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회의 조선 진출
블랑 주교는 교회의 자선 사업의 하나로 1880년부터 기아(棄兒)를 데려다가 여신자들의 집에 위탁하여 키웠으나 고아원을 세운 후에 그 운영을 평신도에게 맡기는 것이 여러 가지 어려움과 불편이 있음을 깨닫고 1885년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의 사이공 관구장에게 수녀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따라서 수녀회는 두명의 수녀들을 조선에 보냈으나 이들은 도중에 파선을 당하여 되돌아갔다. 1887년 7월 블랑 주교는 프랑스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본부에 다시 고아들을 보살펴 줄 수녀들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때 파리에서는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수로 있던 뮈뗄 신부도 수녀회의 조선 진출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총원장 수녀는 이러한 소식을 수녀들에게 알려 많은 지원자들 중에서 두명의 수녀 즉 자카리아(Saint-Zacharie Heuresult)와 에스더(Saint-Esther West)와 함께 사이공 관구 소속 중국인 수련 수녀 두 명을 조선 교회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1888년 5월에 이 사실을 블랑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주교님께서 요청하신 대로 네 명의 수녀를 보냅니다. 서양 수녀 두명 중에서 자카리아 수녀는 고아들을 보살피는 책임자로 보냅니다. 또한 사이공에 있는 중국인 수련 수녀 두 명을 보내기로 그곳의 관구장 수녀님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1888년 6월 3일에 두 명의 파견 수녀들은 마르세이유 항구를 떠나 6월 30일 사이공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두 명의 중국인 수련 수녀인 비르지니(Virginie)와 프란치스카(Francisca)와 함께 다시 조선 부임지로 향하였다. 1888년 7월 22일 수녀들은 제물포(인천)에 하선하여 블랑 주교의 지시로 마중 나온 뽀아넬 신부가 마련해 온 사인교(四人轎)와 장독교(帳獨轎)에 올라 한양에 도착하여 호기심과 기쁨 속에서 신자들의 영접을 받았다. 그들은 낙동(駱洞, 지금의 서울 중구 회현동 3가)에 있는 주교댁을 방문하여 블랑 주교에게 도착을 보고하고 뽀아넬 신부가 성서 출판소로 마련해 둔 새문안 정동(지금의 이화여자중학교 앞)에 여장을 풀었다. 당시에 수녀들은 특유한 복장 때문에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미 블랑 주교는 수녀들을 맞이할 수녀원을 종현에 마련하는 동시에 10대 소녀 다섯 명을 지원자로 모집해 두었다. 지원자들은 1888년 7월 29일에 수녀댁을 방문하여 자카리아 원장 수녀와 면담하고 입회하였다. 같은 해 9월 7일에 수녀들은 블랑 주교가 수녀들을 위해 장만해 두었던 집을 개수한 종현 수녀원으로 이사하였고 업무도 분담하여 원장 수녀는 고아원과 수녀원의 살림 전체를 관장하였고 비르지니 수녀는 주방과 세탁일을 맡았으며 프란치스까 수녀는 남자 고아들을 보살폈고 에스터 수녀는 여자 고아들을 맡았다.
이후로 종현 수녀원은 꼬스뜨 신부의 지도와 보살핌 속에서 발전하여 1890년에는 수련원이 발족하였고 1년 후에는 일본에 관구가 설정되어 조선 수녀원은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1894년 6월 30일에 첫 청원 착복식이 거행되어 일곱 명의 조선인 수련 수녀가 탄생하였고 이중에서 세 명이 1898년 8월 28일에 첫 허원을 하였는데 이들은 최초의 한국인 수도자일 뿐 아니라 근대 한국 교회사의 증인으로서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아울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은 자선 활동과 함께 교육 사업에도 종사하였고 인천(1894년), 약현(중림동, 1902년), 평양(1902년), 매화리(황해도, 1902년), 제주도(1902년) 등지에 분원을 설치하였다.
이들은 1909년에 진출한 독일 바바리아의 성 오틸리아 베네딕도 남자 수도회와 함께 성장기의 교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