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예수와 가난I.
예수께서는 그 첫 설교를 “가난한 자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시작하심으로써(마태 5,3; 루가 6,20), 그분이 선포하시는 왕국을 상속할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신다(참조 야고 2,5). 예수의 처신도 이러한 그의 선포와 일치 Walter Kasper, ꡔ예수 그리스도ꡕ, 박상래 옮김, 신학총서 제13권, 분도출판사, 1977, 143면.
하여 철저히 내적, 외적으로 가난하신 분이 되셨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2,6-7).
하느님께서는 “말씀이 육신(σάρξ) 성서에서 ‘육신’이라는 낱말은 인간을 그 가엾음, 덧없음, 그 일상성, 그의 헛수고와 좌절과 허무라는 관점에서 가리키는 낱말이다. 그러나 덮어놓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바로 나자렛의 예수라는 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한다 : 위의 책, 350면.
이 되시어”(요한 1,4)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심으로써(필립 2,7) 육화라는 “實存的 가난”과 죽음이라는 “최고의 가난”을 겪으셨다. 김보록, “복음적 가난”, 「전망」 제81호, 1988, 133면 참조.
그분은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가난하게 사셨으며, 가난하게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분의 지상 생활 전체가 바로 가난의 생활이었다.
그분은 부유하셨는데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분의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기 위함이었습니다”(2고린 8,9)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을 뿐아니라, ‘부유하신 당신이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가난한 가운데 사셨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일을 당신 사명의 중심으로 삼으셨으며, 당신 교회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구현되는 가난의 표지로 세우셨다” : 푸에블라 문헌, 교회의 가난, 7항.
1. 탄생과 유년기
복음서 저자들 가운데 루가와 마태오만이 예수의 탄생설화를 전해준다. 두 저자의 탄생설화를 비교해 보면 루가는 예수의 가난한 탄생을 애써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탄생하신 장소가 베들레헴의 어떤 집으로 되어있고, 동방의 세 현자들이 별의 인도로 이 곳에 찾아와서 값진 보물,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 예수께 바쳤다고 되어 있다(마태 2,1-12). 이와는 대조적으로 루가복음의 탄생설화는 남편 요셉과 함께 베들레헴에 도착한 만삭의 마리아가 해산할 방을 얻지 못해 가축이 머무는 장소에서 몸을 풀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혔으며, 그 근방에서 한밤중에 양떼를 지키던 가난한 목동들에게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고 보고한다(루가 2,1-20). 정태현, ꡔ모든 이에게 평화의 복음을ꡕ, 성서와 함께, 1991, 75-76면.
예수께서 아기였을 때 “아기를 찾아내게하여 죽이려는” 세상의 공격을 받았으며 “밤중에 이집트로” 피난을 떠남으로써 방랑생활을 하셨다. E. Schweizer, ꡔ마태오 복음ꡕ,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옮김, 1988, 49면 참조.
예수는 나자렛이라는 동네 마태 2,23 참조 :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메시아성은 충분히 의심받을 만했다. 왜냐하면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유대인들의 볼 때 이 지방 사람들은 반(半) 이교도들이요 게으로고 세속적이며 야만적이었기 때문이다.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하고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말한다. 그러나 겐네사렛 호수 주위의 티베리아나 베싸이다 같은, 보다 존경받을 만한 도시 가운데서가 아니라 바로 이 곳에서 예수께서는 그분의 일생을 시작하신다 : Wolfgang Trilling, ꡔ마태오 복음ꡕ, 강연중 옮김, 성요셉 출판사, 1991, 46면.
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루가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를 낳은 지 40일 되었을 때 정결예식을 거행하기 위해 성전으로 가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재물 레위기 12,8 참조.
로 바쳤다(2,21-24).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한살난 양을 온전한 번제로 바칠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기에 그 대용으로 작은 재물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태현, 앞의 책, 76면 참조.
어린 나이에 벌써 목수 일을 배우시고, “목수의 아들”(마태 13,55)로서 매일 요셉과 함께 일하셨고 그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셨다. 김보록, “복음적 가난(1)”, 132면.
