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공의회(19-21) Allgemeine

   (19) 열아홉 번째 공의회〔트리엔트 공의회, 1545~1563년〕: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대사에 관한 95개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다. 1520년 6월 15일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 대한 파문 위협의 칙서에 서명하였고, 1521년 1월 3일 실제로 파문의 처벌을 내렸다. 이로써 독일은 종교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분열의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1524년 뉘른베르크(Nürnberg)의 제국 의회에 참석하였던 독일 제국의 대표들은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황제 칼 5세는 공의회의 개최 장소로 독일의 제국에 속하는 트리엔트(Trient)를 원하였다. 하지만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콘스탄츠 공의회와 바젤 공의회의 결정을 근거로 공의회의 소집을 방해하였다.

  1527년 황제 칼 5세는 교황에게 재차 보편 공의회의 소집, 교회의 개혁과 분열의 극복 등을 위한 자신의 구상을 심어 주려고 시도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29년 11월 5일 직접 황제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공의회 개최를 거부하는 태도를 고수하였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제국 의회에서 시도되었던 황제의 조정 노력도 실패하였다. 황제는 거듭 교황에게 공의회의 소집을 촉구하였고, 만일 공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경우 야기될 위기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후임자 바오로 3세는 전임자와는 다르게 반응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는 즉위 후 즉시 공의회의 소집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였고, 1535년 초부터 자신의 공의회 소집 계획을 실현시키려고 모색하였다. 그 결과 1536년 만토바(Mantua)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1537년에는 비첸차(Vicenza)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그 당시의 정치적인 여건 때문에 개최되지 못하였다. 더 나아가 두 번에 걸친 공의회 소집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아무도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개신교의 제후들도 공의회의 참석을 거부하였다. 마침내 1539년 공의회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1541년 교황과 황제의 만남이 있었을 때 황제는 공의회의 개최 장소로 트리엔트를 제안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는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1542년 11월 1일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1542년 여름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기 때문에 공의회의 소집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래서 교황은 1543년 9월 29일에 공의회의 소집을 취소하였고, 1544년 공의회의 소집 취소를 철회하여 1545년 3월 15일을 공의회 개최 일자로 확정하였다. 하지만 이날 교황에 의해 파견된 2명의 특사 이외에 아무도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결과 공의회는 사실상 1545년 12월 13일에 개회하였다. 4명의 대주교, 21명의 주교 그리고 5명의 수도회 장상들이 참석하였고, 그 다음해 여름에 참석자의 수는 66명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1/3이 이탈리아 사람들이었다.


  첫 번째 회기는 1545년 12월 13일부터 1547년 6월 2일까지 계속되었다. 황제 칼 5세의 의견에 반하여 공의회는 신앙의 문제와 개혁의 문제를 동시에 다루고자 하였다. 네 번째의 회기에서는 신앙의 원천에 대한 교령이 논의되었고, 다섯 번째 회기에서는 원죄에 관한 교령을 심의하고 통과시켰으며, 여섯 번째 회기에서는 의화에 관한 교령을 통과시켰다. 특히 의화에 관한 교령에 대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그 결과 공의회가 통과시킨 교령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교령으로 자리 잡았다. 이 회의 기간 동안 개혁에 관련된 제안도 다루어졌다. 특히 주교들의 정주 의무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아울러 성사 일반론과 세례성사 그리고 견진성사에 대해서도 논의되었다.


  1547년 초에는 공의회의 장소를 볼로냐로 옮겼다. 왜냐하면 트리엔트에는 발진티푸스가 확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의회 장소를 옮기는 데 있어서 또 다른 이유도 작용하였다. 교황은 황제의 세력권으로부터 공의회를 분리시키기를 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 바오로 3세는 1547년 3월 1일 2/3 이상의 찬성을 얻어 공의회의 장소를 옮기기로 한 결정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개신교가 교회 국가의 도시에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트리엔트로 귀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교황은 황제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공의회 스스로 장소의 이동을 결정해야 하고 또 실제로 결정했다고 주장하였다.


  그사이 볼로냐에서는 성찬 전례,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그리고 혼인성사에 대한 심의를 계속하였다. 아울러 미사 성제, 연옥 그리고 대사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1549년 9월 13일 교황 바오로 3세는 공의회를 휴회시켰고, 1549년 11월 10일에 서거하였다. 그의 후임자 율리오 3세(1550~1555년)는 공의회의 장소를 다시금 트리엔트로 옮겼다. 1551년 3월 1일 공의회는 성대하게 개회되었다. 1551년 말경 그리고 1552 초에는 개신교의 제국 대표들이 보낸 특사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이들은 지금까지 공의회가 신앙의 문제와 관련해서 결정한 내용을 취소시킬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들의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 볼로냐에서 통과시킨 성사론에 관한 교령이 발표되었고, 주교들의 직무 수행과 성직자들의 생활에 관한 개혁 교령도 발표되었다.


