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의미를 풍요롭게 하는 승천

Ⅲ. 부활의 의미를 풍요롭게 하는 승천
현대인들에게 있어 예수의 승천에 대한 이해는 마치 신화적 사건 혹은 부활과는 다른 하나의 신비한 사건으로 오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이 엄청난 신비를 종말론적이고 구원론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한 출발점이 예수 승천인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 그들의 신앙을 증거하는 고백문에서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그분의 현양(승천)을 항상 언급하고 있고, 또한 시대를 거치면서 정착된 전례주년 안에서도 예수의 부활에 이어 그분의 승천 축일과 성령강림 축일을 지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부활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인상이나 신화적 요소를 나타내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예수 부활과 더불어 나타나는 그분의 현양의 고백과 전례적 기념은 부활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하고, 하느님 당신 사랑의 계시를 더욱 풍요롭게 느끼게 하는 길을 열고 있는 것이다.

1. 신앙 고백문에서의 이해
초대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음을 성서를 근거로 이해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부활 및 현양을 근거로 하여 획득하신 이 구세사적 의의를 성서는 예수를 ‘퀴리오스’(Kyrios), 즉 ‘주님’으로 고백하는 가운데 표현한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고백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초대교회(初代敎會)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떠맡고 있었다(로마10,9; 1고린12,3; 필립2,11). 이 칭호는 부활하시어 하늘로 현양되신 분이 그 곳에서 발휘하게 된 권세를 표현하고 있다.” W. Kasper, 271-272면; 초대 교회는 오랫동안 아라메아어의 고대 기도문인 ‘마라나타’(Marana tha) 즉 ‘우리 주여, 오소서!’를 사용했다(1고린16,22; 묵시22,20). 그리스도교 초창기의 신앙 고백, ‘예수께서는 주님이십니다’(로마10,9; 1고린12,3; 골로2,6)는 부활의 사건과 구약 성서를 오랫동안 묵상한 끝에 얻어진 것이다. P. Ternant, et al., “주(主),”『성서신학사전』(광주: 광주가톨릭대학전망편집부, 1984), 544-545면 참조.
이에 대해 발터 카스퍼(W. Kasper)는 “바오로는 이 ‘퀴리오스’라는 말로써 현양되신 분으로서 현존하시는 주님을 명백하게 가리키고 있다. 이 표상에는 두 가지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는 현양되어 하느님 곁에 계시며 동시에 그분은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말씀과 성사(聖事)로 교회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W. Kasper, 앞의 책, 273면.
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초대교회의 신앙 고백에서 현양되신 그리스도, ‘하늘에 올라’(승천) 우주 만물의 지배권을 가지시고 현재 우리와 함께 현존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트 카스퍼(W. Kasper)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신앙고백의 이와 같은 우주론적이며 원초론적(原初論的) 설명은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종말론적 성격에서 사리적(事理的)으로 연역되는 당연한 결론이다. 그분 안에서 역사의 완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일체의 만물이 그 충만한 완성을 찾아 얻는 목표에 이르게 되었다면, 달리 말하면, 그분과 함께 구원이 왔다면, 그것은 오로지 일체의 만물이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와 그분의 업적에 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긍정적 응답은 동시에 일체의 실재에 대한 남김 없는 긍정이요 세상의 구원이다.” 위의 책, 273-274면.

이제 보다 구체적인 신앙고백문을 통한 예수 승천의 의미를 살펴보자. “성서에서 볼 수 있는 초대교회의 최초 신앙 고백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사도2,36; 10,36; 골로2,6 참조), ‘예수는 주님이시다’(1고린12,3; 로마10,9; 사도2,36; 필립2,11 참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사도9,20; 13,13; 로마1,4; 히브4,14 참조) 라는 세 개의 간결한 신앙 고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간결한 신앙 고백은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론적이고 삼위일체론적 신앙고백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The earliest of faith in the apostolic Church is Christological. It is expressed in three concise formuas: ‘Jesus is the Christ’ (cf.Acts2.36; 10.36; Col.2.6); ‘Jesus is the Lord’ (1Cor.12.3; rom.10.9; cf. Acts2.36;Phil.2.11); ‘Jesus is the Son of God’ (cf.Acts9.20; 13.33; rom.1.4; Heb.4.14).” J. Neuner & J. dupuis (Eds), op. cit., p.1.
사도들의 권위를 담고 있다고 전해지는 ‘사도신경의 삶의 자리는 아마 초대교회의 세례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예비자 신자의 세례식때 그들의 신앙을 문답형식으로 고백하게끔 한 후 세례를 주었다. 2세기말과 3세기초에 신앙 고백의 핵심을 내용으로 한 세례 장면을 묘사한 자료. “세례를 받게 된 자가 물에 내려갈 때, 세례를 베푸는 자는 그에게 손을 얹고 말한다. ‘ 너는 전능한 아버지 하느님을 믿느냐?’ 그러면 세례 받는 자는 말해야 한다. ‘나는 믿는다.’ 세례 베푸는 자가 손을 얹은 이후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는 묻는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고,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아래 죽으셨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올라가 하느님 우편에 앉으셨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너는 믿느냐?’ 그가 ‘나는 믿는다’고 말할 때 두 번째 세례를 받게된다. 그리고 다시 세례자는 묻는다. ‘너는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육의 부활을 믿느냐?’ 세례받는 자는 ‘나는 믿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세 번째로 세례를 받는다”(Kelly, S.51). J. M. Lohmann,『사도신경 해설』, 오영석(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22면 재인용.

