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양업 신부의 활동
26.1.1 가정 환경
최 양업(족보명 최 정구, 1821-1861)은 1821년 충청도 홍주 지방의 다래골(다락골 또는 누곡, 지금의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누동)에서 최 영환(프란치스꼬)과 이 성례(마리아)의 여섯 남매 중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나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다. 신유대박해(1801) 이후에 그의 부친은 좀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경기도 과천 지방의 수리산 교우촌에 정착하였다. 최 양업은 신앙심 깊은 부모들 밑에서 친척들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으면서 경건한 신앙인으로 성장하였다. 최 영환은 매일 집에서 정해진 시간에 자녀들을 모아놓고 영적 독서, 묵상과 기도의 생활을 하였으며 신앙을 증거한 집안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최 양업이 어릴 때부터 듣고 본받고자 했던 순교자로서 을해박해(1815) 중에 경상도 청송 지방에서 잡혀 대구 감영의 감옥에서 순교한 최 성열(바르바라)과 그의 사위인 최 봉한(프란치스꼬)이 있다. 최 바르바라는 함께 체포된 서 석봉(안드레아)이 옥사로 순교한 후에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증거하고 1816년에 40세의 나이로 치명하였다. 최 봉한은 입교한 후에 고향인 홍주 다래골을 떠나 공주 무성산에 살았다. 그는 주 문모 신부에게 성서와 성물을 받아 두었다가 신부의 순교 이후에 숨겨 보관하였고 경상도 청송 지방의 노래산으로 은신하여 유민들을 모아 교우촌을 이루어 회장이 되었다.
처음엔 독신생활을 결심한 최 봉한은 친지들의 권유로 최 바르바라의 딸과 결혼하였다. 최 프란치스꼬는 후에 자기의 계획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1815년 부활 대축일에 교우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고 있을 대에 전 지수(전 지순 또는 전 지손)라는 배교자의 안내로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잡혀 장인 장모 등 교우들과 함께 경주 진영에 압송되었다. 장모가 혹독한 형벌로 일시적으로 배교의 뜻을 드러내자 권유하여 신앙을 지키게 하였다. 체포될 때 그는 교우들에게 심문받을때 모든 것을 자기에게 책임 전가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최 프란치스꼬는 가장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대구 감영에 이송된 후에도 계속하여 무서운 형벌을 받아 기절까지 하였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문을 받아 생긴 상처 때문에 1815년 5월(음력)에 3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26.1.2 유학 및 귀국
순교자 집안의 최 양업은 모방 나 신부에게 간택되어 예비 신학생이 되엇다. 그는 최 방제(프란치스꼬)와 김 대건(안드레아)보다 먼저 1836년 2월 6일 성소 지방자로 뽑혔다. 그는 두 동료와 함께 중국어와 라틴어 교육을 받고 그해 12월 2일에 조선 교회의 장상에 대한 순명을 선서하고 일주일 후에 한양을 떠나 다음해인 1837년 6월 6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최 토마스는 경건한 신심과 뛰어난 재능, 변함없는 인내심과 규칙적인 행동으로 모범적인 신학생이었다.
1842년 4월에 최 양업 신학생은 아편전쟁(1841-1842) 중에 중국에서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얻고자 극동에 파견되는 프랑스 군함인 ‘파보리뜨호’를 타고 요동 교구로 떠나는 브뤼기애르 신부와 함께 마카오를 떠나 8월 23일에 양자강 어귀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그는 2개월 전에 에리곤호를 타고 도착한 김 대건 신학생을 만나 함께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에 입국하려고 계획하였으나 프랑스 함장이 마닐라로 돌아가게 되어 김 대건과 헤어져 브뤼기애르 신부를 따라 몽고 지방으로 떠났다.
최 양업은 팔가자에서 신학 공부를 하던 중, 1843년에 조선 국경을 넘어갔다가 되돌아온 김 대건을 통하여 조국의 기해대박해(1839)와 부모의 순교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에 대해 최 양업은 후에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신학교의 교장인 르그레조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심정을 토로하였다. “저는 매스뜨르 신부님과 안드레아 형제와 함께 있으면서 전능하신 천주님께 저의 동료들과 상봉하는 행복을 허락해 주실 날을 눈물과 비통 속에서 기다리고 있읍니다. 고국의 소식은 정말 슬픈 것입니다. 저는 저희 부모 형제들의 뒤를 따를 자격이 없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때에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용사로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였읍니다. 저는 우리 동포들, 특히 저의 친척들과 비교할 때에 너무나 무력하고 허약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언제 저도 부모님들의 고통과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할 수 있는 합당한 신자가 될 수 있겠읍니까?”
