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남 대주교님

 

                             주님,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 한국인에 의한 천주교회의 발전을 바라며




                                                     김수태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




                            1. 오늘, 그의 삶을 읽는 의미


                            2. 최초의 한국인 주교가 됨


                            3. 교회의 존립을 위해 수난을 겪음


                            4. 한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노력함


                            5. 교회의 재건과 발전을 추구함


                            6. 교회와 정치의 관계를 모색함


                            7. 교회의 완전한 자립을 이룸


                            8. 사회 복지의 길을 다시 걸어감






1. 오늘, 그의 삶을 읽는 의미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1902~1984)는 최초의 한국인 주교이다.  그리고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 사제 생활을 명동성당에서 처음 시작한 이래, 1967년 서울 대교구장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근․현대 한국 천주교회사의 중심에 위치하였던 명동성당과 함께 역사적 운명을 함께 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는 한국의 중심 교구인 서울 대교구장으로서, 한국 천주교회 전체를 오랫동안 이끌어 간 첫 세대의 한국인 교회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한국 천주교회는 그를 격동의 한국사 속에서 교회를 슬기롭게 이끌고 나가 오늘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공로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편 일부에서는 그를, 교회를 살리기 위해 민족을 소홀히 한 성직자라고까지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러한 이해의 대부분은 일제 말기에 있은 그의 교회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시종일관 일제와의 마찰을 피하며 그들에게 협력하는 등 일제에 대항하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행동은 결국 오늘날에 와서 친일 행위로까지 지탄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남북 분단이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반공주의 정책이나, 1960년대 이후 교회와 정치의 상호관계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 역시 부정적 평가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전환기마다 보여준 그의 선택이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2000년 대희년을 보내고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고백하며 참회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야만 했다. 한국 천주교회가 일제의 식민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 분리를 이유로 제대로 동참하지 못하였음을, 또한 해방 이후 전개된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빚어진 분단 상황의 극복 및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홀히 하였던 점을 반성하였다. 즉 한국 천주교회는 노기남 대주교의 시대를 반성, 극복하고 새롭게 나아갈 방향을 설정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하나씩 드러나고 있지만,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그러한 비판의 시각과 내용이 반드시 정당한 것만은 아님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삶 전체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현재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러므로 그 논의가 단순히 한 인물에 대한 평가에만 전적으로 머물 수는 없을 것 같다. 또한 평가를 하더라도 한 인간의 삶이 현실적으로 내포하는 복합성이나 생애 전체가 조망되지 않고, 일정 단계의 행위만을 문제로 삼아 공로는 인정하지 않고 허물만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방법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앞으로 그의 삶을 보다 새롭게,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노기남 대주교는 일제 강점기에는 한국인에 의한 천주교회의 존립을, 해방 이후에는 거기에다가 덧붙여서 실질적인 자립을 마련하기 위하여 힘써 노력한 인물이었다. 특히 일제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종교 자체의 존립을 보장받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그는 분명히 주저하는 협력자였으며, 그 길이 교회의 존립을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걸어갔다. 그것은 해방 이후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소용돌이치는 정국에 휩싸이면서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세대 지도자로서 그와 같은 선택들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 역시 한국 천주교회의 자립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노기남 대주교는 한국인에 의한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해 비극적인 운명을 외롭게 짊어져야만 했던 인물로 생각된다. 그것이 바로 지워버릴 수 없는 우리의 한국 천주교회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 우리가 노기남 대주교의 삶을 다시 읽는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는 그가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세대 지도자로 등장한 이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겪으면서,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최근까지 지도자의 교체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에게 교회 지도자란 어떠해야 하며, 민족과 세계 속에서 교회를 어떻게 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가를 계속해서 묻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의 내적 고민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읽어 가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어제를 돌이켜보고 새로운 방향을 함께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최초의 한국인 주교가 됨



