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적인 교회 봉사자, 황사영(알렉산델, 1775-1801)

 

헌신적인 교회 봉사자, 황 사영(알렉산델, 1775-1801)


14.1.2 소년 시절


  황 사영은 1775년에 경기도 광주 지방에서 남인 계통 양반 집안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릴때는 시복이라고 불리던 그는 교육에 대한 어머니의 깊은 관심으로 여섯 살 때부터 서당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매우 총명하였던 그에게 글선생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사방으로 아들의 스승을 찾던 그의 어머니는 이웃 동네 마재에 선비 가정의 정 약종(아우구스띠노)이 많은 소년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과거에 급제시켰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 사영의 어머니는 광주의 집을 팔고 마재로 이사하여 14세의 아들을 정 약종의 문하생으로 들여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우선 황 사영 소년은 어머니의 명을 받고 정 약종에게 가서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간청하였다. 그런데 당시 정 약종은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상 일과는 등지고 교리 연구와 신앙생활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주저하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소년이 다재다능하여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어 승낙하기에 이르렀다.


  황 사영은 매일 스승의 사랑에 와서 어머니의 가장 큰 소망인 출세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그의 아버지(한림정인)처럼 관직에 오르는 것이 자기 자신과 가문에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1789년 봄에 정 약종은 그의 제자가 과거를 볼 만한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여 몇 달 동안 집중적으로 과거 준비를 시켰다.   같은 해 가을철에 14세의 소년 황 사영은 소과 초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정 양곶의 큰형인 정 약현의 딸인 난주(또는 명연)와 정혼하였다. 이듬해 2월이 되자 황 사영은 복시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에 올라와 초시에 합격한 5백여 명이 성균관에서 치른 복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시를 치른 후에 진사가 되었다.


  이때에 국왕 정조는 15세의 소년 장원 진사의 비상한 재능을 발견하고 총애의 표시로 손목을 잡으면서 20세가 된 후에 조선 왕국의 인재로 등용할 것을 약속하였다. 당시에 임금을 직접 알현한다는 사실은 일반 백성에게 커다란 특전이었다. 이후로 황 사영은 국왕의 손이 닿은 자기 손을 아무도 만질 수 없다고 하면서 손목을 비단으로 감고 다녔다고 한다.




14.1.3 입교 및 교회 활동


  소년 황 진사는 고향에 돌아와 높은 벼슬에 오르기 위해서 대과(문과)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입신 출세를 위한 과거 공부를 중단하였다. 그것은 황 사영이 그의 스승이며 처삼촌인 정 약종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교리서를 받아 천주학을 연구하고 난 뒤에 천주교를 신봉하기로 결심한 때문이다.


  그는 자기에게 훤하게 트인 세속의 부귀 공명을 저버리고 영혼 구원의 길에 들어서서 열렬한 신앙인이 되었다. 1795년에 황 사영은 한양의 최 인길(마티아) 집에서 주 문모(야고보) 신부를 뵙고 영세하고 알렉산델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친척들은 그의 천주교 신봉을 비난하였고 그를 총애하였던 정조 임금도 천재 소년 진사의 입교 소식을 듣고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1798년에 황 사영은 한양에 올라와 애오개(아현)에서 살았다. 그는 이제 열렬한 신앙의 봉사자로 복음 전파와 교회 활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교우 집안의 소년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교리서와 신심서를 베껴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명도회의 회장으로서 자기 집에 신부를 모시고 교리 강습도 실시하고 신자들이 성사를 받도록 주선하였다. 또한 활동가로서 많은 이들을 입교시켰고 그의 집에서 기도 모임을 열었으며, 냉담자들을 방문하여 다시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였다. 초대 한국교회에 있어서 황 알렉산델은 가장 크게 활동한 주요 인물이었다.




14.1.4 순교


  1801년에 박해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그의 이름이 잘 알려져 황 사영은 1월 20일(음력)에 한 교우집에 피신하여 있다가 강 완숙(골롬바)의 주선으로 2월 8일(음력)에 계동에 있는 여 교우 집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나 2월 11일(음력) 정부 당국이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 후에 금부 도사가 동네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삼청동 산에 숨어 있다가 해자 저물자 다른 교우 집에 들러서 변장을 하고 한양을 떠나 피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으로 변장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천주교 교리에 어긋난다고 주저하였다. 생각 끝에 상복으로 변장하기로 정하고 수염을 뽑고 상복으로 갈아입고 제천 지방의 배론(지금의 충청북도 봉양면 구확리) 교우촌으로 가서 신자들이 마련해 준 토굴 속에서 지냈다.