  1552년 4월 28일 공의회는 정치적인 이유로 다시금 휴회되었다가 1562년 속개되었다. 그사이 교황 율리오 3세를 비롯하여 그의 후임 교황 마르첼로(Marcellus) 2세와 바오로 4세도 서거하였다. 교황 비오 4세(1559~1565년)가 공의회를 계속하였고, 1562년 1월 18일에 109명의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의회는 속개되었다. 3월 11일 주교들의 정주 의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의견이 분분하였고, 그 결과 공의회는 오랫동안 휴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교황 비오 4세는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금지시켰다. 그 밖에 나머지 성사에 대한 교령이 통과되었고, 동시에 개혁 교령이 반포되었으며, 사제 독신제의 폐지에 대한 요구는 거부되었다.


  1562년 9월 17일부터 시작된 스물두 번째의 회기는 여러 교구에서 발생하고 있는 불공정한 관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주교의 정주 의무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으나, 대결 양상이 너무 격렬하여 공의회의 폭발을우려할 정도였다. 이러한 대결은 결국 교황과 공의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의 새 의장 모로네(Morone)는 쟁점으로 부각한 사안에 타협안을 제시하여 공의회의 격렬한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주교직에 대한 개신교측의 주장은 거부되었다. 이 회기(스물두 번째)는 주교들에게 각자의 교구 안에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의 설립을 의무적인 사항으로 부과하였다. 스물네 번째 회기에서는 연옥, 대사 그리고 성인 공경에 관한 교령을 통과시켰다. 다수의 개혁은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었다. 특히 미사 전례서, 성무 일도의 개혁과 표준 교리서의 출간 문제 등이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었다. 공의회의 참석자들은 미해결된 문제를 교황에게 위임하였다. 1564년 1월 26일 교황 비오 4세는 공의회가 통과시킨 교령을 승인하였다. 교황은 모든 주교들과 수도원의 장상들에게 트리엔트 신앙 고백을 종합하는 과제를 부과하였다.


  공의회는 황제 칼 5세가 의도하였던 계획, 즉 신앙 안에서의 재결합이라는 계획을 실현시키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공의회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앙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 지었다. 1565년 12월 9일 교황 비오 4세는 서거하였다. 그의 후임자 비오 5세는 공의회의 결정 사항인 표준 교리서(1566년), 수정된 성무 일도(1568년) 그리고 수정된 미사 전례서(1570년)를 반포하였다.


  (20) 스무 번째 공의회〔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65~1870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거의 300여 년 동안 공의회는 개최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 비오 9세가 1864년 12월 6일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를 밝혔을 때 추기경들은 당황하였다. 추기경단의 모든 구성원들은 비밀리에 공의회의 소집 계획을 검토하여 각자의 의견을 교황에게 통보해야만 하였다. 1865년 초 공의회에서 논의될 주제들을 미리 검토하기 위한 목적으로 5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1867년 6월 26일 공의회의 소집이 공개적으로 발표되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에 모였던 약 500여 명에 이르는 주교들은 공의회가 일치와 거룩함 그리고 평화에 기여하였으면 하는 기대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교황 비오 9세는 주교들의 기대에 대한 응답으로 공의회를 마리아의 각별한 보호 아래 소집할 것을 약속하였다.


  1868년 6월 29일, 공의회는 공식적으로 소집되었고, 동방의 갈라진 교회들도 공의회에 초대되었다. 교황은 공의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과제로서 가톨릭 교회가 가톨릭의 진리의 계시에로 응집되어야 하며, 교회의 모든 규정은 변화된 시대의 상황에 적응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공의회 개회 벽두부터 교황의 무류성 문제를 둘러싸고 대단한 대결 상황이 벌어졌다. 한편에서는 무류성에 대한 정의를 기대하였고, 다른 편에서는, 특히 독일의 다수의 신학자들은 무류성에 대해 격렬하게 반론을 제기하였다.