  노기남 대주교는 1902년 평안남도 중화군 율리면 무진리의 쪽못 마을에서 양반 출신의 노정렬 요한과 황 비비안나의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노기남 대주교의 집안이 천주교를 믿게 된 것은 외할아버지의 영향이었다. 노정렬이 베르뇌 (S.F. Berneux, 장경호)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 황천일에게서 공부를 배우다 천주교를 알게 되어 세례를 받은 후, 그의 딸 비비안나와 혼인함으로써 천주교 집안이 된 것이다. 그러나 노 요한과 황 비비안나의 신앙생활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황천일에 대한 체포령으로 비비안나가 붙들려 3년 동안 수난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비비안나는 마침내 탈출하여 가정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주님은 내 생명, 나의 모든 일을 주님의 손에 맡기나이다. 주님,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드린 기도는 노기남 대주교에게 일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녔던 요한과 비비안나는 자녀 교육과 노씨 가문에 천주교를 전파하여 교우촌을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모진 시련이었다. 그 사이 8명의 자녀를 잃었고, 노씨 가문에 대한 선교 역시 실패하는 커다란 아픔을 겪었다.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막내 아들인 바오로만은 제대로 공부를 시키고자 마음먹었다. 마음씨가 착하고 총명한 바오로에게 집안의 기대가 쏠렸던 것이다. 때문에 넉넉하지 않은 집안이었지만, 바오로는 서당에서 공부하고 집에서는 천주교 교리를 배우던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이때 그는 어머니의 신앙생활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노기남 바오로가 신부가 되고자 결심한 시기는 열한 살 때인 1911년 논재 공소에서 첫영성체를 하고 난 무렵이었다. 신부라는 존재를 무척 부러워하였던 그는 자기도 신부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는 한국인 신부가 왜 없는가, 한국 사람은 신부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 매우 궁금해하였다. 그는 신부라고 하면 모두 외국 사람뿐인 듯한 느낌을 준 당시의 분위기에 남다른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한국 사람도 신부가 될 수 있다는 대답을 듣자, 그는 곧바로 신학교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였다. 비록 어려운 길이지만, 한국 사람이라고 하느님께서 도와주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것이다. 즉 그는 한국인 사제로서 한국 천주교회를 위하여 사는 것을 앞으로 자기가 걸어야 할 길로 선택하였다.


  노기남 바오로가 사제의 길을 걷겠다고 하자, 요한과 비비안나는 그의 신앙 생활과 교육을 위해서 다시 이사를 하였다. 어수선한 본촌보다는 산골의 교우촌이 좋을 듯하다 싶어, 황해도 신계군 고면 화개리 내동으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바오로는 이곳의 서당에서 공부를 열심히 배우는 한편, 그의 잊을 수 없는 신앙의 스승인 포내 본당의 부이수(P.J. Bouyssou, 손이섭)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부이수 신부는 바오로의 부모님이 박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앙을 지킨 독실한 구교우임을 알고, 신부가 되고 싶어하는 바오로의 신앙 교육을 위하여 매우 엄격히 지도하였다.


  노기남 바오로에게 신학교의 입학이 허락된 것은 뮈텔(G.C.M. Mutel, 민덕효) 주교와의 만남이었다. 뮈텔 주교는 지방 교회의 사목 순시를 위해 이 곳을 방문하여 그에게 견진성사를 주었다. 이때 바오로는 뮈텔 주교를 직접 찾아가 “저는 신부가 될 테요, 신부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드러내었다. 이에 그는 뮈텔 주교로부터 1914년에 용산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바오로의 신학교 입학은 연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오로는 자신의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된 한학을 폭 넓게 익히는 한편, 부이수 신부로부터 사제로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잘 들어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받았다.      