교회역사 안에서의 많은 신앙 고백문 히뽈리투스의 사도적 전승(215-217년경)(DS 2), 성 암브로시오(397년 사망) 신경(DS 3), 루피누스 신경(404년경)(DS 4), 로마 세례 예식서의 신경(DS 5), 에우세비오 신경(325년경)(DS 6), 니케아 신경(325년)(DS 7), 예루살렘의 치릴로 신경(348년겅)(DS 9), 에피파니우스 신경(374년)(DS 10), 콘스탄티노플 신경(381년)(DS 12), 제4차 라테란 세계 공의회 라테란 신경(1215년)(DS 20) 등에서 모두 ‘예수의 부활’과 함께 ‘예수의 승천’을 신앙 고백문에 넣고 있다. J. Neuner & J. Dupuis, op. cit., pp.2-11 참조.
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함께 고백하거니와 사도적 권위를 가진 사도신경 성서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론적이며 그리스도론적인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4세기에 성 암브로시오와 루피누스가 명명한 것으로 오늘날 사용하는 사도신경의 표준문(textus recptus)이 나오게 된 것은 7세기경이며, 로마를 뺀 다른 서방교회에서 먼저 썼다. 10세기말이나 11세기초까지 로마에선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사용하다가 교황 인노첸시오 3세(1216년)가 바로 사도신경을 서방교회의 공식 신경으로 공인하였다. 하성호,『나는 믿나이다: 사도신경 해설』(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15-16면 참조.
에서도 예수의 승천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의 승천 사화는 분명히 루가 복음사가에 의해 그 공동체의 교육의 필요성을 위해 기록된 것이라면 왜 초대교회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신앙 고백문에 오해의 여지를 가진 이 부활의 표징을 사용하는가?
이는 분명히 예수의 승천 사실이 루가 전승이 전하는 단순한 교육적 효과를 위한 상징적 의미 이상을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 현세의 인간은 분명히 예수의 부활을 유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가운데 초대교회에서부터 이어오는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예수의 현양(승천)에 대한 신앙 고백은 부활의 의미를 분명하고도 풍부하게 전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이 처음부터 하느님이셨기 때문에 지상에 파견된 자신의 일을 성공리에 끝마치시고, 원래 자신이 계셨던 그곳에 영광된 모습으로 되돌아가신다는 사실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그리스도론적인 신앙고백이다.” 위의 책, 122면.
또한 이 신비의 고백은 시․공간의 지배를 초월하여 신(神)적 세계에 들어 가셨다는 말이며, 이를 통해 종말론적 시간 개념, ‘이미’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였음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세계의 구원론적이며 종말론적인 위치를 이해하게 한다. 다시 말해 “예수 승천의 신앙고백은 부활의 신비를 심도 있게 확장시켜주는 표현이다. 그래서 예수의 승천 신비는 예수님을 둘러싼 구원 사건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아야지 결코 승천을 따로 떼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위의 책, 123면.
결국 신앙고백문에서 말하는 예수 승천은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이해에 관한 것이며, 신적 차원에 계신 우주의 지배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승천 신앙고백은 역시 부활 신앙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바로 부활하신 그분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부활의 신비를 한층 더 깊고 가까이 다가오게끔 한다. 부활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면, 또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이어오는 예수 승천에 대한 신앙고백이 왜 빠질 수 없이 중요한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부활과 승천의 신앙 고백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왜곡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종말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사건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식의 차이에 구속되지 않고 보다 심오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2. 전례주년에서의 이해
교회는 일년을 주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중심으로 전례주년을 지내고 있다. 전례헌장 5장 102항 : I. H. Dalmais & P. Jounel,『전례주년』, 김인영(역) (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6), 1-8면 참조.
이 전례주년 발전 과정에서도 가장 중심일이 되었던 빠스카 시기 우리 나라 미사 경본에는 부활시기라고 번역되어 있어나, 이 명칭은 자칫 빠스카라는 말을 부활 사건에만 국한시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라틴어 원문에 따라 이를 ‘빠스카 시기’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위의 책, 63면, 주66.
