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일신은 광암 이벽, 이승훈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이 된 학자로 한국 천주교회 준성직자단에서 주교의 역할을 한 분이다. 1742년 영조 18년에 출생한 권일신의 호는 직암이며 자는 성오로서, 권철신의 동생이다.
권일신은 남인 신서파에 속한 학잘 양명학을 연구하다가 1784년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영세명에 있어서도 이벽이 조선의 개종 사업을 시작하여 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의미로 요한 세자로 본명을 정하였듯이, 권일신은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성인을 주보로 하여 모범삼기 위해 그 성인을 보호자로 모시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권일신은 자기만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을 만족하지 않고 자기 가족 전부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그의 명성과 학식, 덕행은 주위의 친구와 친지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직암 권일신의 제자로는 이존창이라고도 부르는 이단원이 있었는데, 권일신은 그에게 천주교를 알려 주고 믿어야 할 중요한 신조뿐 아니라 특히 천주교인의 본분과 실천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이단원은 루이 곤사가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한 후 자기 고향인 충청도 내포로 내려가 전교의 사명에 투신하였다. 이로써 서울과 그 인접 지방에서 시작되었던 전교를 충청도로 파급시키는 한편, 전라도 전주 초남에서 덕망과 많은 재산으로 세력이 컸던 유항검을 맞아들여 천주교의 원리를 알려 주고 개종시켜 남쪽 지방 천주교회의 모퉁잇돌이 되게 하였다.
1785년 역관 김범우의 명례방 집에서 이벽을 중심으로 몇 차례 정식으로 공적 집회를 하는 데 있어 권일신은 정약용 형제와 함께 여기에 참석하여 주동자 역할을 하였으며, 같은 해 형조판서 김화진이 이 천주교 행사를 주목하였다가 수색한 후 성물을 압수하고 김범우를 체포 귀양보냈던 이른바 을사박해인 ‘을사 추조 적발사건’이 발생하였을 때도 형조에 들어가 김범우의 석방을 강력히 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집회가 해산되고 이벽이 사망하자, 권일신은 천주교 집회를 다시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용문사에 들어가 신심 수업에 전심하였다.
1787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조금 가라앉자 마음이 약하여 쓰러졌던 사람들이 뉘우치고 다시 뭉치게 되었으며, 이승훈과 정약용․정약종 형제, 권일신은 다시 힘을 합하여 교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교회 활동의 전개에 있어 복음의 전파를 더 쉽게 하고 신입 교우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해 교계 제도를 세울 것을 결심하였다. 중국과는 달리 서양에서 온 목자들을 영접할 수 없는 처지에 있던 그들은 자기들끼리 주교와 신부를 정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북경에서 미사 성제에 참여하고 성사거행을 보며 주교․신부 등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가톨릭의 교계제도가 실지로 적용되는 것을 보았던 이승훈은 자기의 모든 기억을 되살려 신자용 예절서나 교리서에 있는 여러 가지 설명을 빌어 완전한 교계 조직을 세우고, 곧 성직자 선정에 임하게 되었다.
이에 그 지위와 학식과 덕망에서 가장 뛰어난 권일신이 주교로 지명되었고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등 그 밖의 여러 사람이 신부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때 주교 성성식이나 사제 서품식 등의 비슷한 어떤 의식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각기 자기 임지로 직행하여 설교하고, 성세와 고백성사, 견진성사를 주었으며 미사 성제를 드리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하여 주는 등 사제직을 수행하였다.
완전한 신의로 시작된 조선의 성직자들은 거의 2년 동안 그 직책을 수행하였는데, 1789년 기유년에 이르러 교회 서적을 연구하던 중 자기들이 선출한 주교와 신부의 직품의 유효성에 대한 중대한 의혹이 일어났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일체의 성직 수행이 경솔한 처사였다는 생각에 미치자, 즉시 중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 문제에 대해 북경의 주교에게 문의하는 편지를 쓰기로 결의하였다. 이승훈과 권일신이 함께 쓴 이 편지에는 목자를 얻기 위한 신입 교우들의 간청 외에 당시 그들과 나라와의 계약관계, 미신, 조상 숭배 등의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에 대한 질문도 들어 있었다.