  노기남 바오로는 1917년 마침내 신학교에 들어갔다. 대부분 한학만을 공부하며, 소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던 그가 신학문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때문에 그에게는 대 촌놈이란 별명이 늘 붙어 다녔다. 그러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다녔을 때 그는 학과 성적도 좋았고, 결석도 한 번도 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열심히 공부한 모범생이었다. 따라서 그는 교수 신부들로부터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드디어 1930년 10월 26일 그는 서품을 받았다. 당시 한국인 신부가 30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를 포함하여 한꺼번에 10여 명의 한국인 신부들이 새로이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기남 신부의 서품과 함께 앞으로 한국인 사제의 시대가 열림을 예고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노기남 신부의 사제로서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그의 첫 부임지였다. 그는 명동성당의 보좌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에게 과분한 임명이었다. 이후 그는 이곳에서만 1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비에모(M.P.P. Villemot, 우일모) 주임 신부의 보좌 신부로 일하였다. 명동성당에서 그는 사제로서의 본연의 활동뿐만 아니라, 그 밖의 일까지 맡아야만 했다. 처음에는 계성 보통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담당하거나 정식 합창대를 창설하는 등의 순수한 의미의 사목을 주로 담당하였으나, 점차적으로 일제와 관련해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주교나 주임 신부가 감당하지 못하는 역할까지 그의 몫으로 맡겨졌다. 그가 명동성당에서 일한 유일한 한국인 사제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노기남 신부의 어머니는 아들이 보좌 신부가 아니라 어느 본당의 주임 신부로 일하면서, 그와 함께 살게 되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와 달리 1942년 1월 보좌 신부로서 일약 제10대 서울 대목구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일제는 한국의 모든 종교 단체의 책임자로 일본인을 배치할 계획을 세우고, 특히 서양인이 단체장인 천주교회에 심하게 독촉하였다. 서울 대목구의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해 어떠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대두하며 많은 논의가 일어났다. 한국 천주교회를 결코 일본인에게 넘겨줄 수 없으며, 시급히 한국인 주교를 내고, 한국인 신부에게 서울 대목구를 인계하라는 것이었다. 1941년 말에는 성탄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일본인 주교가 대목구장으로 오게 된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만일 그런 결과가 나타난다면 파리 외방전교회는 과거의 공적이 보여주었던 빛을 잃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신부와 신자들에게 천추의 한을 안겨 주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여론이 반영되었는지, 당시 서울 대목구장인 라리보(A.J. Larribeau, 원형근) 주교는 비밀리에 노기남 신부를 자신의 후계자로 내정하였다. 교황 비오 12세는 이를 받아들여 노기남 신부를 서울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한국인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서울 대목구장이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노기남 신부의 서울 대목구장 임명은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 교구를 일본인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한국인 신부와 신자들의 염원이 크게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와 같은 사정은 노기남 대목구장이 착좌한 뒤 명동성당의 주임 신부를 한국인 신부로 임명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본당 설립 60년 만에 처음으로 부임한 한국인 주임 신부였다. 한국인 신부를 명동성당의 주임 신부로 임명한 것은 한국인 대목구장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한국인들이 관할해 나가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때문에 노기남 신부는 자신의 대목구장 임명을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무거운 중책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라면 물리칠 길이 없다고 하면서 “주님,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말로 마침내 수락하였다. 그렇지만 한국인 신부로서 그의 대목구장직 수행은 매우 불안한 부분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주교로 서품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시일이 흐르면 혹시 대목구장직에 무슨 변동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서울 대목구의 신부들은 교황청에 노기남 대목구장의 주교 서품을 요청하였다. 1942년 11월 그가 주교로 서품됨으로써 최초의 한국인 주교가 탄생하였다. 이제 한국 천주교회는, 비록 일제의 압력에 의하여 일어난 일이지만, 파리 외방전교회 주교나 신부가 아니라 한국인 주교에 의해 본격적으로 운영되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3. 교회의 존립을 위해 수난을 겪음



  한국인 주교에 의한 한국 천주교회의 운영은 일제 강점기란 역사적 공간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노기남 주교는 서울 대목구를 대표하여 일제의 식민정책과 관계되는 일을 맡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그에게 수난의 길이었다.