  여기서 황 사영은 윤 유일의 순교 이후 조선 교회의 북경 일자가 되어 3차례 북경을 다녀온 황 심(토마스)과 의논하여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1799년 이후로 세 차례에 걸쳐 주 문모 신부의 편지를 북경 교회에 전달하던 조선 교회의 연락원 옥 천희(요한)와 함께 황 심이 동행하여 1801년 동지사 일행에 끼여 북경 주교를 방문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하였으나, 관가에 체포된 옥 천희의 실토로 9월 15일(음력)에 황 심이 붙잡혔고, 황 사영의 피신 장소도 알려졌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황 사영은 황 심에게 사정이 악화되면 자기를 밀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해 9월 29일(음력), 나졸들은 즉시 배론으로 달려와 수색하여 토굴을 발견하고 황 사영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황 사영은 포졸들이 오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양손을 결박하려고 달려들자 임금의 총애의 표시로 비단으로 감긴 손목을 만지지 말라고 요구, 이 요구는 수락되었다. 황 사영은 한양으로 압송되었는데 그의 옷 속에서 9월 22일(음력)에 쓴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가 나왔다. 이 편지가 유명한 「황 사영 백서」이다. 이 백서 사건으로 황 사영은 체포된 다른 교회 지도자들처럼 심문 중에 배교의 권유도 받지 않고 역적으로 판결받아 11월 5일(음력)에 참수된 후에 육시를 당하였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14.1.5 황 사영 백서


  황 심이 배론에 와서 주 문모 신부의 순교 사실을 황 사영에게 전하였을 때에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게 되었다. 이 백서는 가로 62㎝와 세로 38㎝의 흰색 명주 헝겊에 정자로 121줄에 걸쳐 13,311개의 깨알 같은 한자로 쓰여진 편지로 지금 로마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황 사영 백서」는 신유박해(1801) 때에 압수되어 100년 동안 의금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갑오경자’(1894) 후에 고문서 정리, 소각 중에 발견됨으로 뮈텔 민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뮈텔 주교는 백서를 복사한 후에 원본을 1925년 7월 5일에 조선 순교자 79위의 시복식을 기념으로 교황 비오 11세에게 바쳤다. 같은 해에 로마에서 개최된 포교 박람회에 전시되었다가 1926년에 전시품 전체가 라떼라노 박물관에 옮겨졌는데 이때 정리 작업을 하던 수녀가 자기 수녀원에 보관하였다. 1937년에 백서는 라떼라노 박물관에 비치되어 있다가 이 박물관이 문을 닫자 바티칸 박물관 중국 문헌 보관함(94021 E. AS 6840)에서 최근에 발견되었다.


  「황 사영 백서」의 내용은 두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첫째 부분은 신해박해(1791년)에서 신유대박해까지의 실정, 초기 교회의 순교자들의 행적, 주 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그리고 순교 경위 등의 내용이다. 둘째 부문은 조선 교회 재건을 위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한 내용이다.


  우선 황 사영은 조선 교회의 빈곤한 처지를 설명하면서 교회 재건을 위해서는 재정적 원조가 필요하다고 제시하였다. 그리고 조선 왕국에서 한 사람을 북경에 파견하여 젊은 중국 청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후일에 대비할 것을 부탁하였다. 또한 황 사영을 조선 교회와 북경 교회 사이의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서 조선인을 북경에 파견하거나 신중한 중국 교우를 국경 지방으로 이주시켜 점포를 차리도록 요청하였다.


  마지막으로 황 알렉산델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 정책적 차원에서 조선 왕국에 대처할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황 사영 백서」를 반(反) 국가적 음모 계획서로 낙인찍게 하였다. 첫째 방안은 교황이 청국의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 국왕에게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명령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둘째 방안은 청나라 황제에게 부탁하여 조선을 청국에 예속시키고 안주와 평양 사이에 안무사(按撫司)를 개설하여 그와 친한 중국 신자를 친황(親王)으로 임명하여 조선을 감독케 하거나 청국의 공주를 조선 국왕의 왕비로 삼아 조선을 청국의 부마국으로 만들어 황제의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조선 왕국에서 천주교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째 방안은 위헤서 제시한 방법이 실현될 수 없을 경우에 서양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군대와 무기를 실은 함대를 조선 왕국에 파견할 것을 요청하여 무력 시위를 통해서 조선 국왕으로부터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황 사영의 무력 개입을 통한 선교 전략은 당시에는 물론 오늘까지도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로서 천주교를 매국 종교로 규정하고 교회박해를 정당화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황 사영은 신유대박해의 참상을 목격하고 평화적 방법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없으며 서양 그리스도교 국가의 무력 개입이 무죄한 교회를 박해하는 정부 당국에 도전할 수 잇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정치와 종교를 혼동한 데에서 나오는 잘못이며, 유럽의 식민지 정책에 의한 선교 책략으로서 공상적이고 위험 천만한 발상이었다.


  이는 당시 조선 왕국의 사대주의적 경향의 정치 및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도 있겠다. 역사적 사건은 항상 그 시대의 사고 방식과 생활 양식에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이 「황 사영 백서」로 생길 곤란한 정치적 파문을 예방하기 위해 내용을 생략하고 ‘가백서’를 작성하여 청의 황제에게 보낸 것이 청국에 대한 사대주의라면 마찬가지로 「황 사영 백서」는 서양 그리스도교 제국에 대한 사대주의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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