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우르바노 2세 교황 Urban Ⅱ. 1088~1099
정치적인 혼란으로 오스티아(Ostia)의 주교 추기경 오도(Odo)가 1088년 3월 12일 교황 – 우르바노 2세 – 으로 선출되기까지 거의 일 년 반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우르바노 2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승이자 원장이었다. 우르바노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될 무렵에 아직도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가 건재해 있었다. 우르바노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대립 교황이 로마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우선 테베레 섬에 정주해야만 하였다. 대다수의 추기경들은 여전히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 편에 가담하고 있었다.
1089년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는 로마에서 시노드를 개최하여 우르바노 2세 교황에게 파문의 처벌을 내렸다. 1090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으나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4세의 권력은 여전히 막강하였다. 그래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다시금 로마를 떠나 노르만족의 공작에게로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093년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아들 콘라트(Konrad)는 자신의 부친으로부터 참패당하여 밀라노(Mailand)의 대주교에 의해 이탈리아의 왕으로 옹립되었다. 1093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 1094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프랑스를 방문하였다. 1095년 피아첸차(Piacenza)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는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에게 내린 파문의 처벌을 재확인하였다. 이미 1089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평신도의 성직 임명권을 거부하는 태도를 표명한 바 있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전적으로 자신의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노선에 입각하여 처신하였다. 그래서 1095년 클레르몽(Clermont)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결정을 재확인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주교들과 성직자들로 하여금 왕이나 그 밖의 평신도들에게 이행하는 충성 서약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이 시노드는 처음으로 ‘Treuga Dei'(하느님의 평화와 휴전)를 선언하였다. 평화를 깨뜨리는 자에게는 종교적인 처벌이 내려졌다. 아울러 이 시노드는 십자군 운동의 제창으로 중요한 의미를 인정받고 있다. 성지를 터키족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교황의 호소는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십자군의 전투 구호는 ꡒ하느님께서 원하신다ꡓ였다. 십자군에 가담하기 위해 클레르몽에 집결하였던 모든 병사들의 오른쪽 어깨에 교황은 하얀 십자가를 달게 하였다. 이로써 십자군 운동은 군복무의 성격과 성지 순례의 성격을 동시에 포함하게 되었다. 모든 십자군에게는 대사가 약속되었고, ꡐ하느님의 평화ꡑ라는 가호가 주어졌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십자군의 성공, 즉 성도 예루살렘의 실지 회복을 보지 못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도 예루살렘의 탈환 두 주일 전인 1099년 7월 29일에 서거하였기 때문이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문제와 관련해서는 만족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십자군의 이념을 통해서는 전체 교회의 수장으로서 면모를 보여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