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假)교계제도의 자치 교회

 

가(假)교계제도의 자치 교회


  1785년 봄에 발생한 ‘을사사건’으로 교회를 잠시 떠났던 이승훈은 가을철에 다시 돌아와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형제 등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성직자의 교계 체제를 설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결정은 신생 조선 교회의 교리 지식에 대한 부족에서 비롯한 선의의 과오였다. 다시 말해서 초창기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은 신품성사와 사제직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만 을사년의 천주교 탄압 사건으로 동요를  받은 교회를 재정비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자들의 신앙 강화와 효과적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목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북경에 다녀온 이 승훈은 중국 교회에서 본 성직 계급의 조직과 미사 성제의 집전과 성사 집행 등의 예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그가 갖고 있던 전례서와 교리서를 참고하여 교계제도를 갖추는 조선 교회를 설립하였다.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이러한 초창기의 교회는 ‘가교계제도(假敎階制度)의 자치적 교회’로 서술되고 있다.


  이 승훈은 조선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영도자로 추대된 후에 성직자 선정 작업에 들어가 학식이나 덕망에 있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거나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 또는 열성적이고 경건한 신자들 중에서 10여 명을 신부로 임명하였다. 교회 문헌이나 조선의 관변측 사료에 의하여 10여 명의 신부 중에는 권일신(주교로 임명되었다는 기록도 있음), 최창현(요한), 유항검(아우구스띠노), 이존창(단원, 곤자가의 루도비꼬), 홍낙민(루가) 등이 들어 있었다. 1786년에 들어서면서 신부들은 고해성사를 집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고해성사에는 네 가지 모습이 발견된다. 첫째로 성사를 보는 방법에 있어서 신부들은 서로 상대방의 죄의 고백을 듣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둘째로 고백자의 죄에 대한 보속이 일반적으로 남에게 물질적 도움을 베푸는 선행이었다. 그러나 대죄를 범한 이는 조선의 관습을 적용, 신부에게 직접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셋째는 고해성사의 대상에 있어서 처음에는 유교 사회의 예법에 의하여 양반 부녀자들의 ㅗ죄고백 듣기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양심의 평화를 누리고 완전한 신앙생활을 갈망하는 부인들의 요청에 못 이겨 신부들은 그들에게도 고해성사를 베풀었다. 넷째로 신부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웃어른으로 대우를 받아 신자들이 신부의 집에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보았다. 서울의 경우, 최창현이 집 한 채를 세내어 신자들이 죄고백을 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였다.


  1786년 겨울철에 이르러 신부들은 견진성사를 집전하고 미사 성제를 봉헌하기로 결의하였다. 신부들은 당시의 조선인들이 제사드릴 때에 입는 옷을 본따서 중국 비단으로 제의를 만들어 입고 중국 교회에서 예절을 집전할 때에 쓰던 관을 쓰고서 금잔을 사용하여 미사 성제를 봉헌하였다.


  이러한 평신도의 성직자 임무 수행은 교회법상으로는 위법적인 행동이었으나 그 목적만은 훌륭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신자들의 신심 활성화에 대한 촉진제 역할을 한 것이다. 신자들은 열정적으로 전례에 참석하고 성사를 받으면서 오로지 구원에 전념하였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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