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박해의 순교자, 임군집과 현석문

 

병오박해의 순교자


25.1.1 임 군집과 현 석문


  1846년의 병오박해 중에 체포된 천주교인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신자들이 김 대건 신부의 체포 소식을 듣고 기해대박해의 참상이 생각나서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 서적과 성물을 숨기거나 포졸들이 들이닥칠 때에 즉시 피신할 수 있는 준비를 하였고 또는 고향을 떠나 깊은 산촌으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이러한 대비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의하면 17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9명이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유배형을 받았고, 8명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치명하였다. 순교자들은 평신도 지도자로서 현 석문(까롤로), 남 경문(베드로), 한 이형(라우렌시오) 등의 회장들과 임 군집(요셉), 우 술림(수산나), 김 임이(데레사), 이 간난(아가다), 정 철염(까타리나) 등이다. 여기서 순교의 배경과 과정으로 보아 특기할 만한 치명자는 현 석문과 임 군집이다.




25.1.2 현 석문(1797-1846)


  중인 계급의 역관 출신 가정에서 1797년에 태어난 현 석문은 정 하상과 함께 조선교회를 주도하던 평신도 지도자였다. 그의 부친 현 계흠은 신유대박해 중에 황 사영과 함께 국가 반역죄로 기소되어 3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1797년에 경상도 동래지방의 용당포에 표류된 영국배를 구경하고 “이러한 배 중 한 척만 있으면 우리 나라 전선(戰船) 1백 척을 충분히 대적할 수 있겠다”라고 말한 사신이 황 사영 백서에 나타나 지명 수배되었다. 이는 그의 발언이 서양 배를 끌어들여 조선 왕실을 위협하여 선교의 자유를 얻고자 시도한 황 사영의 구상과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부친이 순교하였을 때에 현 석문의 가정에는 그의 어머니와 누나 현 경연(베네딕따, 1794-1839)이 남아 있었다. 가장을 잃은 가정은 가세가 기울어져 남매는 홀어머니 밑에서 물질적 궁핍을 당하였고, 박해 때문에 자주 집을 옮기다보니 현 경문은 어려서부터 형언하기 힘든 온갖 시련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현 석문은 어머니의 신앙 지도로 누나와 함께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와 묵상, 그리고 영적 독서 등을 빠짐없이 규칙적으로 실천하였다. 그 결과로 현 경연도 강 완숙(골롬바) 이래 새로 등장한 여회장으로서 교리강의, 냉담자 권유, 병자 방문과 간호 등의 교회 활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기해대박해 중에 서소문 밖에서 45세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온화하고 정직한 성격의 현 석문은 조선 교회의 발전에 많은 공적을 쌓았다. 1827년에 박해(정해박해)가 일어났을 때에 그는 회장으로서 순교자들의 가족들을 돌보아주었다. 또한 그는 정 하상과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31년에 조선 교구(대목구)가 설정되고 브뤼기애르 소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을 때에, 임 입국한 유 방제 신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경을 드나들며 주교의 영입에 적극 나서면서 경상도 지방에 숙소까지 마련하였다. 또한 1836년 12월에 김 대건 등 3명의 소년들이 사제가 되기 위해 귀국하는 유 방제 신부를 따라 출국할 때에 현 석문은 이들을 중국 국경 지방까지 환송하고 샤스땅 김 신부를 한양으로 안내하여 자기 집에 모셨다. 이후로 그는 샤스땅 신부의 복사로서 지방 교우들을 방문하면서 사목 활동을 수행할 때에 신부를 따라 다니며 성무를 도왔다.


  1839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자수하려는 현 석문을 선교사들이 만류하면서 그에게 교우들을 돌볼 사명을 주어 피신하도록 명하였다. 특히 현 석문은 앵베르 범 주교의 신앙을 받아 목자 없는 조선 교회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그래서 선교사들과 지도급 평신도들이 순교한 이후에 그는 숨어다니면서 신입 교우들을 격려하였고 돈을 모아 가난한 신자들을 도와주었으며, 교우들이 체포될 위험이 있을 때에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면서 위임받은 직책을 성실하게 완수하였다.


  무엇보다도 현석문이 앵베르 주교에게 받은 중요한 사명은 순교자들의 체포, 심문, 고문, 치명을 기록하는 임무였다. 앵베르 주교는 1839년 초에 박해가 일어나 순교자들의 행적을 5월까지 쓰고 서울의 지도급 교우들에게 자신이 순교한 이후에도 순교자에 대한 기록을 계속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동료 편술자들이 모두 순교한 후에는 현 석문이 다른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순교자들의 전기를 편찬하는 임무를 완수하였다. 이것이 「기해일기」이다. 아울러 그는 다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여 1845년에 김 대건 부제의 조선 입국을 도왔고 함께 중국 상해에 가서 페레올 고 주교와 다뷜리 안 신부를 한양에 안내하였다.