  1869년 여름에 독일의 주교들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의도로 사목서한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독일 제국의 정부마저도 이 논쟁에 휘말려 들었다. 1869년 12월 8일에 공의회는 베드로 대성전에서 성대하게 개회되었다. 공의회 개회 초기에는 642명이 참석하였으나, 곧 700명 이상으로 참석자의 숫자가 늘어났다. 이로써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공의회 역사상 참석자의 숫자가 가장 많은 공의회로 기록되고 있다. 독일로부터는 20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이들 가운데 15명은 이른바 소수파에 속하였다. 이들 소수파들은 교황의 무류성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은 그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1869년 12월 중순부터 1870년 1월 중순 사이에 공의회의 참석자들은 4명의 특별 위원을 선정하였다. 즉 신앙의 문제, 교회 규정의 문제, 수도회 문제 그리고 동방 전례와 선교에 관한 문제를 위한 4명의 특별 위원을 선정하였다. 이들 특별 위원들에게는 총회에 제출하기 위한 초안의 작성이라는 과제가 위임되었다. 공의회 개최 이전에 이미 51개의 교령 초안이 작성되었으나, 그 가운데 단지 2개의 초안만이 통과되었다. 즉 가톨릭 신앙과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초안만이 통과되었다. 이 두 초안의 통과는 물론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하였다.


  1870년 1월에 380명의 참석자들은 교황의 무류성에 관한 가르침을 초안에 삽입할 것을 제안하였다. 3월 6일에 이 제안에 대한 토론이 있었고, 소수만이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토론의 진행 중에 로텐부르크의 주교 헤펠레(Hefele)는 ꡐ호노리오 문제ꡑ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하였다. 교황의 무류성에 관한 안건을 표결에 부친 결과 대다수의 찬성을 얻었다. 1870년 6월 13일의 표결에서 451표가 찬성, 62표가 조건부 찬성, 그리고 88표가 반대로 나타났다. 이러한 표의 차이는 1870년 7월 18일에 있었던 네 번째 회기에서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무류성에 관한 표결의 결과는 553표가 찬성, 2표가 반대로 나타났다. 물론 반대자 57명은 표결 전에 이미 교황의 허락을 얻어 공의회를 떠났다. 하지만 이들 반대자들도 나중에는 공의회의 결정에 승복하였다. 예를 들어 마인츠의 주교 케틀러(Ketteler)는 공의회를 떠나기 전 교항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공의회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공의회는 교황의 무류성에 관한 문제를 확정지었다. 교황의 권한은 신앙, 윤리 그리고 교회의 지도 문제와 관련해서 전체 교회에 행사하는 직접적이고 최고의 권한이라는 것이었다(이것은 다분히 갈리아주의와 페브로니우스주의를 겨냥한 것이었다). 아울러 교황이 사도좌에서 발언할 때, 즉 교회의 목자와 교사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교회의 신앙과 윤리에 관련된 가르침을 규정할 경우 교황은 베드로에게 약속된 무류성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무류성에 관한 이러한 정의는 전체 교회의 동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불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이로써 갈리아주의를 거부한다).


  1870년 7월 19일에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주교들은 귀환을 서둘렀다. 그 이외에 프랑스의 수비 군대가 로마로부터 철수하였고, 피에몽(Piemont)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였다. 1870년 10월 26일 교황은 공의회는 적절한 시점에 이르기까지 연기된다고 발표하였다. 외부의 사정으로 불가피하게 공의회가 폐회됨으로써 공의회는 중요한 안건과 초안(49개)을 더 이상 다루지 못하였다.   


  (21) 스물한 번째 공의회〔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85년〕: 교황 요한 23세는 1959년 1월 25일의 추기경 회의에서 – 그는 1958년 11월 4일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 자신의 재임 기간 중 해결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보편 공의회의 소집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것은 대단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결코 종결되지 않았고, 정치적인 이유로 연기되었을 뿐이었다. 공의회의 소집 예고는 일치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는 기대감을 일깨웠다. 즉 사람들은 공의회의 주요 의제는 교회의 일치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을 이루는 것도 중요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교황은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를 ꡐ사목적 성격을 띤 주교들의 모임ꡑ으로 규정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아마도 공의회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정리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교황은 공의회 기간을 길어야 3개월 정도로 예상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베네치아의 추기경으로 재직할 당시, 자신의 선임자 비오 12세와 공의회의 개최 가능성에 대해 논의한 바 있었다. 이제 교황의 공의회 개최 예고는 마치 하나의 영감처럼 서서히 싹트기 시작하였다.


