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필공(토마)

 

  최필공은 규자동에서 약방을 경영하면서 도저동에서 살았던 김범우에게서 천주교를 배워서, 1790년에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는 영세 때에 ‘토마’라는 본명을 받았다.


  최필공(토마)은 서울의 중인계급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조정에서 의관으로 봉직하였고,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뜻이 굳세며 의로움에 의지하고, 재물에 소홀하며, 교회에 대한 열심이 대단하여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최필공은 어떤 공직을 얻는 데에 아무 후원자도 없었으므로 몹시 가난하게 되었다. 그넌 너무 가난하여 결혼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솔직함과 너그러움이 그 성격의 본바탕이었으므로, 그는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이내 입교하였다. 입교하는 날부터 그는 크나큰 열성을 보여 영신의 일만 생각하고, 육신의 일은 필요한 것을 돌보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 거룩한 영광은 때가 지나도 식지 않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그는 천주교를 공공연하게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떤 때는 한길 가운데 군중 속에 멈추어 서서 ꡒ천지의 대왕을 반드시 섬겨야 합니다. 만물의 위대한 주를 어찌 섬기지 않겠습니까?ꡓ하고 외치는 일도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영세한지 얼마 되지 않는, 새로 들어온 신자이기는 하지만 이내 어디에서나 가장 열심한 신자 중의 하나로 알려졌다.


  길거리와 광장에서 신앙을 설교하기를 그치지 않은 용감한 사람, 최필공(토마)의 입교 이야기와 그 종교 생활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어서 관리들의 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1791년 신해교난이 일어나자 그도 일단 체포되어, 형조에 끌려 나가 그의 종교에 대하여 심문을 받았고, 그는 과감하게 대답하였다.


  ꡒ사람으 누구나 천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언제나 천주께 대한 본분을 다할 용의가 있습니다.ꡓ


  이 대답을 한 뒤 그에게 가하여진 형벌도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항상 한결같은 목소리로 같은 신앙 고백을 되풀이하여 마지않았는데, 어떻게나 순진하고 솔직하고 확신있게 말하였던지 구경꾼들이 모두 감탄할 지경이었다.


  왕 자신도 그런 감정을 느끼고 최필공에게 대한 동정심이 생겨, 그의 목숨을 보존하여 주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왕은 그를 달래어 몇 마디 굴복하는 말을 얻어내도록 할 수 있는 노력을 모두 하라고 명령하였다. 간계, 달램, 재산의 약속 등 모든 것이 다 쓰여졌으나 아무 것도 소용이 없었다.


  왕의 명령으로 최필공(토마)의 늙은 아버지와 형이 불려와 눈물과 간청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하였다. 최필공(토마)은 크게 감동되었다. 인성의 모든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도 그는 굴복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는 참 임금이시요, 참 아버지이신 천주를 배반할 결심은 할 수 없다고 되풀이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 마지막 시도가 실패하니, 이제는 법에 따른 준엄한 판결을 선고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에는 관리 자신도 동정심이 일어, 시키는대로 최필공이 순종하였다고 왕에게 아뢰었고, 왕은 좋은 분별력과 순종을 매우 칭찬하며 곧 그에게 의관 집안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주게 하였다. 또 다른 기회에 왕은, 최필공을 좋은 심지로 돌아오게 한 것을 다시 기뻐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최필공이 실제로 두려움에 젖었는지, 또는 사람들이 그가 하였다고 거짓 꾸며대는 말들에 대하여 즉시 강력하게 항변하지 않는 심약만을 가졌던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어떻든 그는 자기 죄를 몹시 슬퍼하고, 자기의 처음의 열심을 되찾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천주교 신자의 모든 본분을 지켜 나갔다. 언젠가, 우리는 그의 이름을 순교자 명단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위에 말한 을사박해와 신해교난이 전라도의 여러 천주교인의 피를 흘리게 한 사형 집행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재위중에 조선에 전적인 공식 박해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정조 왕은 성격이 꽤 온건하여 피흘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더구나 왕은 남인에 속하는 유명한 몇몇 천주교인을 매우 존중하였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새 종교를 따르는 것을 알고, 사실을 조용하게 몸소 검토하고자 하였다. 그는 여러번 천주교인들의 심문을 주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최필공(토마)이 기미(1799) 년 3월에 당해야 하였던 심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것은 후에 순교자 신대보가 그의 편지에서 기록한 것이다.


