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여섯 번째 공의회〔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680~681년〕: 에집트에서 단성론을 지지하는 자들을 다시금 교회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세르지우스(Sergius)는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고자 시도하였다. 세르지우스는 두 본성의 합일 대신 의지의 합일을 주장하였다. 즉 인성과 신성 두 본성은 내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이 결합으로부터 신인의 에너지가 유출된다는 것이었다(Monoenergismus). 이로써 세르지우스는 다수의 단성론자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그의 주장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세르지우스는 교황 호노리오(Honorius) 1세에게 선처를 호소하였으나, 교황은 그리스의 신학에 대해서는 별로 정통하지 못하였다. 교황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물리적인 결합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의지와 신적인 의지가 도덕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Monotheletismus).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세르지우스는 하나의 신앙 정식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은 ꡒ그리스도 안에는 오로지 하나의 의지, 즉 신적인 의지만이 존재한다ꡓ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내용은 단성론자들을 의식한 것으로서 단일 유출설로부터 단의론으로 변모되었다.
만일 의지의 결합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이단을 주장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680년 11월부터 691년 9월까지 개최되었던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단의론을 단죄하였고, 이 이단을 지지하는 자들은 직책을 박탈당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파문당하였다. 이 파문에는 교황 호노리오 1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 레오 2세는 이 파문의 결정을 승인하였다. 교황 레오 2세는 교황 호노리오 1세가 교황권에 대한 사도적인 전통을 부정했다고 비난하였다. 나중에 교황 호노리오 1세는 ꡒ이단의 불길을 지핀 것이 아니라, 단지 태만으로 이단을 두둔하였다ꡓ고 함으로써 자신의 비난을 약간 완화시켰다. 교황 호노리오 1세의 결정이 야기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호노리오 문제」를 참조하라.
(7) 일곱 번째 공의회〔제2차 니케아 공의회, 787년〕: 8세기의 교황들은 비잔틴으로부터 등을 돌려 프랑크(게르만) 족으로 방향을 돌렸다. 동서 교회의 분리는 교회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장악하기를 원하였던 동로마 황제가 취한 교회 정치적인 조치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황제 레오(Leon) 3세가 726년 성화 공경을 금지시키는 칙령을 반포함으로써 동서 교회의 대립은 첨예화되었다. 성화 공경 금지에는 그리스도의 성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들은 성화 공경의 금지에 항의하였다. 하지만 교황들은 동방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항의는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7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최되었던 주교 회의는 성화의 공경을 우상 숭배나 다름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가 죽은 후 그의 미망인 이레네(Irene) 황후가 나이 어린 아들 대신 섭정을 맡음으로써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황후 이레네는 성화 공경을 다시금 허용하였고, 785년에는 그사이 단절되었던 로마와의 관계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이레네는 교황 하드리아노(Hadrian) 1세의 동의하에 786년 여름에 개최되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하지만 공의회가 개최되자마자 군인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해산되었기 때문에 787년 니케아로 장소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황후 이레네는 친서를 보내어 교황 하드리아노 1세를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하였다. 교황은 2명의 특사를 파견하였고 공의회의 결정들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공의회를 보편 공의회로 선언하였다. 공의회의 결정은 오로지 하느님에게만 적용되는 ꡐ흠숭ꡑ과 피조물에게 적용되는 ꡐ공경ꡑ을 분명하게 구별하였다. 성화의 의미는 성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화가 묘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 또는 성인들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는 것이다.
황제 칼 대제는 공의회에 초대를 받지 못하였다. 칼 대제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무시라고 느꼈다. 그래서 칼 대제는 794년 프랑크푸르트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칼 대제는 이 시노드를 ꡐ공의회ꡑ라고 명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특사가 파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크푸르트 시노드는 단지 프랑크 제국의 시노드로 머물고 말았다. 칼 대제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과 관련해서 원문 대신 번역본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 번역본은 ꡐ숭배ꡑ(Adoratio)라는 단어를 ꡐ흠숭ꡑ(Anbetung) – 숭배는 ꡐ흠숭ꡑ과 ꡐ공경ꡑ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dT다. 그런데 번역본은 ꡐ공경ꡑ의 의미를 배제하고 ꡐ흠숭ꡑ으로만 번역하였다 – 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칼 대제는 공의회의 결정에 저항하였다. 하지만 칼 대제의 저항은 겉으로는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으나, 사실은 비잔틴에 항의하는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8) 여덟 번째 공의회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869~870년〕: 비잔틴을 둘러싼 또 다른 논쟁거리가 여덟 번째의 보편 공의회를 소집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858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이냐시우스(Ignatios)가 퇴위하였다. 이냐시우스의 자리를 포시우스(Photios)가 계승하였다. 교황 니콜라오(Nikolaus) 1세는 이냐시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농간으로 포시우스를 파문시키고 이냐시우스를 다시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로 복직시켰다. 하지만 교황의 이러한 조치는 기만당한 상태에서 취해진 것이었다. 즉 이냐시우스는 자발적으로 물러났으며, 포시우스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출되었고, 그의 선출은 교황에게도 보고되었다. 이 사안을 올바로 해명하기 위해 포시우스의 요청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였던 교황의 특사들도 861년에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포시우스의 선출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니콜라오 1세는 기만당하여 포시우스를 파문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867년 비잔틴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는 교황 니콜라오 1세의 퇴위를 선언하고 파문시켰다(하지만 교황은 이미 867년 11월 13일 서거하였으므로 이 소식을 접하지 못하였다). 그사이 비잔틴에서는 황제의 교체가 있었다. 새로 즉위한 황제는 포시우스를 추방하고, 이냐시우스를 다시 복직시켰다. 황제의 이러한 결정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시노드가 소집되었고, 여기에 교황도 참석하도록 초대받았다. 이것이 바로 여덟 번째의 보편 공의회, 즉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이다. 이 공의회는 포시우스의 퇴위를 추인하였고, 서방 교회와의 일치를 회복시켰다. 이 공의회는 869년 10월부터 870년 2월까지 개최되었고, 포시우스는 어느 수도원에 추방되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머물렀다.
