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성사-신약성서에 나타난 사제상(2)

 

2.2.4. 신학적 토론


신약성서에 분명하게 감독(episkopos)과 장로(presbyteros)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교회 직무가 출현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규범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냐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다.


(1) 세가지 신학적인 견해


가)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원하는 특별한 직무를 지녔지만, 사도 다음의 시대에는 교회 전체가 원래 사도들이 지녔던 직무를 수행한다. 교회직무는 사회학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났고 신학적인 구속력은 없다 (개신교 신학자 H. v. Campenhausen과 소수 신학자들의 견해).1)


나)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부름으로써 복음 선포의 직무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직무는 특별한 사제적 사명이나 권한을 포함하지 않는다 (개신교 루터파 연합의 공식적인 견해)2).


다) 그리스도는 최후만찬 석상에서 사도들을 사제로 서품하였고, 사도들은 후계자들을 임명하고 서품하였다(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3).




(2) 토론의 근거들


* 신약성서에서 교회직무를 맡은 이들(감독, 원로)이 ‘사제’(hiereus)라고 지칭되지 않고, 이 개념이 모든 신자들에게 사용된다는 사실에서 많은 성서주석가들은 결론을 내리기를: 신학적인 의미에서 사제적인 직무는 존재하기 않고 단지 복음선포의 직무, 혹은 사회적인 의미의 직무로서 구속력이 없다.


*고린토 교회의 분쟁에 직면해서 바울로는 공동체의 질서를 담당하는 공동체 지도자에게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대상으로 얘기한다. 바울로는 (공동체의 지도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한분의 성령을 통해서 공동체 안의 여러 은사들이 일치가 이룩된다는 생각을 같고 있다(1 고린 12, 4-27).


*신약성서 어디에도 감독과 장로들만 성찬례를 주도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은 없다. 물론 그 반대도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사도행전 20장 11절에 의하면 바울로가 성찬례를 주도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 사도시대에서 사도 다음 세대로의 전이과정이 어떠하였는지는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확인할 수가 없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 그리스도신자들이 그 도시에서 빠져나오기까지 예루살렘 공동체는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이런 중심적 역활을 하는 공동체가 없다가, 서서히 몇몇 공동체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에페소, 특히 로마).




(3) 결론의 시도


교회의 직무는 교회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교회에 대한 근본 견해에서 출발한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동시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한데 모았다. “예수의 전체적인 활동의 유일한 의미는 종말의 하느님 백성을 모으는 것이다”.4) 즉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종말의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의 형성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교회 공동체에는 영적인 일치만이 아니라 가시적인 일치가 본질적 요소로 속한다. 바오로는 교회를 ‘하나의 몸과 여러 지체’ (1고린 12,12-31)로 비유하고, 사도직이 공동체를 위한‘화해의 봉사직’ (2고린 5,11-21)이라고 말하는 가운데에 교회에는 가시적인 일치가 요구됨을 강조한다. 또한 바오로는 자신의 복음을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받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사도들과의 일치가 결정적으로 중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사도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서 악수를 나눈다. 이 악수는 일치의 가시적인 표현으로 해석 가능하다 (갈라 1,11 이하; 2,1-9). 또 평화의 일치 (에페 2,11-22; 4,1-16)가 곳곳에서 강조된다. 누구보다도 여러 은사의 동등성을 주장한 바오로가 가시적인 일치를 강조했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그리고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의 마지막 유언으로써의 일치가 강조되고 있다. 요한계의 공동체는 카리스마적인 공동체인데 여기에서 일치가 강하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가시적인 일치는 교회의 본질적 요소에 속한다. 이런 기본 테제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겠다.


가)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화해를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드러난 것은 곧 하느님이 원하신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직무는 올바른 가르침을 수호하며 분쟁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학적 필요성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볼 때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인 가시적인 일치를 이루는 데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교회 직무는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 의미만 지니는 것은 아니다.


나) 일치와 화해를 위한 봉사직의 형태는 역사 속에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신 권한은 역사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형태들로 표현된다:


교회 직무의 형태는 특정한 시대에 형성되었더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신, 교회의 본질적 직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드러난 것이 어떤 형태의 직무인지를 물어야 한다.


다)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에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위탁(“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일치와 화해의 봉사직을 연결한다:


신약성서가 성찬례를 주도하기 위한 권한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교회 직무와 성찬례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a)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들의 임무에는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위탁도 속한다(최후의 만찬) b) 사도들의 임무에는 화해의 봉사도 속하는데, 이 봉사직은 십자가상 그리스도의 화해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2고린 5,11-21) c) 그러므로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화해의 행동과 일치를 위한 사도 직무가 연결되어 있고, 그 직무에는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예식도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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