도 신부, 교구청의 상서국장 등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그는 ꡐ사목 교황ꡑ으로서 언제나 온정과 유모어로써 그와 만나는 이들에게 친근감을 갖게 하였다.
비오 10세는 ꡐ개혁 교황ꡑ으로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단으로 실현되지 못한 개혁들을 실천에 옮겼다. 그의 교회 개혁은 항상 사목적 관점에서 수행되었는데, 그레고리안 성가를 포함한 교회 음악을 개혁하고(1904), 신자들에게 미사에 자주 참여하여 영성체할 것과 어린이의 영성체를 장려하였다(1905). 또한 성직자의 기도서인 성무일도를 개정하고(1911) 교황청을 개혁, 행정 기구를 근대화시켰다. 비오 10세의 업적 중에서 현대 교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1904년에 교회법 개정을 착수한 것이다(이는 1917년에 교황 베네딕또 15세가 공포하였음).
그러나 비오 10세는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엄격한 군주주의자로서, 교회를 사회 및 그 사조와 융합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교황이 당시에 세계를 휩쓸던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교회는 공화제적 사조와 접촉할 기회를 상실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들과 충돌을 일으켰으며, 여러 국가와의 정교협약이 파기되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 제3공화국은 주교 추천권 논쟁에서 교황청과 종교협약을 파기하고(1904), ꡐ정교 분리법ꡑ을 제정하여(1905) 교회의 재산을 국유화하였다.
반(反)교회적 정부가 교회에 국가 보조금을 지불하는 정책을 시행하고자 시도하였을 때, 비오 10세는 두 차례에 걸친 회칙(1906)을 통해 프랑스 공화 정부의 시책을 단죄하면서, 프랑스의 주교들에게 교회가 재산을 압수당하여 빈곤할지라도 그 내적 부유함, 전통, 영성, 그리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신심에 의존하도록 명령하였다. 물론 이러한 교황의 반교회적 국가에 대한 비타협적 정책은 프랑스 교회에 물질적 손해를 초래하였고 공화제를 바라던 프랑스 국민과 거리를 멀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오 10세의 주장이 현명하였다는 사실이 훗날 프랑스 교회에서 밝혀졌다. 이 교회는 비록 빈곤하였지만 쇄신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근대주의 : 프랑스, 독일, 이딸리아, 미국에서는 가톨릭 성직자와 신학자 그리고 학자들이 교회의 전통적 신앙과 제도를 새로 등장하여 발전하는 철학, 역사학 등의 학문과 사회자조에 입각하여 개혁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19세기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세속 문화와 타협하여 종교 학문(성서주해, 교회사, 교의 신학, 윤리 신학)에 새로운 학문적 방법을 적용, 결론을 내리려는 일부 저명한 성서학자, 교회사가, 철학자들의 움직임을 ꡐ근대주의ꡑ라고 한다.
근대주의는 각 국가에 따라서 그 관심사와 내용이 여러가지 형태로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첫째, 근대주의자들은 역사적 방법과 비판적 자세를 중요시하여 그들의 연구에 적용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연구 방법과 자세가 신학을 활성화할 수 있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의 쇄신에 공헌할 수 있다고 믿었다. 둘째, 근대주의자들은 스콜라 철학과 신학, 그리고 토마스 사상에 반대하는 학문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세째, 권위주의 특히 교황과 교황청 중심의 권위주의에 크게 반발하면서 그들이 연구하는 학문의 자유와 독립성만을 강력하게 주창하였다. 네째, 당시에 지배적 철학 사조에 지나친 영향을 받고 아직 완전하게 검토되지도 않은 연구 결론을 너무 조급하게 확신하였다.
다섯째, 전통적 신앙 형태에 대해서 다른 가톨릭 학자들이 지녔던 보수주의의 참된 모습을 충분히 평가하지 않았다.
반면에 근대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은 매우 대조적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중세의 지배적 사조인 스콜라 학파로서 연구의 역사 및 비판 방법을 무시하고 새로운 학문의 결론을 신용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는 파괴적이며 회의론적 합리주의가 들어있다고 속단하였다.
이 중세주의자들은 근대주의자들이 중요시하는 인간의 진리 추구에 대한 이념을 다만 교만하고 어리석은 자세라고 단언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유일한 구원은 교회에 대한 절대적 순종에 달렸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반(反)근대주의자들은 몇 가지 부정적 자세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연구 방법에 있어서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엄격한 스콜라 사상의 형식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그들은 교회의 권위를 남용하여 그들의 주장을 고집 정당화하였고 새로운 철학에 대해 올바른 지식과 역사적 감각을 전혀 갖추지 못하였다.
비오 10세는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견해에 관용적 입장을 취하고 있던 전임 교황 레오 13세와는 달리 새로운 사조에 대해서 1907년 회칙과 교령을 통해 단죄하였다. 두 교회 문헌에서 단죄한 근대주의자들의 오류들은 ꡐ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 부정,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과 교회 창립에 대한 부인,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거부, 가톨릭 교회 신조의 상대화, 교회 성사에 대한 개신교적 해석ꡑ등이었다.
비오 10세는 근대주의를 탐색하여 박멸하기 위해서 각 교구에 ꡐ자경단ꡑ을 설치하고 교회 서적 검열관을 배치하였다. 신학생들은 토마스의 스콜라 철학과 신학만을 중점적으로 교육받았고 1010년에는 반근대주의 선서가 규정되어 모든 성직자들은 이 선서를 해야 했다(이는 1967년에 폐지됨). 그러나 불행하게도 근대주의자의 색출에 있어서 결백한 신학자들이 희생되는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베네딕또 15세 : 베네딕또 15세는 평화의 교황으로 후세에 알려지고 있다. 교황은 재위의 첫 순간부터 평화와 화해를 확고부동하게 추구 수행하였다. 베네딕또 15세는 반근대주의자들의 광신적 행동으로 인하여 분열된 교회에서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첫 회칙을 반포하였다.교황은 여기서 근대주의자에 대한 색출 운동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일어났을 때에 전쟁 당사국의 통치자들에게 평화 통첩을 보내 적대적 감정의 불식, 무장해제, 조정위원회의 설립 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상(理想)은 1년 후 미국 대통령 윌슨(1913-1921)이 발표한 ꡐ평화 14개조ꡑ의 내용과 가까왔다.
베네딕또 15세가 평화 중재인으로서 한 다른 역할은 교회와 국가의 외교 관계를 수립 또는 재개하는 것으로 전쟁 후에 교황청과의 수교국이 25개국이 되었다. 그리고 교황령의 붕괴(1870) 이후로 이딸리아인을 분열시킨 로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딸리아 정부와 접촉하여 대화를 시작하였다. 개인적으로는 교황청의 재정을 바닥내어 그의 서거 후에 차기 교황 선거를 치를 비용이 부족할 정도로 자선사업에 열중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