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가톨릭 교회(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3)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 :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 제2회기를 준비하는 도중인 1963년 6월 4일에 서거하였다. 따라서 공의회는 교황의 사망과 함께 중단되었고 새로운 위기에 처하였다. 많은 이들은 새 교황이 공의회를 계속할 것인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곧 공의회가 속개될 전망이 밝아졌다. 그것은 요한 23세의 혁명 노선을 따르던 밀라노의 대주교 지오반니 바띠스따 몬띠니가 교황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새 교황 바오로 6세는 선출된 다음 날인 1963년 6월 22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자신의 첫 과업은 공의회의 성공이며 교회 일치와 교회법 개정 등 전임 교황의 계획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중단되었던 공의회 조정위원회가 다시 열렸고 각 분과위원회도 제2회기를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다음 공의회를 9월 29일에 소집한다고 발표하였고 공의회는 다시 쇄신을 통한 새로운 교회상을 정립한다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897년 9월 26일 북부 이딸리아의 콘세치오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정치가이며 언론인으로 국회의원을 3번이나 지내면서 반(反)성직자주의들과 사회주의자들에 대항하여 교회를 옹호하였으며, 지방 신문인 브레스치아 일보의 편집 국장을 지냈다. 이러한 언론 가정 출신인 교황은 제2회기 때부터 언론기관을 위한 조직을 공의회 안에 조직하였다.
몬띠니는 건강이 좋지 못하여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기숙사)에 들어갔다가 곧 집으로 돌아와 교육을 받았다. 신부가 되기 위해서 브레스치아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20년에 신부로 서품되었다. 그후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획득하기도 한 몬띠니 신부는 잠시 본당신부로 사목 활동을 하다가 1922년에 외교관의 수업을 받았다. 1년 후에 그는 폴른드 바르샤바 주재 교황청 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1923-1924) 로마 교황청 국무성성에서 30년간(1924-1954) 역대 교황들(비오 11세와 비오 12세)을 보필하였다.
1944년에 국무성 장관이 사망하자, 비오 12세는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고 47세의 몬띠니 몬시뇰을 교회내정을 담당하는 국무성 장관 서리로 임명하였다. 그는 교황의 오른팔로서 교회 행정에 대한 많은 경험을 쌓았다. 1953년에 비오 12세가 몬띠니를 추기경으로 선임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그러나 1954년에 몬띠니는 이딸리아에서 가장 큰 교구인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몬띠니 대주교는 교구장으로 밀라노 지역을 순회하면서 사목 활동을 완수하였다. 그는 운동경기나 축제에 참석하면서 대중과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특히 밀라노는 공업지대였기 때문에 몬띠니는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가난한 근로자들을 방문, 위로하고 공장에서 미사도 봉헌하였다. 대주교의 이러한 자세는 근로자들을 교회로 이끌었으며, 밀라노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점차로 감소시킬 수 있었다.
1958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몬띠니 대주교를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이것이 교황이 몬띠니를 그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원의의 암시였다. 1963년 요한 23세의 서거 후에 치른 교황 선거에서 이틀 만에 몬띠니는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공의회의 속개 : 교황 바오로 6세는 공의회의 목적, 즉 교회의 쇄신과 그리스도교의 일치, 현대 세계와의 대화를 강조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제2회기(1963년 9월 29일~12월 4일)을 개최하였다. 이 회기 중에 토의된 의제는 교회일치 문제, 종교자유 문제, 현대의 매스 메디아 문제등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쟁점은 교회에 대한 교리였다. 그 중에서도 교황의 수위권과 주교단의 관계는 공의회를 위기로까지 몰고 갔다. 즉 주교단은 교황의 교회에 대한 최고의 권한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초대교회의 전통에 근거하지만 교황이 절대권을 주장하는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의 눈에는 이단으로 보인 것이다.
신학위원회의 많은 위원들은 이러한 주교단의 권한에 대한 사상을 교황의 수위권을 침해하는 위험한 생각으로 간주하여 맹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조정위원회는 이 의제를 직접 총회에 제출하여 주교들의 동의를 얻고자 하였다. 결국 교황 바오로 6세의 개입으로 ꡐ주교단의 교황 수위권에의 참여ꡑ라는 교리는 교부들의 찬동을 받았고 공의회는 더욱 진보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제2회기가 끝나면서 ꡐ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ꡑ과 ꡐ매스 메디아에 관한 교령ꡑ이 선포되었다.
바오로 6세는 공의회 휴회기간 동안에 교회일치를 위한 3일간의 여행을 떠났다. 1964년 1월 4일, 성지순례에 나선 그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 동방 정교회의 총대주교인 아테나고라스와 두 차례에 걸친 회담(1월 5일, 1월 6일)을 가졌다. 그리고 1964년 5월 17일에 비(非)그리스도교 사무국이 설치되었다.
제3회기(1964년 9월 14일~11월 21일)는 교황이 24명의 주교들과 미사를 공동 집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 합동 미사는 주교단의 권한을 전례를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었다. 제3회기의 특성은 평신도 대표가 청취자로서 공의회에 참석한 사실이다. 이 회기의 중대한 의제는 계시 문제였다. 제출된 문헌은 수정된 것으로 진보적 경향을 띤 교리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토의된 의제는 ꡐ종교의 자유ꡑ였다. 3회기 마지막에 이르러 교황은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교회에 관한 헌장과 교회일치에 관한 교령을 약간 수정하여 동방 교회에 관한 교령과 함께 선포하였다. 아울러 공의회 중에 격하될 위험에 처해 있던 동정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선언하였다.
제4회기는 마지막 회기로 1965년 9월 14일부터 12월 8일까지 열렸다. 이 회기의 주요 의제는 종교의 자유였다. 이 안건은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이 타협하여 통과시켰다. 제4회기에는 교부들이 안건들을 마무리짓느라고 매우 분주하였다. 그들은 주교들의 교회사목직, 사제의 직무와 생활(성직자의 독신 생활), 수도회의 쇄신, 신학교 교육, 그리스도교 교육, 선교, 평신도 사도직, 비그리스도 종교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계시와 교회에 관한 두 문헌은 열띤 토론 끝에 통과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공의회를 끝낼 즈음에 공의회 이후에 교회의 문제들을 의논할 수있는 세계주교회의를 신설하였고, 특히 동방 정교회와 상호 파문(1054년에 두 교회가 내린 파문)을 취소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공의회의 결정이 성공적으로 실천될 수 있기 위해 특별성년(1966년 1월 1일~5월 29일)을 반포하였다. 역사적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4개의 헌장,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문을 공포하고 그 막을 내렸다. 이제 우리 가톨릭 신앙인은 공의회의 결정들을 한 가지씩 실천하는 단계에 들어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