  노기남 주교가 보좌 신부로 부임한 직후의 일이었다. 그는 명동성당의 보좌 신부가 되면서 계성 보통학교의 운영과 종교 교육을 책임져야 했다. 이때 그는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부임 인사를 한국말로 하여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일본말을 공공연하게 사용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두 차례나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으며, 뮈텔 주교의 도움으로 더 이상 일이 확대되지 않고 무마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노기남 신부의 역사의식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합병하려던 전후의 어린 시절에 그는 젊은 청년들이 망국의 한을 달래는 모습이나, 일가의 청년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짓는 광경을 퍽 감명 깊게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평양이나 멀리 서울에 가서 공부하던 일가의 청년들이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던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후 그의 민족의식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용산 신학교에서 장면 박사로부터 받은 교육이었다. 장면 박사의 이야기는 민족과 신앙에 대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는 바깥 세상의 사정에 어두웠던 신학생들에게 민족의 독립을 찾으려고 일어난 3․1 운동을 비롯한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들려주었다. 또한 세계 정세와 일제의 식민정책을 알려주며, 일제의 무력에 대해 맨 주먹으로는 이길 수 없지만 신앙의 힘 앞에 오히려 그것이 무력한 것임을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들을 때마다 노기남 신학생은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대신학교의 선배들 중에서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안으로 삼았으며, 그 역시 목요강론회라는 신학교 내의 비밀 서클을 통해 민족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노기남 신학생이 확고한 민족의식을 갖추기에는 이것만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자이던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신학생들에게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한국 천주교회를 위해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일제로부터 선교권을 보장받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일제의 탄압에 의해 종교 자체의 존립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신학생들에게 앞으로 한국의 정신적․영적인 지도자가 될 사람으로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고 묵묵히 실력을 다듬기를 요구하였다. 그러한 사정은 신학생들이 사제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노기남 신부를 비롯한 한국인 사제들은 당시 한국 천주교회가 부딪힌 현실적인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울러 교회 지도자가 요구하는 역할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가운데 서울 대목구는 한국인 사제인 노기남 보좌 신부에게 새로운 역할을 맡기기 시작하였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에 노기남 신부는 명동성당에서 열린 국위 선양 평화미사에서 일제를 위한 시국 훈화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1936년 이래 일제와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한국 천주교회가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대목구장들의 교서를 통해 일제에 충성을 약속하였던 결과였다. 교서는 곧바로 신자들에게 효력을 발휘하였는데, 노기남 신부는 그의 의지를 넘어서 대목구장에게 순명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후 노기남 신부는 1939년 5월에 들어와서 국민정신 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 연맹의 이사로, 1940년 11월에는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으로 개편되면서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1938년 7월 처음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이 만들어졌을 때 명동성당의 주임 신부가 참여하였던 것이 보좌 신부의 참여로 크게 바뀌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도 여기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일제 역시 자신들의 목적달성에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한국인 사제들 가운데 신부로서의 경력이 짧았던 노기남 신부가 임명된 것이다.  그가 서울 대목구장인 라리보 주교의 곁에서 명동성당의 보좌 신부로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기남 신부는 라리보 대목구장의 지휘 아래 그를 대신하여 대부분의 일을 수행해야만 했다. 그는 운동과 관련된 각종 회의에 참석하고, 서울 대목구의 본당을 순회하며 일제에 대한 충성을 권유하는 강연을 하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 속에서 노기남 신부의 서울 대목구장 임명이 이루어졌다. 이때 그는 교회 지도자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많이 고민하였다. 거기에는 장면 박사와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가르쳐 주었던 교회의 지도자상이 수없이 교차되었다. 때문에 대목구장으로서 그가 한국과 천주교 신자를 위하여 할 일이 너무나 많음을 가슴에 깊이 되새겼다고 한다.


  노기남 대목구장은 교회 활동에 주력하는 것이 일제의 식민정책에 협력하지 않는 하나의 길이며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에 그는 전시체제가 시행되는 동안 한국 천주교회의 내적인 발전을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1939년 그의 제안으로 서울 대목구 가톨릭 합창단이 창설되었다는 사실 등이 하나의 예이다. 대목구장이 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의 이사장을 평신도인 남상철로 교체하였다. 그가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남상철이 대신해주었지만, 그 일이 결코 교회 본연의 모습이 아니며 교회의 조직이나 활동과는 구별이 된다는 것을 알리고자 나름대로 선을 그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의도를 함께 도와줄 한국인 신부의 대목구장 임명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일제의 종교정책으로 말미암아 그의 대목구장 취임 이후 일본인 대목구장이 계속해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43년 홍용호 신부가 평양 대목구장 및 두 번째의 한국인 주교로 서품되는 결실을 거두었다.


  그렇다고 해서 노기남 주교가 전시동원운동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을 때보다는 덜하였지만 수시로 일제의 요구에 응해야 했다. 한국인 대목구장의 임명에 크게 당황하고 긴장했던 총독부는 그에게 황국 신민화 정책에 적극 협조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더욱 철저히 감시했던 것이다. 전쟁이 말기에 접어들수록 일제의 종교 규제는 한층 심해졌는데,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 지도자인 그는 일제의 모든 탄압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주교로 서품되었을 때의 축하연에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할 것과 황국 신민화 운동의 필요를 역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1943년 2월 한국 청년들에 대한 징병제가 시행되자, 징병을 격려하기 위하여 종교 단체들이 연합하여 만든 조선 종교 전시 보국회에 참여하였다. 