  1846년 6월에 김 대건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새집을 마련하여 교회 물품을 옮기었다. 그러나 며칠 후에 포졸들이 전에 살던 집에 들이닥쳐 이사짐을 옮겨주던 사람들을 찾아내어 현 석문은 우 술림, 김 임이, 이 간난, 정 철염 등 4명의 여교우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교우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신앙을 굳세게 지키도록 격려하였다. 현 석문은 1846년 9월 19일에 군문효수형의 사형 언도를 받고 새남터에서 4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25.1.3 임 군집(1804-1846)


  한강변의 마포에 있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임 군집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는 10여 년 동안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난 후에 궁술 등 무술을 익혔으며 음악과 시조 읊기를 좋아하고 예도(藝道)를 닦았다. 그는 사교적인 청년으로서 향락을 즐기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죄악의 행위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임 군집은 1830년경에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입교하여 그에게 세례받기를 재촉하였다. 그는 지난날의 향락 생활을 뉘우치고 착하게 생활하였지만 입교하기를 미루었다.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신뢰하고 사랑하여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교우들을 자기 집에 데려다가 먹여 살렸다. 그의 집에는 신자들이 항상 내왕하고 있어 이웃 외교인들은 임 군집을 천주교인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1835년에 그의 동네에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구속되자 그는 이들을 돕기 위하여 포졸이 되기를 자원하였다.


  1846년 6월에 그의 아들이 김 대건 신부와 함께 중국 선원과 접촉하기 위해 서해안에 나갔다가 체포되었을 때에 황해도 웅진 관가에 가서 아들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자수하여 구속되었다. 그러나 부자는 한양의 포도청으로 송치되면서도 서로 볼 수가 없었다. 포도청 감옥에서 처음으로 김 대건 신부를 대면한 임 군집은 마음이 움직여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였다. “신봉하겠읍니다. 저는 너무나 오래 기다렸읍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그는 감옥에 갇힌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혜이니 감사드리고 성실하게 보존하여 결실을 거두어 보답하라는 신부의 권유에 승복하였다.


  임 군집은 영세 준비로 며칠 동안 교리를 배우고 기도문을 외면서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김 신부에게 요셉이라는 영세명으로 옥중 세례를 받았다. 동료 포졸들이 그의 천주교 신교 결심을 보고 목숨을 구해주기 위하여 배교하도록 회유하였다. 그러나 임 요셉은 동료들의 유혹을 물리치면서 “나는 이미 나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위해서 죽기로 결심하였네. 나는 이미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네. 죽은 사람에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게”라고 말하였다. 포졸들은 다시 두 아들과 며느리들을 데리고 와서 배교하지 않으면 집안의 운명이 불행해진다고 위협하였다. 이번에도 임 군집은 육체적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영적 아버지인 하느님을 배반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여기서 포졸들의 동정은 분노로 바뀌어 임 요셉을 거꾸로 매달고 매질을 하였으나 그는 이미 죽기로 결심한 사람을 때리는 것은 피로만 도래하는 헛된 행위라면서 기쁜 마음으로 견디어냈다.


  3개월 동안의 옥중 생활 후에 임 군집은 포장 앞에 끌려나가 심문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는 문초 받으러 나가기 전에 사형 선고를 받으리라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옥중의 교우들에게 “오늘 공판에서 저에게 사형이 선고된다고 합니다. 저는 아무런 공로도 없는데 다만 하느님의 특은으로 먼저 천국으로 갑니다. 저는 곧 여러분을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하겠으니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라고 격려하였다. 포장은 임 군집에게 옥중에서 짧은 기간 안에 교리를 배워 영세하여 십계명도 제대로 외지 못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비웃었다. 이때에 그는 무식한 자녀도 효도할 수 있듯이 교리 지식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만 믿어도 넉넉하다고 대답하면서 배교 강요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임 군집이 혹독한 고문으로 아픔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관장은 한 마디의 신음 소리를 낸다면 그것이 바로 배교의 표시라고 엄포를 놓아 그는 소리를 내지 못하고 기절하였다. 그는 감옥에 들어와서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킨 사실에 기뻐하였다. 임 군집은 자기의 심한 상처는 염두에 두지 않고 동료 교우들의 상처를 치료하여 주었다. 그는 온갖 고문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여 9월 20일에 장살형(杖殺刑)을 받았으나 죽지 않아 옥에서 교수형으로 4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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