  [국왕 : 나도 천주교 서적을 읽어 보았다만, 네 생각에는 그 도리를 불도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으냐?]


  교우 :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불교와 비교해서는 안 되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과 만물이 천주의 은혜에 의하여서만 생겼사옵고, 보존되는 것은 또 한가지이며, 다른 은혜, 즉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위대하시며, 우주의 어버이시며 주재자이신 그 천주의 강생 구속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옵니다. 아무 뜻도 없고, 원리도 없는 도를 어떻게 감히 이 종교와 비교하겠습니까? 여기에는 참된 결과, 참된 지식이 있나이다.


  국왕 : 그러나 네가 만물의 지극히 착하고 위대한 주재자라고 부르는 그이가 어떻게 세상에 내려와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며, 더구나 약한 자들에게서 모욕적인 죽음을 당함으로써 세상을 구할 수 있었단 말이냐. 그것은 믿기가 매우 어렵다.


  교우 : 중국 역사를 읽사오면 ꡒ성 탕 임금께서 당신의 온 백성이 7년 가뭄으로 죽게 된 것을 보시고 마음이 아프사 손톱을 깎으시고 머리를 자르시고, 초석을 두르시고, 유림 빈 들로 나가셔서, 우시며 고행을 하시고, 당신을 제물과 희생으로 드렸는데, 그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풍족한 비가 2천 리나 넘는 지역에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때부터 백성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임금님을 성왕이라고 불렀다.ꡓ하옵니다. 그러하온데 구속의 은혜는 얼마나 더 크오니까? 예전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미래 사람이나 모든 백성과 세상 만물이 이 구속에 젖어 있사옵고 그것만으로만 보존되나이다. 전하, 그러하오므로 전하께옵서 그것을 믿기 어렵다고 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나이다.


  국왕 : 그러나 불교 또한 가볍게 다룰 것이 아니다. 불교라는 이름만도 모든 것을 알고 깨닫는 다는 뜻이어서 비길 데 없는 이름이거늘, 어떻게 너는 감히 그것을 경멸하며 말하느냐? 


  교우 : 그 이름이 아니었던들 그가 무엇으로 자기를 방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이름을 도용한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사실은 전하께서 불교라고 부르시는 석가여래는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아들로 인간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그는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ꡒ나 홀로 위대하다ꡓ고 말하였사오니, 그것은 가소로운 교만이 아니오니이까. 그가 어떤 덕행과 어떤 형덕을 가졌기에 그를 경멸하는 것이 죄악이 되나이까.


  국왕 : 진리는 스스로 지탱되는 것이니 매삭 마침내는 바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더 두고 보자.


  그런 다음 왕은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고 교우를 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형조에서 이 증거자는 그의 솔직함을 심한 매질로 보상하고 어쩌면 사형으로 보상해야 하였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를 사형에 처하고자 하는 대신들의 요청을 물리치고, 얼마 후에 그를 석방케 하였습니다.]


  같은 해 1799년 여름에 대사간 신헌조가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정약종 아우구스띠노를 천주교인들의 두목이라고 하는 상소를 올렸다. 왕은 상소를 올린 사람에게 화가 나서 그의 품계를 박탈하고, 그 사건을 거론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런 사실과 그와 비슷한 여러가지 사실이 천주교인들에게 마침내 진리가 승리하도록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대신들의 은밀한 반대와 몇몇 감사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외교인들 사이에 퍼져 나갔고, 입교하는 사람이 특히 서울에서 늘어났다.


  그러나 정조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오래지 않아 박해자들에게 행동할 여지를 주었다. 이 정조 왕은 등창으로 승하하였다. 때맞게 약간 절개 수술만 하였던들 임금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나, 조선 예법 철칙은 병이 든 경우에도, 또 그를 고치기 위해서도 왕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금하였다. 그 종기는 악화하여 큰 상처가 되었고, 왕은 재위 24년 후 1800년 6월 28일에 승하하였다.