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빠스카 주일(예수부활 대축일)로부터 시작하여 오순절(성령강림 대축일)까지의 50일간의 시기 위의 책, 63-64면 참조.
중 승천 대축일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전례주년은 신앙 고백문 보다 한층 더 승천을 강조하고 있는 듯 보인다. 즉, 빠스카 시기는 루가 전승의 사도행전의 내용을 그대로 적용한 듯한 인상을 준다. 상징과 표징으로 이해하였던 40일(승천일)과 50일(성령강림일)이 전례주년에서는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는 전례력이 교회에 완전히 자리잡기 이전, 빠스카 시기를 중심으로 전례주년이 발전하고 있을 때 그 기원을 살펴 볼 수 있다. “5세기에 교부들은 서로 비슷한 견해들을 견지하고 있었지만, 변함없이 거행되어 왔던 빠스카 신비 전례는 이 시대에, 부활과 주님의 승천,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리심을 주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지내고자 원한 백성의 심리적 요구에 부분적으로 자리를 양보하였고, 이러한 전례는 조금씩 사도행전의 연대순에 따라 형성되었다.” 위의 책, 64면.
또한 전례주년의 전반적인 이해를 위해 피터 폴 카스퍼(P. Paul Kasper)신부는 “전례의식에 대한 성서구절과 표징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처럼 매년 반복하는 축일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 Paul Kasper,『전례와 표징』, 허인(역)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89), 16면.
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례주년 자체가 상징성과 표징성을 통해 현재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성서의 상징적 내용에 대한 전례주년에서의 적용은 이해 될 수 있다. 사실, 전례주년 안에서 승천축일과 성령강림축일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두 축일에 대한 역사적인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교부들의 문헌과 교회사를 살펴 볼 때’ I. H. Dalmais & P. Jounel, 앞의 책, 64-74면 참조.
우리는 그 기원이 초대교회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티칸의 경신성사성(敬神聖事省) 고문으로 있는 피에르 쥬넬(P. Jounel)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주의 승천과 성령의 파견을 빠스카 시기의 마지막 날에 함께 지내고 있을 때 대부분의 교회들은 사도행전이 제시하고 있는 그날들에 이 두 신비를 따로 경축하였다. 이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승천 축일을 오래되고도 보편적인 축일로 여겼다. 성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승천 축일은 빠스카와 성령강림 축일과 마찬가지로 전세계에서 경축되고 있으며, 사도적 기원을 가졌다. 이들 교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후대인 4세기 말에 이 축일이 퍼져나갔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가 이 축일의 확산에 얼마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아무튼 『아르메니아 독서집』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축일은 420-430년 사이에 예루살렘에 정착되었다. …. 성령강림 축일이 성령이 사도들에게 오심과 교회가 선교를 시작한 것을 기리는 축일이라는 기술은 서방 교회에서는 성 아우구스띠노와 성 레오 대교황의 강론들 안에, 동방 교회들에서는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와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강론들 안에 나타나고 있다. 성령강림 축일이 (성령강림이라는) 일정한 사건을 기념하는 동시에 적어도 서방 교회에서는 4세기 말 빠스카 성야에 세례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교 입교성사를 거행함으로써 빠스카의 성대함을 반복하게 되었다. 성 레오 대교황이 이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바, 그의 강론들에서나 시칠리 조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위의 책, 67-68면.

결국, 전례주년에서도 빠스카시기를 통해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이 하나의 신비 안에 드러남을 볼 수 있게 한다. 즉, 하나의 빠스카 사건을 여러 측면에서 나누어 그 신비의 의미를 더욱 깊이 확장시키고 있다. 특히, 전례주년에서는 우리에게 예수의 부활 이후 승천의 기간까지 부활의 기쁨과 그 체험을 묵상케 함으로써 부활 신비를 더욱 심오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 승천 축일을 통해, 또 성령강림 축일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2천년 전의 신비한 한 사건으로 국한시킴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계심을 느끼게 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전례주년을 통해 예수의 승천이 예수 부활이라는 초월적이고 종말적인 하느님 구원 행위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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