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의 영세

 

이 승훈의 영세


  주어사․천진암에서 천주교 교리 연구를 하던 강학회 회원들 중에서 천주교에 대해 가장 깊은 관심을 갖고 계속 연구하던 이는 이벽이었다. 그는 10여일 동안의 강학회가 끝난 뒤에도 당시 한성 수표교에 위치한 집에서 비밀히 천주교 서적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몇 권의 교리서로는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체득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교리서에 나타난 종교 용어의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천주교의 기초적 교리 지식조차 부족함을 통감한 이벽은, 상세한 교리 지식을 얻기 위해서 북경으로부터 교리서를 구할 수 있는 길을 탐문하였다.


  1783년에 이르러 그는 여러 해 동안 갈망하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를 찾아냈다. 그것은 그의 친구 이승훈이 1783년 동지사행(동지사행)의 서장관(서장관)으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이승훈을 찾아가 천주교의 종교적 우수성과 교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서양 성직자들을 만나 천주교의 교리와 전례를 자세하게 알아보고 세례를 청하여 받은 다음에 교회 서적과 성물(성물)들을 얻어 오도록 부탁하였다.


  1783년 12월 하순, 북경에 도착한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대로 천주당(성당)을 방문하기로 하고 북당으로 갔다. 그가 네 천주당 중에서 북당을 방문한 것은 이벽의 부탁 외에 수학을 배우고 싶은 자신의 원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학자들이 많은 북당이 가장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북당에서 예수회원이었던 프랑스 태생의 쟝 조셉 드그라몽(중국명 : 양동재) 신부를 만났다. 이 신부는 당시에 북경 궁정에서 통역관과 수학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승훈은 드 그라몽 신부에게 교리를 충분히 배우고 난 다음에 열렬한 신앙인의 생활을 서약하였다. 그는 북당의 선교사들에게 천주교의 계명에 따라 생활할 것이며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이승훈은 1784년 1월, 북경을 떠나기 직전에 그의 부친의 동의를 얻고 드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선교사들과 헤어지면서 세속의 모든 부귀공명을 버리고 영성생활에 전념하며 매년 소식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