  11월 하순에 장례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왕대비 김씨는 남인 시파의 모든 고관들을 파직하고 그 때까지 직에 있던 모든 대신을 파면시켰다. 이들은 이병모, 김관주, 심환지로 대체되었는데 세 사람 다 노론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이동은 하나의 정변이었다. 왜냐하면, 조선법에 의하면 대신으 sdlfjgrp 마음대로 급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대신의 직위는 종신직이었다. 즉 그들이 현직에 있지 않더라도 그 칭호는 늘 가지고 있으며, 이 직을 이미 맡은 일이 있는 사람들만이 왕의 직면만으로 대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대신을 만들기 위하여는 여러 가지 규칙과 의식과 길고 세세한 수속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대왕대비 김씨는 법과 관습을 조금도 상관치 않고, 자기 당수에 충실한 앞잡이들을 항상 가까이 두기 위하여 이 모든 장애들을 건너 뛰었다. 며칠 후에 어린 임금과 대왕대비 김씨의 이름으로 전국에 천주교를 금하고, 그 신자들을 불법자로 만들고, 모든 관리들에게 그들을 체포하기를 명하여, 가차없이 그들을 판결하라는 반 종교적인 법령이 공표되었다.


  박해령이 내리자, 곧 체포가 시작되었다. 맨 처음 체포된 이가 바로 최필공(토마)인데, 지난 해에 정조 왕 앞에서 매우 지주 있고 용기 있게 복음을 변호한 바로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며칠 후 12월 19일 ‘주의 봉헌축일’에는 토마의 사촌 최필제(베드로)가 잡혔다. 그는 그날 새벽, 몇몇 다른 교우들과 함께 서울을 어떤 큰길 옆에 있는 약국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포졸들이 지나가다가 이 신입 교우들이 가슴을 치는 소리를 듣고 금지된 투전치는 소리로 알고 창문을 부수고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몸을 뒤지니 투전장이 아니라 천주교 축일표가 나왔다. 그 중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좀더 유식한 동료들에게 가지고 가서 그것이 종교에 관한 글이라는 말을 듣고 범인들을 잡으려고 급히 돌아왔다. 모두 도망가고 최필제(베드로)와 오현달(스테파노)만이 남아 있었으며, 그들은 관헌 앞에 끌려가서 토마와 같은 감옥에 갇혔다. 그리하여 그들 형제는 옥에서 만나게 되었다.


  6인의 사형수들, 즉 이승훈(베드로), 최필공(토마), 최창현(요한), 홍교만(프란치스꼬 사베리오), 홍낙민(루가) 및 정약종(아우구스띠노)은 함께 2월 26일(1801년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최필공(토마), 곧은 성격과 그 고귀한 진실성으로 선왕이 총애를 받았던 그는 결연히 형장으로 걸어갔다. 망나니는 아직 경험이 적어서 그의 머리를 단번에 자르지는 못하였다. 최 토마는 손을 자기 상처에 갖다 댔다가 피라 홍건히 젖은 손을 다시 떼어 주의깊게 들여다보며, ꡒ보배로운 피ꡓ라고 외쳤다. 과연 보배로운 피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국가는 보증이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칼질은 그에게 천당문을 곧 열어 주었다.


  최필공(토마)이 참수를 당하자, 그의 사촌 최필제(베드로)는 그를 장사지내러 가기 위하여 옥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하여 달라고 하였다. 부모들에게 대한 그 자녀들의 이 마지막 의무는, 즉 같은 집안 식구들 사이의 이 의무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땐 매우 중요하고 신성한 일이어서, 민사범으로 갇힌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그런 경우에 임시로 석방된다. 그리고 큰 형사범과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까지도 며칠 동안 옥에서 나가는 것을 보는 일이 드물지 않을 정도이다. 최필제(베드로)도 이 허락을 받았는데, 그 허락을 내려준 관리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도망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모면하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그러나 용감한 증거자는 그 암시를 따를 생각은 도무지 없었다. 그는 몇몇 친구들에게 ꡒ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전에 내가 배교했던 것을 기워 갚기를 원하네. 그리고 내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내 머리를 바치는 것일세ꡓ하고 말하였다. 따라서 장례식이 끝나자 그는 정한 날짜에 자진하여 돌아와 다시 옥에 갇혔고, 며칠 후에 참수를 당하였다. 그 때의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리하여 두 사촌 형제가 함께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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