  노기남 주교는 당시의 일들에 대해 한국 천주교회가 부딪혔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것으로 이해되기를 바랐다. 한국 천주교회는 1938년 이후 최소한의 종교적인 공간과 종교적인 권리를 확보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종교통제를 완전히 이룩한 1939년 5월 이후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일제 말기에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였던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는 프랑스인 교회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존립을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결정이었다고 설명한다. 


  노기남 신부가 대목구장이 되고 나서 바로 겪었던 어려움의 하나는 천주교 신자들의 신사 참배 문제였다. 1936년 4월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사 참배 허용으로 의견을 모았고, 같은 해 5월에 종교적 행위가 아니고 애국적 행위이므로 신사 참배를 허용한다는 교황청 포교성성의 훈령이 공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다시 다루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몇 차례 신사참배를 하였지만, 신앙상으로나 교리상으로나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의 첫 번째 해외 여행인 일본 방문이 이루어졌다. 그는 동경 주재 교황사절에게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한 교황청의 지시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의 회답은 그의 바람과 달리 국가의식인 신사 참배를 해도 무방하다는 것으로 정리되자, 그 역시 신자들에게 이를 허락하였다.  


  그와 같은 측면은 그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던 외국인 신부들의 문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서울 대목구장으로서 평양 대목구장과 춘천 지목구장을 겸임하게 되었는데, 당시 일제에 의하여 구금되어 있던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미국인 신부들과 골롬반회의 아일랜드인 신부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는 그들을 우선 석방시킨 다음, 평양 대목구의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모두 귀국시키고, 춘천 지목구의 골롬반회 신부들은 강원도의 여러 본당에 분산시켰다. 이때 그가 내린 결정은 한국 천주교회의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에서 나온 것이었다. 외국인 신부들이 만일 문제를 계속해서 일으킨다면 한국인 신부들은 아무런 일도 못하게 되고, 또한 한국 천주교회는 파경의 형편을 면하지 못하고 자멸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노기남 주교가 한국 천주교회의 존립을 위해 노력한 사실은 대목구장으로 취임한 지 한 달도 안된 1942년 2월 총독부로부터 용산의 신학교를 폐쇄하고 군대용으로 징발한다는 소식을 듣자, 서울의 대신학생들을 덕원 신학교로 옮겨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그곳을 성모병원의 분원으로 개조하여 계속 사용하였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철 재료의 심각한 부족 때문에 명동성당의 제대 난간을 강제로 철거해 갔던 일제가 마침내 종의 헌납까지 강요하였을 때, 그는 종탑을 헐어야만 종을 가져갈 수 있으며, 종을 떼어낸 후에는 종탑을 원래대로 해놓아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노기남 주교에게 일제가 마지막으로 요구한 사항은 성모병원 쪽에서 명동성당을 향해 땅굴을 파겠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연합군이 성당을 폭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땅굴을 파서 군수 물자의 저장 장소 및 방공호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성당 밑에 굴을 파게 되면 지반이 약해져 성당이 무너지게 될 위험이 있다며 공사의 불가를 말하고, 그 방향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여 명동성당을 보존하였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를 책임지고 있던 교회 지도자인 그에게 교회를 지키는 일이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의무였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노기남 주교는 민족의 현실적 과제에 소홀히 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그것은 한국 천주교회의 침체로 반영되었다. 교회의 내적 발전을 나름대로 추구하려고 했던 그의 일정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자 증가율이 급격하게 감소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프랑스인 선교사로부터 한국인 신부로 한국 천주교회의 운영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해방 후 한국 천주교회는 이와 같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였다.