최 토마스는 팔가자에서 김 대건과 함께 신학 공부에 열중하면서 신앙이 두터운 23세의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1844년에 그는 사제서품을 받기에 필요한 신학 지식과 신심을 갖추고 있었으나 아직 접정 나이(24세)에 이르지 못하여 부제품만 받게 되었다. 1845년 1월에 김 대건 부제가 귀국한 후에 최 토마스 부제도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 입국의 기회를 엿보기 시작하였다. 1846년 1월에 그는 조선에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었던 페레올 주교의 주선으로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두만강 지역의 국경 도시인 훈춘(만주) 장터에서 조선의 안내 교우들을 만나기로 하였으나 개장이 되기 전에 만주 군인들에게 잡혀 옥고를 치르고 요동 지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요동 교구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소년들을 가르치면서 조선 잠입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1846년 12월에 최 양업 부제는 조선 교우들을 만나 입국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중국 국경(변문)에 나갔으나 병오박해로 국경선의 감시가 엄중할 것이라는 생각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페레올 주교가 택한 해로를 통한 잠입로밖에 없다고 보아 1847년 초에 홍콩으로 이전한 파리 외방 전교회의 경리부로 갔다.
이곳에서 최 부제는 라삐에르 함장의 군함이 다른 한 척과 함께 1846년 6월에 세실 제독이 전달한 문책서에 대한 답장을 받기 위해서 조선 왕국으로 출발하게 된 사실을 알고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승선하였다. 그러나 1847년 8월에 조선으로 향하던 군함이 좌초되어 프랑스 군인들은 전라도 고군산도(고군도)에 긴급 대피하였다. 이때 최 양업은 통역 일을 맡아보면서 신자들을 찾는 데에 노력한 결과 신자를 만나 교우 배를 타고 입국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구조선이 도착하여 8월 26일에 프랑스 군대와 함께 상해로 돌아갔다. 이때 최 부제는 약속한 교우 배가 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남아 있겠다고 하였으나 함장은 위험하다고 들어주지 않았다. 이후에도 최 양업은 두 차례(1848년, 1849년)에 걸쳐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849년 부활대축일에 최 토마스 부제는 상해에서 강남 교구장인 마레스까 주교에게 사제서품을 받고 5월에 요동 지방으로 가서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면서 부주교인 베르뇌 장 신부 밑에서 7개월 동안 병자 방문, 성사 집행, 교리 교육 등의 활동으로 사목 실습을 하였다. 1849년 11월 말에 그는 페레올 주교의 명령을 받고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중국 국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났다. 그러나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매스뜨르 신부는 중국에 남겨두고 최 양업 신부만이 교우들과 함께 12월에 보초들이 세찬 바람과 혹독한 추위로 건물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 무사히 관문을 통과하여 한양으로 들어왔다.
26.1.3 사목활동과 선종
한양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은 최양업 신부는 중병을 앓고 있는 다블뤼 안 신부를 문병하여 병자성사를 베풀고 충청도에 머물고 있던 페레올 주교를 방문하여 귀국 인사를 드린 후에 전라도에서부터 12년 동안의 사목 활동에 착수하였다. 그는 6개월 동안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평안도에 있는 교우촌을 순회하면서 예비자를 찾아 세례를 베풀고 신자들의 죄고백을 듣고 미사 성제를 집전하였다. 최 신부는 처음에 순회 방문 중에 외교인들의 고발을 받아 체포될 위험도 겪었으나 철종의 즉위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완화되어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는 사목 방문 중에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특히 외교인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못하는 여교우들에게 집안 식구 모르게 성사를 베풀었다. 또한 그는 주민들의 병고에 동정하여 간질, 각혈 부종 등의 원인이 나쁜 물에 있다고 판단하고 물을 정화할 수 있는 약과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로그레조아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사목활동에 헌신한 최 신부는 피로와 병고에 시달린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최 양업 신부는 사목활동 이외에도 번역과 저술에 종사하였다. 그는 다블뤼 신부를 도와 교회사 자료를 수집하여 라틴어로 번역하여 파리 외방 전교회의 본부에 보내어 후에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가 발간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그는 기도서인 「성교 공과」와 교리서를 번역하여 신자들의 신심 강화와 교리 지식의 심화에 이바지하였다. 아울러 페레올 주교가 증인들의 이야기를 참고하여 기대해박해 중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와 여기에 첨부하여 병오박해의 순교자에 대해 불어로 기록한 개정 증보판의 「기해일기」 및 「병오일기」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오늘날 교회사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최 토마스 신부는 교우들의 교리 지식 함양과 신심생활 활성화를 위해 조선의 전통적 가사 문학인 사사조 가사체로 「천주가사」를 저술했다. 이는 특히 글을 모르는 이들과 어린이 그리고 부녀자들을 위해 저술된 것이다.
조국 사목을 위해 헌신한 최 양업 신부는 사목활동 12년 만인 1861년 6우러에 주교에게 업무를 보고 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오는 도중에 급환으로 선종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베르뇌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 신부는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 직분을 준수하여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영혼 구원에 힘써 성공하였읍니다. 그의 죽음은 나를 몹시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서양 선교사가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이 있읍니다.” 최 양업 신부는 주교와 신부들의 기도 가운데 배론에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