2. 공생활
(1) 세례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오셨다. 세례는 회개가 필요한 죄인에게 주는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미천한 사람들 속에 섞여 머리를 숙이고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겸손되이 죄인의 대열에 들었다. Wolfgang Trilling, 앞의 책, 58면 참조,
요르단 강에서 받은 세례는 예수께서 “죽음으로써” 받을 세례를 예고하며(루가 12,50; 마르 10,38), 이렇게 해서 예수의 공생활은 두 개의 세례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요한 복음사가가, 뚫어진 예수의 늑방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고 기록하고(요한 19,34), 영과 물과 피가 밀접하게 일치되었다(1요한 5,6-8)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X. 레옹-뒤푸르, “세례”항, 앞의 책, 302면 참조.
(2) 유혹
예수께서 공생활에 들어가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악마의 손에 유혹 예수께서 ‘단식의 산’에서 받으신 세 가지 유혹은 그분의 온갖 유혹들을 대표하는 본보기이다. 그분의 신성은 ‘죄 이외의 모든 것에서’ 인간 조건을 취하셨던 만큼 그런 유혹이 그분의 신성과 양립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S. Galilea, 앞의 책, 136면.
을 받으셔야 했다(마태 4,1-11; 마르 1,12-13; 루가 4,1-13). 예수께서는 육신의 안락과 육체적 욕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영예, 그리고 세속적 권력을 권하는 유혹을 물리치셨다. 한마디로 예수는 자신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가난을 선택하셨다. 진 토마스, “예수의 생활양식을 모방하는 수도생활”, 「전망」 제19호, 대건신학대학 전망편집부, 1972, 32면 참조.
(3) 머리를 눕힐 곳이 없는 예수(마태 8,19-20; 루가 9,57-58)
예수께서는 선교활동을 하실 때에도 머무실 집 한 채 없이 가난하게 지내셨다. 정태현, 앞의 책, 76면.
고향을 떠나서 공적 활동을 하는 동안 예수는 문자 그대로 방랑생활을 했다. 각지를 두루 다니시면서 침식을 제공받았던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유로운 결속을 통해 상호 평등한 삶이라는 새로운 생활 양식을 실현하라고 촉구하는 “떠돌이 은사자들”의 지도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가정을 근거지로 유지하지만, 나머지는 예수와 합류하려 이곳 저곳으로 여행하되(마태 4,23-25; 9,35-38) 언제나 사람들의 접대에 의존한다: Herman Hendrickx, ꡔ하느님의 집안ꡕ, 성찬성 옮김, 가톨릭 출판사, 1994, 64면.
가파르나움에서는 시몬 베드로의 집에(마르 1,29), 예리코에서는 세리 자케오의 집에(루가 19,5), 예루살렘 순례시에는 베타니아에(마르 11,1.11-12; 14,3; 요한 12,1) 임시숙소를 정하셨고, 경우에 따라서는 숙소를 전혀 마련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루가 9,51-56). 정양모, “소명과 추종(1)”, 「전망」 제19호, 대건신학대학 전망편집부, 1972, 133-134면 : 방랑객 예수는 여비를 마련한 다음 산천을 누빈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호의로 살았던 것 같다(루가 8,3).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기댈 곳조차 없습니다.”는 말씀대로 예수는 가난한 상태에서 공생활을 하셨음을 알 수 있다.