4. 한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노력함



  1945년에 들어오면서 노기남 주교는 최후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하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해방이 되자 그는 한국이 해방되었다는 기쁨보다는 한국의 장래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어떻게 될까 하는 문제를 크게 걱정하였다. 왜냐하면 해방과 함께 한국에는 38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하는 군정이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노기남 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 지도자로서 해방 정국이란 매우 어려운 정세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방의 소식이 들려 온 1945년 8월 15일에 한국 천주교회는 약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 다음날 소련군이 서울에 들어온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에 노기남 주교는 교회로서도 이러한 상황을 그냥 바라볼 수 없다고 하며, 신자들과 학생 및 수녀나 신부들까지 서울 역으로 환영을 나가는 것을 허락하는 한편, 그 역시 소련 장군을 예방할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식은 좌익 계열에 의한 허위 선전의 결과로 일어난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노기남 주교는 당시의 혼란 속에서 교회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는 8월 16일부터 여러 차례의 가르침을 통해 모든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시국을 차분히 살피고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으로 하루빨리 한국이 자주 독립을 조속히 이룩할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소련군이 아니라 미군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그 다음 달인 1945년 9월 8일의 일이었다.   미군의 주둔은 일제 강점기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한국 천주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왜냐하면 한국 천주교회는 미국 천주교회의 도움을 받으면서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노기남 주교와 미국의 스펠만(F.J. Spellman) 대주교와의 만남으로 그것은 시작되었다. 9월 9일 노기남 주교는 스펠만 대주교 및 미군 교우 장성들과 함께 첫 번째 한미 친선 미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는 9월 26일 순교 복자 대축일에 미군 서울 입성 환영회를 명동성당에서 개최하였다. 11월 1일 모든 성인의 축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모든 미군의 영혼을 위한 미사를 드렸는데, 여기에는 하지(J.R. Hadge) 중장도 참석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앞으로 한국 천주교회와 미군정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인 것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45년 9월 13일 미군정 고문관인 나이스터(Nister) 준장이 노기남 주교에게 한국인들 가운데 한국의 정치를 맡을 사람을 추천해 줄 것을 부탁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노기남 주교 또한 천주교의 대표로서 장면을 설득하여 미군정에 의해 설치된 자문기구인 민주 의원과 입법 의원에 모두 참여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해방 이후 다시 돌아온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의 미국인 신부들의 역할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군정 당국의 책임자들을 정례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미국인 신부들은 한국 천주교회와 미군정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 역시 한국 천주교회와 미군정 당국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탄탄한 협력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기남 주교에 의하면 미군과의 우호 관계 형성은 한국의 자주 독립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미군과의 미사 때마다 미국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한국의 자주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였다. 때문에 그는 해방 이후 단순히 교회의 안전만을 도모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복잡한 해방 정국에 직접 뛰어들어 갔다. 해방 직후 그가 방문하였던 건국 준비위원회의 활동에 크게 실망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좌익 공산주의세력의 활동을 크게 우려하였던 점이 작용하였다. 이에 노기남 주교는 한국을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건설하기 위하여 우익 정치세력과의 협력 관계를 공고히 다져 나갔다. 그러한 움직임은 미군이 들어온 9월 이후 뚜렷이 나타났는데, 우익 세력을 대표하는 한국 민주당에 한국 천주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노기남 주교가 나이스터 준장의 부탁으로 장면 박사와 함께 상의하여 작성한 정치 지도자의 명단이 우익 인사 일색이었다는 점도 그러하다.


  한편 노기남 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자로서 프로테스탄트와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좌익 공산주의 세력의 배격을 위해서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교인이 단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따라서 그는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해방 이전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스도교를 말살시키려는 공산주의세력이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 대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과 접촉하여 친선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이러한 노력은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반공을 위한 공동전선을 형성시킬 수 있었다. 이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에도 천주교는 프로테스탄트와 함께 참여하였다.


