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중심적 하느님 이해-칼 라너의 초월신학적 하느님 이해(하)

 

라너는 개별대상의 유한성을 비로소 인식하도록 아는 지평자체도 대상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그 속에서 나타나는 형식과 같이 참으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 추상된 형식은 판단의 술어, 빈사(賓辭) 내용이고 대상의 제한성은 이 빈사형식으로부터 인식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의 유한성이 인식되게 하는 지평 자체도 당연히 현존해야 한다고 보고, 이 전취의 지향점이 바로 존재(存在, das Sein)라고 규정한다.2) 인간의 주체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초월적 전제인 전취는 바로 무한한 존재를 지향하는 전취라는 것이다. 라너에 의하면 존재를 지향하는 이 전취가 인간이 필연적으로 제기하는 존재일반에 대한 질문 속에서 발생한다. “이 전취는 존재를 지향한다. 이 전취의 폭은 단순히 감각 속에서 표상될 수 있는 것의 총체성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적 비제한성 속에서의 존재 바로 그것이다.”3) 여기서 뜻하는 존재의 부정적 비제한성이란 말은 전취의 지향점으로서의 존재가 유한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요컨대, 라너는 인간의 존재일반의 질문 제기 속에서 인간이 존재에 대하여 주제적이고 명시적 지식은 아니나, 비주제적이고 함축적(含蓄的)인 선험적 지식을 가진다고 본다. 그 어떤 면에서도 전적으로 미지의 것에 대해서는 도대체 질문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선험적 지식을 부정할 경우에는 의심할 수 없이 명백한 질문제기 현상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모순(矛盾)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존재질문 제기현상은 인간의 개별적인 인식과 의지의 주체작용은 선험적으로 소여된 존재의 지평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울러 시사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실재들을 유한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그가 존재의  지평 안에서 이들을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라너는 전취의 지향점으로서의 존재는 유한한 존재자의 부정 속에서 추후적으로 반성된다고 본다. 여기서 인간이 절대존재에 이를 수 있는 통로는 그가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는 유한한 존재자의 부정을 통해서만 주어져 있다. 인간은 유한한 대상에 항상 내포되어 있는 제한성 내지 부정성을 전취 속에서 명시적으로 만듦으로써만 절대존재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는 개별 존재자는 전취가 지향하는 절대폭을 채우지 못하는 속에서 유한한 것으로 인식되는 가운데, 전취의 지향점으로서의 존재가 절대폭을 남김없이 채움으로써 동시에 함께 인식된다는 말이다.


라너는 인간의 매 주체작용 속에서, 존재를 지향하는 전취 속에서 절대존재로서의 하느님의 존재가 함께 긍정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식의 필연적이고 따라서 항상 이미 성취된 조건으로서 이 전취 속에… 절대존재의 실존이 함께 긍정되고 있다. 가능한 대상으로서 전취의 폭에 맞닿을 수 있는 것이 함께 긍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존재가 전취의 폭을 남김없이 채울 것이다. 이러한 의미,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말할 수 있다. 전취는 하느님을 지향한다.”4) 라너는 절대존재로서의 하느님의 존재가 전취의 폭을 통하여 함축적으로 함께 긍정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전취가 하느님을 지향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실존은 인간이 세계 안에서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유한한 존재자들을 파악하는 가능성의 조건으로 요청된 것이다. “한 존재자의 현실적 유한성의 긍정은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절대존재의 실존의 긍정을 요청한다. 이 긍정은 이미 유한한 존재자의 제한성을 인식케 하는 존재로서의 전취 속에서 생기고 있다.”5)


라너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자들을 존재의 지평 안에서만 인식하기 때문에 동시에 절대존재인 하느님께 항상 개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인간)는 이것을 명시적으로 알고 있거나 모르거나,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상간없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도상에 있으므로서 비로소 인간이다. 그는 항상 하느님께 무한하게 개방되어 있는 유한자이다.”6)


요컨대, 라너는 인간이 매주체행위 속에서 지햔하는 지평으로서 절대존재가 인간정신의 본질인 전취의 폭을 남김없이 채운다는 점에서 이 절대존재인 하느님이 인간의 주체행위가 성취되는 속에서 함께 긍정된다고 보고,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을 ‘하느님 지향의 초월’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라너에게서 인간이 세계 안에서 만나는 모든 존재자들의 유한성을 부정하면서 유한성의 피안을 지향하는 가운데에서만 무한성 속에서의 하느님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무한성 자체는 인간의 유한한 정신에 은폐되어 머문다.7)




인간학적 전환을 이룩한 근세의 형이상학적 사상가들이나 현대의 초월신학자들 사이에 표현의 차이, 강조점의 이동 등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동일한 원리가 작용한다. 이들의 하늠에 대한 물음은 고대의 신화론적 및 중세의 우주론적 사고에서처럼 객관적 실재세계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실재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된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현존하는 한 하느님이 이 현존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파악되고 인간의 심층적 소인으로 규정된 것이다. 이들에게서 하느님은 더 이상 세계 위에 군림하는 절대지배자(고대 신화론적 신관)도 아니요, 세계 피안자로서의 초월자(중세 우주론적 신관)도 아닌 인간의 심층적 소인으로서 인간 안에서의 초월자(내 안에서의 하느님)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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