(4) 내적인 가난
예수는 경제적인 가난외에도 가난한 자의 모습을 하였음을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를 없애려고 모의를 하였지만 예수는 거기를 떠나시고 멀리하시는 것으로 그치셨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그분을 언젠가는 제거할 수 있는 약한 자임을 나타낸다. 모든 병자를 고쳐주시면서도 당신을 남에게 알리지 말아달라고 신신 당부하시면서 인기를 모으려고 하시지 않고 선전을 하실 줄 모르신다. 인정을 받으시는 비결을 모르신다. 메시아라면 악과 다투고 정면으로 겨루어야 하는 인물로 부각되어 왔는데, 여기서는 약한 하느님으로 나타나신다. Carlo M. Martini, ꡔ마태오 복음ꡕ 성염 옮김, 성바로오 출판사, 1993, 221면 참조.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5)에서 하느님의 연약하심이 잘 드러난다. 당신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사람에게 맡기신다. 그러나 그 신뢰는 보답을 못 받는다. 끝내 아들까지도 잃게된다. 마태 26,14-16에는 유다에 대하여 나온다. 그는 예수가 국가를 중흥시키는 정치적, 도덕적 세력가이기를 바랐지만 자기의 선생이 약함을 알고 환멸을 느꼇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기대하던 그런 ‘영도자’가 아님을 깨닫고 예수를 대제관에게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26,16) 예수는 이러한 상황을 아시면서도 그를 가로막지 않으시고 “당신이 하려는 일을 어서 하시오.”라는 말씀까지 하신다. 위의 책, 237-240참조.
환호속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떼에도 “겸손한 왕”으로 입성하신다(마태21,5).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즈가리야가 예언했던 겸손한 분이시다. 예수는 겸손한 자들의 메시아이며 겸손한 사람 구약 성서에 있어서 겸손한 사람의 전형으로는,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겸손했던 모세(민수 12,3)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겸손과 순종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완성하신 신비스러운 야훼의 종(이사 53,4-10)이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예언자와 현자들은 겸손의 필요성을 설교한다. 마지막 예언자 즈가리야는 말하기를, 메시아는 나귀를 타고 시온에 들어가는 겸손한 왕이시라고 한다(즈가 9,9) : X. 레옹-뒤푸르, “겸손”항, 「성서신학사전」, 광주가톨릭대학 옮김, 1984, 20면.
은 행복하다(마태 5,4; 시편 37,11; 희랍어 praüs=하느님께 순명함으로써 인내와 온유함을 몸에 익힌 겸손한자)라고 선언한다. 예수는 어린이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겸손의 전형으로 제시한다(마르 10,15.16). 그분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기는 커녕(요한 8,3) 자기 제자들의 발을 물로 씻기까지 자기를 낮춘 분이다(요한 13,14-16). 비록 하느님과 동등하시지만 자기를 비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다(필립 2,6-7; 마르 10,45). 위의 책, 19-20면 참조.
(5) 수난
1) 겟세마니 동산(마태 26,36-44; 마르 14,32-40)
예수의 체포는 축제 직전에 도성 밖 키드론 골짜기 맞은편 올리브 산의 겟세마니 동산에서 일어났다. 복음서에서는 체포되기 전에 예수의 불안, 공포가 뚜렷이 강조하고 있다. 이점은 모든 인간적 곤경을 초극한 스토아 사상가나 초인이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것과 다른 점이다.
완전한 의미의 한 인간이 유혹과 시련을 겪고 있다. 가장 절친한 사람들마저 자기를 전혀 이해해주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Hans Küng, 앞의 책, 230-231면.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면서 기도를 하심으로써 참된 가난한자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2) 재판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율법에 의해 단죄를 받았듯이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않는 사람들로부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을 구별했으며 그들과의 교제를 피하였으며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민족”(요한 7,49)라고 경멸적으로 표현했으며 그들로부터 멀리하였다. 불가피하게 율법과의 갈등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 Eduard Lohse, ꡔ신약성서배경사ꡕ, 박창건 옮김,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68면 참조.
예수도 이제 종교 실권자들에게서 율법에 의해 단죄 바오로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비위에 거슬리는”(1고린 1,23)자요, 자신이 열과 성을 다해서 준수하던 바로 그 율법에 따라 “저주받은” 자였다(신명 21,23 참조). Joshph A. Fitzmyer, S. J., “Pauline Theology” in The Jeromo Biblical Commentary, ed. Raymond E. Brown, S.S., et al.,(London:Geoffrey Chapman, 1968), n. 79: 13, 803면 ; 김상옥, “십자가의 신비와 그리스도교 영성”, 「전망」 제44호, 133면에서 재인용.
받고 재판을 받게된다. 재판을 받는 동안 관저 밖에서 사도들이 자신들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달아났으며, 그 누구도 예수를 변호하러 증인으로 나서지 않았다.
