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교만(프란치스꼬)

 

  남양 홍씨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홍교만은 기호남인에 속하는 학자로, 양근의 유명한 신자 집안이던 권일신(프란치스꼬 사베리오) 형제의 외숙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장차 벼슬길에 올라 집안의 명예를 이어나가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또 그의 딸을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인 정철상(가롤로)과 혼인시킴으로써 양근 정씨 집안과도 사돈을 맺게 되었다. 천주교를 알고부터는 세상의 가벼운 즐거움이나 수많은 외교인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고, 이런데서 오는 비난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였다.


  홍교만 프란치스꼬는 천주교인들 사이에서는 남양 홍씨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 역시 오래 전부터 중요한 직책을 맡아온 남인의 양반집 자손이었다. 일찍부터 공부를 하여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진사가 되었었고, 그의 점잖고 사려 깊은 성격과 여러 가지 풍부한 지식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얼마 동안 서울에 머무른 다음 서울에서 80리 내지 100리가 되는 포천현에 가서 살던 그는 거기서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들었는데, 아마 그와 사돈간인 양근 권씨 집안을 통하여 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처음에는 천주교를 이내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나중에 아들 홍인(洪鏔) 레오에게서 설명을 듣고 권고를 받아 그 진리를 알아보고 열심으로 실천하기 시작하였으며, 주문모 신부에게서 성세를 받았다. 그당시 사회에서 훌륭한 지위에 있었던 그는 그 때부터 인간의 영광에는 생각이 없게 되고, 그의 수많은 외교인 친구들과도 교제를 끊었는데, 그런 행동으로 받게 될 비난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자기 본분과 가족을 가르치는 데에 전심하며 냉담자들을 회개시키고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으며, 그의 말을 들으려고 그의 집에 모인 그 지방 교우들을 권면하느라고 여러 밤 동안 오랜 시간을 지내는 일도 자주 있었다. 박해령이 내렸을 때에 홍교만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며칠 동안 숨어 있다가 오랫동안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기로 결심하였다. 바로 돌아오는 길에 포졸들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홍교만은 곧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으나, 아들 레오는 다시 포천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홍교만은 여러 차례 문초를 받으면서도 교리와 경전의 가르침을 내세웣 천주교가 결코 사악한 학문이 아님을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박해자들까지도 ꡒ그의 신심은 목석보다 강하였고 어떠한 형벌도 이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교를 위해 죽을지언정 이를 버릴 수는 없다고 단호히 말하였습니다.ꡓ라고 기록하였다. 이리하여 포천의 위대한 사도는 사형 판결을 받고 2월 26일(양력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홍교만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64세였다. 그의 최후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관리 자신들이 작성한 결안에 아래와 같은 말을 적어 넣음으로써 그의 끈기에 대한 훌륭한 찬사를 한 셈이다. ꡒ그는 뻔뻔스럽게도 그 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 행복이라고 감히 말한다. 그의 고집은 목석보다도 더 강해서 오히려 모든 형벌이 그에게는 너무 경하다.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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