(9) 아홉 번째 공의회〔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 1123년〕: 이른바 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논쟁은 독일과 교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독일의 황제들과 영주들 – 평신도로서 – 은 주교들이나 수도원장들을 교회의 직책에 임명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교황들은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수의 독일 주교들은 황제의 편에 가담하였다. 이렇게 해서 황제들은 파문되거나 퇴위되었으며,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기도 하였다. 교황들 역시 퇴위의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대립 교황이 선출되는 일이 되풀이되곤 하였다.
황제 하인리히 5세는 성직 임명권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였고, 자신의 대 교회 정책과 관련해서 독일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에 직면하여 로마와 교섭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의 특사가 독일로 파견되었고, 1122년 12월 하인리히 5세와 ꡐ보름스 조약ꡑ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 조약을 통해 황제는 성직 임명권을 포기하였고, 주교의 자유로운 선출을 보장하였다. 그 대가로 황제는 파문의 철회를 요구하였다 이로써 교황과 국가의 최고 책임자 사이에 최초로 공식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성대하게 선포하기 위해 교황 갈리스토 2세는 1123년 3월 로마의 라테라노에서 아홉 번째의 보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300명 이상의 주교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ꡐ보름스 조약ꡑ을 승인하였다. 라테라노 공의회는 서방 교회에서 개최된 최초의 공의회였다.
공의회는 ꡐ보름스 조약ꡑ의 승인 이외에 사제 결혼과 성직 매매를 금지하는 규정과 로마 순례자를 보호하는 규정,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는 자들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규정도 반포하였다. 또한 교황은 공의회를 통해 975년 서거한 콘스탄츠의 주교 콘라트(Konrad)의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공의회는 4월 6일 폐회하였다.
(10) 열 번째 공의회〔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 1139년〕: 그 당시 자주 그러했던 것처럼 교황 호노리오 2세의 서거(1130년) 후 이중의 선거가 발생하였다. 몇몇 추기경들은 부제 추기경 그레고리오 – 인노첸시오 2세 -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추기경들 – 이들은 그레고리오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은 같은 날 사제 추기경 피에를레오네(Pierleone) – 아나클레토(Anaklet) 2세 – 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로마의 성직자들과 백성 대다수는 피에를레오네의 선출에 찬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짧은 시간 내에 로마에서는 2명의 교황이 선출되었다. 어떤 선출이 유효한가? 교황 아나클레토는 로마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 인노첸시오는 프랑스로 도피해야만 하였다.
인노첸시오는 베르나르도와의 우정을 토대로 프랑스에서 교황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영국과 스페인도 인노첸시오를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아나클레토는 독일의 왕 로타르(Lothar) 3세에게 자신을 교황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1130년 뷔르츠부르크에서 개최된 시노드는 인노첸시오를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그사이 아나클레토는 로마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굳혔다. 그래서 로타르 3세는 1133년 5월 인노첸시오와 함께 로마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아나클레토는 레오 시, 천사의 성 그리고 베드로 대성전을 장악하고 있었다. 후에 로타르 3세가 독일로 귀환하자 인노첸시오는 더 이상 로마에 머물 수 없어 피사로 갔다. 이렇게 분열은 계속되었다.
1138년 1월 25일 아나클레토가 서거하였고, 빅토리오(Victor) 4세 교황이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교황 빅토리오 4세는 1138년 5월 28일 인노첸시오에게 굴복하였다. 이러한 분열을 초래한 원인을 공의회를 통해 해소해야 할 필요성도 대두되었다. 1139년 라테라노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고, 이 공의회는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되는 셈이었다. 아나클레토를 지지하던 자들은 추방되거나 아니면 직위를 박탈당하였다. 아울러 공의회는 성직 매매와 사제 결혼을 금지하는 일련의 개혁 법령을 반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