3) 십자가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그 형벌을 더욱 무겁게 하기 위해 미리 매질을 당했다. 쇠붙이가 박힌 가죽띠로 모질게 채찍질을 하는 매질은 십자가형의 관례였다(마르 15,15-20). 매질을 당하는 것만으로도 죽는 사람이 드물지 않았다. 예수에게는 가시관도 씌웠다. 그리고 로마의 군인들의 조롱을 받았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군인들은 자신들 앞에 서 있는 비참한 몰골의 사람을 본다. 그들도 그가 왕을 자칭한 죄로 고발된 것을 안다. 그들은 당시 군대에서 유행한 코미디에 나오는 희화적인 왕을 연상한다. 이 회화적인 왕은 옛부터 내려오는 관습으로 생명을 가져왔다가 다시 죽음에로 이끌어가는 신비한 자연의 힘의 와신인 왕, 즉 그 나라의 구원자는 그의 시대가 지나면 그의 피로 새로운 생산력을 보증하도록 희생제물을 바쳐졌다. 이 관습이 세월이 많이 지난 그 당시에는 왕 대신 한 죄수가 하루 종일 가짜 임금 노릇을 하고 나서 죽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 Romano Guardini, ꡔ주님ꡕ, 남현욱·박재순 옮김, 바오로 딸, 1995, 575면.
…그래서 예수 시대에는 여러 로마 군대 안에서 그런 가짜 왕을 모욕하고 죽이는 끔찍한 병정놀이가 행해졌다. 아마 이 병정놀이가 그들에게 떠올랐을 것이다. 그들은 일그러진 가짜 왕의 모습, 알아볼 수 없게 흉칙하고 기괴하게 이지러진, 자연-구원자의 모습을, ‘그 구원자 신들을 포함한 타락한 자연의 예속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왔던 분’에게 씌운다. 그들은 그분에게 광대놀이를 시킨다. “그때에 총독의 군인들이 총독 관저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그분 주위에 전부대를 모았다. 그러고는 그분의 옷을 벗긴 다음 그분에게 붉은 망토를 둘러 걸치게 했다. 또한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서 그분의 머리 위에 얹어놓고 그분의 오른손에는 갈대를 (들렸다). 그리고 그분 앞에 무릎 꿇고 조롱하며 ‘유대인들의 왕 만세!’하고 소리 질렀다. 또 그분에게 침을 뱉은 다음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쳤다.”(마태 27,27-30) 위의 책, 575-576면.
십자가 처형은 로마 제국의 처형방법 중에 하나였다. 피가 나도록 채찍질을 당하고는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가 출혈이 심해서 또는 기진해서 죽기까지는 흔히 오랜 시간이 – 더러는 이튿날까지 걸렸다. 그야말로 잔인무비하고 치용무쌍한 인간차별의 처형 방식이었다. Hans Küng, 앞의 책, 233면.
너무나 잔인한 나머지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형이 금지되어 있었고, 누구보다도 먼저 노예들에게 적용되었으며 반역자에게도 적용되었다. Walter Kasper, 앞의 책, 197면.
그러므로 십자가형 자체가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으로 불리웠으며,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죽음의 성격 자체가 사람을 조롱하고 모욕하면서 죽게 만드는 것이었다. 십자가형은 인간의 잔학이 고안해낸 고문 중에서도 최고 걸작이었다. 죄수의 체위부터가 우습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 불행한 인간은 꼴사납게 비틀린 몸짓을 하게 되고 죽음과싸우는 단말마의 몸부림으로 장면은 갈수록 괴기해지는 것이었다. Carlo. M. Martini, 앞의 책, 260-261면.
예수가 극악무도한 죄인의 모습으로 이러한 조롱과 고통을 당하였다.
4) 버림받음
육체적 고통못지않게 고통을 겪은 것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버림받은 채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다. 한스 큉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울 것
최악의 의미에서 죄인의 대표자 마르 15,23; 2고린 5,21 참고.