  노기남 주교는 1945년 10월 이승만 박사가, 11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이하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자 이승만 박사를 예방하는 한편, 12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에 임정 요인을 위한 환영미사를 집전하였다. 이것은 국내 지도자들과 해외에서 입국한 지도자들이 일치 단결하여 하루빨리 임시정부라는 명칭을 떼고 한국에 자주독립정부가 세워질 것을 바라는 그의 염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미국의 천주교 신자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협조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천주교회 역시 자주독립을 위해 적극 협조해줄 것을 부탁한 이승만 박사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뒤에서 힘이 미치는 데까지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노기남 주교의 희망과는 달리 좌우익의 심각한 대립과 함께 정치가 더욱 혼란해지자, 그는 국민의 정신을 계몽․선도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언론기관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는 미군정으로부터 조선정판사의 인쇄시설과 용지를 인수받아 1946년 10월 〈경향신문〉을 새로이 창간하였다. 〈경향신문〉은 건전한 우익진영을 적극 지지하는 한편, 좌익 공산주의세력이 파괴와 분열로 민심을 현혹시킬 때 그에 대항하였다. 따라서 〈경향신문〉은 한국 천주교회를 한국 사회와 매개시켜주고, 천주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급격히 키워 준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이제 노기남 주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 천주교회의 정치적 활동은 더욱 선명하고 적극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노기남 주교는 남한 단독으로 독립정부를 수립하는 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반대로 남북한 총선거가 불가능하게 되어, 유엔에서 남한 단독의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자 한국 천주교회는 이를 지지하였다. 이것은 이승만 박사의 정치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노기남 주교는 정치 지도자 가운데 첫 번째로 손꼽았던 이승만 박사와 반공노선이 서로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6․25 전쟁 직후인 1952년까지 밀월관계로 표현될 정도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여기에는 교황사절의 한국 파견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47년 10월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의 번(P.J. Byrne, 방) 신부가 교황사절로 입국한 것은 교황청이 한국의 정치적인 독립을 사실상 승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동경 교황사절의 관리 지역으로 남아 있던 한국교회의 종교적 독립을 승인한 것이었다. 이것은 노기남 주교가 계속해서 추구해 오던 한국 천주교회의 한국화에 매우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후 번 신부는 남한 단독으로 총선을 실시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한다는 유엔의 결의를 적극 찬성하면서, 주한 유엔 대표들과 미군 당국자들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처럼 교황 사절은 한국 천주교회와 세계 천주교회,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와 미군정 및 한국정부를 이어주는 거점이 되었다.


  1948년에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은 남한 정부 구성을 위한 총선거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때 가톨릭 시국 대책위원회를 결성한 노기남 주교는 서울 대목구 내의 본당에 다시 공문을 보내어 총선거의 성공을 기원하였다. 또한 가톨릭 운동을 적극적으로 적극 독려하며, 사실상 총선거를 뒷받침하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 천주교 신자들의 선거 출마를 적극적으로 권유하였고, 장면을 서울 대목구가 공천하는 형식으로 출마하게 하였다. 천주교 관련 언론 매체들도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이러한 후원과 함께 총선거는 매우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이에 노기남 주교는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맞이하여 민족적 경사로 축하하고, 서울 대목구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20일까지 독립선포 감사미사를 봉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한국 천주교회의 역할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대표적 평신도 지도자인 장면은 미군정으로부터 한국정부로의 권력 이양을 위한 준비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눈부신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 총회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을 때에 천주교회의 뒷받침이 있었다. 특히 교황사절인 번 신부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 장면 박사가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자, 그를 위해 친필 소개장을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유엔 총회에 참석한 천주교 국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대한민국의 승인에 도움이 되었다. 한편 교황청은 한국의 독립을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앞서 승인해 주며 축복해 주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장면 박사를 특사로 파견하여 교황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이후 노기남 주교는 1949년 8월에 대한 천주교 연맹을 결성하여 한국의 재건과 국제적 활동을 도모하였다.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한국 천주교회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비록 남한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한국 천주교회의 커다란 기여가 있었음은 오래 기억할 만하다고 하겠다. 해방 정국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주도한 정치적 행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명동성당을 무대로 진행되었으며, 그 주역으로 노기남 주교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5. 교회의 재건과 발전을 추구함




  일제 강점기 동안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던 한국 천주교회는 해방과 함께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은 6․25 전쟁으로 커다란 좌절을 다시 겪어야 했으며, 이후 교회의 재건을 통해서 새로운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했다.


  해방과 함께 노기남 주교에게 가장 시급하게 대두한 과제는 일제에 의하여 위축되고 왜곡된 교회를 정상화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해방과 함께 일제에 의해 징발되었던 대부분의 교회 시설들을 다시 찾아와 교회의 직접 관리하에 두었다. 국내에 오랫동안 억류되어 있던 외국인 신부들도 풀려 나와 본래의 임지로 돌아가게 하였다. 또한 일제 때 폐간되었던 《경향잡지》와 《가톨릭 청년》을 다시 복간시켜 계속 발간해 나갔다.


  노기남 주교가 미국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되었다. 미국의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그 이전의 파리 외방전교회나 골롬반회를 대신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번 신부의 교황 사절 부임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위상을 더욱 높여준 계기가 되었다. 노기남 주교와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들과의 관계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가 주교의 비서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