이승훈과 권일신 앞으로 당도한 주교의 회답은 우선 신앙으로 불러 주시는 헤아릴 수 없는 천주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라는 권면과 함께 믿을 교리와 천주교 윤리의 간단한 설명이 있었고, 이승훈과 권일신이 함부로 사제 성직에 개입한 것에 대한 책망이 있었다. 따라서 영세를 제외한 미사 성제를 비롯한 모든 성사를 거행할 수 없음을 설명하면서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비신자들을 입교시킴으로써 하느님께 대단한 기쁜 일을 하는 일들에 대해 꾸준히 계속할 것을 부탁하며 신부를 보내 줄 것을 약속하였다. 주교의 편지를 받은그들은 모든 신자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복종하는 마음으로 그뜻을 받아들였으며 성직 수행을 즉시 중단했던 슬기를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어떠한 구실로도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일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즉시 평신도의 자리로 돌아갔고 그 때부터는 신입 교우들을 가르치고 외교인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일에만 전심전력하였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1791년 전라도에서 뜻밖의 박해가 일어났고 권일신은 1785년 을사 추조 적발사건으로 드러났던 공식 성명에도 불구하고 무사하였으나 진산사건을 계기로 하여 홍낙안, 목만중 등 여러 사람이 그를 천주교의 중요한 두목이요 지지자라고 지목하여 고발했으며, 그해 11월에 체포되어 형조로 넘겨졌다. 관원들은 여러 차례 고문을 하였는데, 그는 특별한 형벌을 사용하여 자신의 굳은 뜻을 꺾으려 하는 형리에게 ꡒ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하여도 그분을 배반할 수 없고, 그분에게 대한 제 의무를 궐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습니다.ꡓ라고 하여 더욱 혹심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정조왕은 권일신의 훌륭한 자질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터라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설복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더욱 위험하고도 새로운 고문과 달램, 아첨, 약속, 증빙 따위의 온갖 유혹이 가하여졌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권일신을 사형에 처하기를 주저하던 정조왕은 그를 제주도 귀양에 처하였다.
유배처로 떠나기 전 누이동생인 이윤하의 집에서 머물던 그에게 충신을 희생시키지 않으려 애쓰던 정조왕은 사람들을 보내 80세 노모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효심을 발동시키도록 유도하였으나 배교라는 말만 나오면 언제나 분개하여 물리쳤다. 그래서 그에게 다만 감형을 얻어 조금 가까운 곳으로 귀양을 갈 수 있도록 왕에게 조금만 굴복하고 양보하라고 권고하게 하였다. 이에 매우 마음이 흔들리고 약하여진 권일신에게 ꡒ서양인들의 도리는 동양인의 그것과 대단히 다르다. 공자와 맹자의 도리는 나쁘고 거짓되다ꡓ라는 말을 쓰게 하여 그중에 필요한 글자가 빠졌다고 주의시키니ꡒ나를 가만 내버려 두시오. 당신들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ꡓ라는 대답을 하자 글귀를 더 보충하여 ꡒ서양 사람들의 도리는 공자와 맹자의 도리와 대단히 달라 나쁘고 거짓되다.ꡓ라고 고쳐서 권일신이 굴복하였다는 표시로 정조왕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배소는 즉시 바뀌어 권일신의 노모가 계시는 예산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그는 거기에 다다르기 전에 고문과 매질로 인해 생긴 병이 악화되어 어떤 주막에서 객사하였는데, 때는 1791년 정조 15년이었다.
모든 고문과 그 당시 조선 관리들이 할 수 있는 온갖 유혹에도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던 그는 조선 교우들의 지도자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