! 적수들의 멸시도 동지들의 도망도 당연한 이로 보였다. 도주한 동지들에게는 이 죽음이 예수에게 걸었던 희망의 종언, 예수에게 바쳤던 신앙의 철회, 무의미의 승리를 뜻했다. 이것이 이 죽음의 특성이다: 예수는 사람들의 – 루가와 요한에서는 표현이 누그러진 – 버림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제한한 버림 속에서 죽었다. 그리고 여기서 비로소 이 죽음의 가장 그윽한 깊이가 드러난다: 이 죽음은 하도 자주 이 죽음과 비교되곤 하는 저 “아름다운 죽음”, 신성 모독과 청년 오도로 고발된 소크라테스나 일부 스토아 현자들의 죽음과 얼마나 다른가. 예수는 속절없이 고통에 내맡겨져 있었다. 혼연한 초탈이니 내면적 자유니 숭고한 평정이니 위대한 심혼이니 하는 말들은 복음서에는 없다. … 감내할 수 없는 고난과 고뇌의 임종, 숭고한 평정의 경지는커녕 더없이 지극하게 버림받은 처지가 특징인 죽음! … 둘도 없이 하느님과 일치하여 있다고 확신했던 예수이기에 또 그만큼 둘도 없이 하느님게 버림받은 처지도 역연해진 예수였다. 예수는 이 아버지 하느님과 끝까지 완전히 하나가 되었건만 이 하느님은 예수와 끝내는 조금도 하나가 되어 주시지 않았다. … 온 세상 앞에서 공공연히 자기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과 도래를 공포한 예수는 이처럼 하느님과 완전히 버림받은 채 죽었고 그래서 온 세상 앞에서 공공연히 죄인과 악인으로 공시되었다. Hans Küng, 앞의 책, 239-240면.
그래서 그분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46)하고 부르짖으셨던 것이다. 어쩌면 당신이 그간 일하시면서 겪은 고독과 체념, 죽음에 임하시면서 철저하게 버림받으셨다는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셨는지도 모른다. S. Galilea, 앞의 책, 150면.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체험과 죽음의 이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을 함께 나누시는 죽음이었다. 이 경지까지 내려오시고 우리와 똑같은 처지가 되셨다. Carlo M. Martini, 앞의 책, 275면.
십자가에 처형된 분은 세상에 고통받고 천대받는 군상들을 통해서 당신 모습을 드러내셨으며, Georgy Hunsinger, “몰트만의 정치신학과 폭력의 문제,” 성염 옮김,『전망』제29호, 1975년 여름, 31면.
고통받는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이사야서(53,2-7)안에서의 주님의 종의 운명은 이제 현실로 이뤄지고 있으며, 유대인의 왕 예수 안에서 주님의 종의 운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Wolfgang Trilling, 앞의 책, 515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당신의 옷마저 빼앗기셨으며(루가 23,34;마르 15,24;마태 27,35) 마침내 마지막 남아있던 목숨까지 바치셨다. 이것이 “가난의 절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려는 바로 그 순간에, 최고의 가난의 모습이 되신 것이었다. 김보록, “복음적 가난”, 132면.
인간의 반신적(反神的)타락과 뿌리처럼 깊이 박힌 완악함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짊어지고 철저히 의식하고 체험하고 고난당함으로써 철저히 가난한 자의 모습을 취하셔야 했다. Romano Guardini, 앞의 책, 585면 참조.
예수의 죽음은 가난한 사람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한 결과이다. Gustavo Gutierrz, ꡔ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위력ꡕ, 김수복 옮김, 성요셉출판사,1987, 29면.
예수의 죽음이 띄는 영광스러운 변모를 잊지 말아야겠지만, 그 죽음의 비극적 성격은 예수께서 이 세상 사람 대다수가 겪는 볼품없고 난처한 모습의 죽음에 참여하신 것으로 보인다. Carlo M. Martini, 앞의 책, 273면.
돌아가신 뒤에는 자신의 몸을 뉘일 한 평의 땅도 없어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의 도움을 받아 무덤에 묻히실 수 있었다(루가 23,50; 마르 15,43-46; 마태 27,57-60). 정태현, 앞의 책, 76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