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진성사-성서적 기초

 

2.성서적 기초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교 입문을 위한 일반적인 경우로서 세례와 구분되어서 성령을 수여하는 고유한 예식은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개개의 요소들을 찾아서 후대의 견진성사의 실천과 신학을 위한 연결점으로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2.1. 성령을 전달하는 고유한 예식의 부재




신약성서에 의하면 성령의 전달은 세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도행전에서 두 군데에서 세례에 속하는 성령 수여가 사도들의 안수와 연관되어 언급되고(사도 8,17 이하; 19,6), 히브리서에서는 “세례와 안수”가 당연하게 앞뒤로 연결되어 얘기된다(히브 6,2). 다른 한편으로 사도행전에서 안수가 없는 세례와 성령 수여에 대해 얘기한다(사도 2,38; 10,44-48). 바울로에게 세례는 항상 성령의 전달까지 의미하며, 요한은 “물과 영”을 통한 탄생을 얘기한다. 한마디로 신약성서에서는 세례 이외에 성령을 전달해 주는 고유한 예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성령의 선사는 항상 그리스도교의 세례와 연관되어 있었다.




2.2. 입교 예식이 세례와 성령세례로 나뉘었는가?




사도행전은 단 한번 성령이 수여되지 않은 세례에 대해 언급한다. 필립보가 사마리아에서 성공적으로 선교하였지만,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아직 성령이 내리지 않았고 단지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던 것이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사도 8,16-17). 스콜라 신학에서는 이 텍스트를 세례와 구분되어서 사도들(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에게 유보된 성령 수여의 고유한 행동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보았다: 필립보는 세례를 주었으나 그러나 성령을 중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도들은 새로 회개한 이들에게 안수를 하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가야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의도하는 바를 살펴보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 의문이 간다. 사도행전의 중심적인 주제는 예루살렘의 모교회에서 출발한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가 하느님 영에 의해 움직여져서 지금까지의 경계를 넘어서 널리 전파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정적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데에 성령에 대한 언급이 꼭 나온다(사도 10,44-48; 15,28). 바로 이런 맥락에서 처음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으로 구성된 교회가 설립되는 사마리아에 관계해서 성령이 언급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도 여기에 관련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에 의해 생성된 예루살렘 모교회 공동체의 보증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특별한 상황을 묘사한 대목에서 입교 예식은 신약성서에서 일반적으로 수세와 사도들의 안수로 구분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사도 8,14-17이 필립보가 성령을 중개하기에 불충분한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사도 8,26-40을 참조해 보면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필립보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거기에 무엇을 추가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아나니아 역시 바울로에게 세례를 주고, 안수를 하고 성령을 약속할 수 있었다(사도 9,17-18). 루가에 의하면 사도들의 특별한 권한은 교회 공동체의 생사가 걸려 있는 곳에 자리한다. 이는 이방인의 세례에서(사도 10,44-48), 혹은 예루살렘 밖의 공동체에서의 안수에서(사도 8,14-17) 나타난다. 모든 세례와 성령 전달의 행동에 사도들의 권한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2.3. 안수, 도유, 봉인의 상징적 의미




안수는 성서에서 축복의 행동(창세 48,14 이하; 마르 10,13-16), 치유의 행동(마르 5,23; 6,5; 16,18; 사도 28,8), 직무 위탁의 표지(민수 27,15-23; 신명 34,9; 사도 6,1-6; 1디모 4,14; 5,22; 2디모 1,6)로 나타난다. 안수가 성령을 전달하는 행동이 된다고 할 때 바로 이런 내용을 생각하게 된다: 받아들임, 하느님의 삶의 영역 안에로의 진입, 소외를 낳는 죄에서의 치유, 파견.


도유는 고대에 특히 목욕한 다음에 좋은 향기를 내기 위해서 행하여졌다. 또 투기(鬪技)에 임하기 전에 몸을 유연하고 잡을 수 없이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도 기름을 발랐다. 이스라엘에서는 사제와 왕들이 도유를 통해서 그들의 직무에 들어서게 되었다(출애 29,7; 레위 4,3; 1사무 16,1-13, 2사무 2,4 등). “기름부음 받은 자”는 왕의 칭호가 되었고(시편 2,2), 나중에는 종말에 오기로 기대되던 구원자의 칭호가 되었다(이사 61,1). 도유와 하느님의 영의 수여가 연결되기도 한다.1) 신약성서에는 성령을 전하는 것과 관련된 도유예식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유”는 세례에 따르는 성령의 수여를 상징하는 말이다: “하느님은…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에게 (인증의) 날인을 하셨고 우리 마음 안에 그 보증으로 영을 주셨습니다”(2고린 1, 21-22; 비교. 1요한 2,20.27).


여기서는 도유, 성령 전달이 봉인(封印)이라는 표현과 연결되는데, 이 말도 고대의 법과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봉인은 조약을 증명하고, 개인의 소유물을 표시하며, 도망간 노예를 낙인찍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유대의 묵시문학은 종말에 선택받을 사람들을 위한 봉인이라는 생각, 즉 볼 수 있는 표시를 그들 몸에 지님으로써 구원받도록 정해진 것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2) 유대교에서는 할례를 계약의 봉인으로 해석하였다.


성서시대가 지나면서(지역적으로 다양한) 안수와 도유가 입교 예식에서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확립되고, “봉인”은 입교 예식을 완료하여 종결하는 것을 가리키는 중요한 말마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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