  1959년 성령 강림 대축일을 기해 공의회를 준비하는 첫 번째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59년 6월 29일 교황 요한 23세는 자신의 즉위를 기념하여 발표한 회칙 Ad Petri Catbedram에서 공의회의 개최를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 가톨릭 신앙의 발전,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삶에 대한 상세한 검토와 반성, 그리고 시대의 요구에 따르는 교회 규정의 적응 – 1959년 6월 4일 교황은 처음으로 ꡐAggiornamentoꡑ(적응)라는 말마디를 사용하였다 – 등이 공의회가 추구할 주요한 목표로 언급되었다. 1960년 성령 강림 대축일은 공의회의 준비에 있어서 제2의 발판을 제공하였다. 교황은 10개의 공의회 위원회와 중앙 위원회 그리고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을 구성하도록 하였다. 교황의 권고에 따라 전 세계의 주교, 수도회, 가톨릭 대학, 신학교 등은 공의회가 다루어야 할 주제와 관련해서 수많은 제안들을 제출하였다.


  1961년 12월 5일 교황은 공의회는 1962년에 소집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보좌 주교들도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초대되었다. 1962년 2월 2일 공의회의 소집 일자를 1962년 10월 11일로 확정지었다. 이에 따라 첫 번째 회기는 1962년 10월 11일부터 12월 8일로 결정되었다. 약 2,500여 명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18개의 비가톨릭  교회가 공의회의 공식적인 참관인으로 초대되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 개막 연설에서 공의회는 가톨릭 신앙의 진리가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모색해야 하기 때문에 단죄하는 모습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공의회는 첫 번째 주제로서 전례에 대해 논의하였다. 계시의 원천과 관련된 초안에 대해 교부들의 2/3 이상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초안을 폐기하도록 결정하였고, 그 결과 새로운 초안이 준비되어야 하였다. 세 번째의 주제는 매스미디어였다. 교회론에 대해서는 계속 검토가 진행되었으나 12월 8일까지 종결되지 못하였다. 첫 회의 기간이 끝날 무렵 교황이 회복될 수 없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두 번째 회기를 보지 못한 채 서거하였다.


  1963년 6월 21일 바오로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매우 시급한 과제로서 공의회의 계속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1963년 9월 23일 두 번째 회기가 개회되었다. 두 번째 회기는 1963년 9월 30일부터 교회론에 대한 초안을 계속 다루었다. 그리고 일치 운동에 관한 초안에 대해서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963년 12월 4일 마지막 회의에서 첫 번째 회기부터 다루어 왔던 전례 헌장과 매스미디어에 관한 교령을 통과시켰다. 1964년 9월 14일 세 번째 회기가 시작되었다. 이 회기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교회에 관한 헌장이 통과되었다. 세 번째 회기에서는 주교들의 사목 직무와 주교단(많은 이들은 교황권의 제한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중교 자유, 유다인 문제 등에 관해 매우 활발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1964년 11월 21일 세 번째 회기도 끝났다. 1965년 9월 14일에 시작된 네 번째 회기에서는 특히 ꡐ현대 세계 안에서의 교회ꡑ에 대해 논의하였다.


  1965년 12월 7일 공의회의 마지막 회의가 개최되었다. 1965년 12월 8일 공의회 폐회 연설에서 교황 바오로 6세는 위정자, 학자, 예술가, 여성, 가난한 자, 병자, 고통받고 있는 자, 노동자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공의회는 교황의 폐회 문서의 낭독으로 끝을 맺었다. 공의회가 발표한 개별적인 문헌은 각기 상이한 명칭을 지니고 있다. 그 명칭에 따라 각기 상이한 무게를 지닌다.


  「헌장」은 하나의 포괄적인 문헌으로서 사안에 대한 기본적인 진술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안에 대한 진술을 본질적으로, 그리고 완벽하게 제시하고 있다.


  「교령」은 특정한 인간 집단의 삶에 대한 일반적 또는 특별한 지침을 포함하고 있는 문헌이다.


  「선언」은 특정한 사안에 대한 교회의 태도 표명을 담고 있는 문헌이다.


  공의회는 의식적으로 교의 신학적인 정의와 신앙 명제의 선언을 포기하였다. 공의회는 이러저러한 진리를 해명하는 데 주력하기보다는 교회와 현대 세계를 연결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논의와 결정은 사목적인 관점을 두드러지게 표출시켰다. ꡒ공의회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위대한 교리서이다ꡓ(1966년 6월 23일 교황 바오로 6세).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