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산(토마스)

 



  김유산 토마스(?)는 충청도 보령의 역촌(驛村)에서 태어났다. 어떤 기록에는 그의 신분이 중인으로 되어 있으나, 역촌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아 결안(結案)에 나타나 있는 상천(常賤) 계급이 맞는 듯하다. 천주교를 알기 이전에는 승려 생활을 하기도 하였지만, 열성적 신자 이존창(李存昌) 공사가로부터 천주교에 대한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는 전라도 지방의 유명한 교우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의 집안에 드나들면서 여러 교우들의 심부름을 담당하며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녔다. 관찬기록(官撰記錄)에 토마스가 전라도 진잠(鎭岑)에서 살았다고 한 것이 아마도 이 시기인 듯하다. 당시 조선의 교우들은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하여 북경을 왕래하면서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이들을 도울 목적으로 1798년(正祖 22)과 그 이듬해에 걸쳐 역졸의 신분을 갖고 북경을 두차례 왕래하였다. 물론 북경에 편지를 전달한다는 일은 크나큰 위험을 내포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스스로 교회의 일을 돕는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였던 것이다.


  1801년의 신유교난이 일어났을 때, 박해자들은 토마스가 속해 있는 교우들의 집단이 북경을 왕래하면서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냈다. 관리들은 곧 포졸들을 보내어 그들을 모두 체포하도록 한 다음 그들이 외국인과 통하고 서양배를 불러들일 음모를 꾸몄다고 하여 역적으로 몰아 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포청으로 이송된 토마스 일행은 정법(正法)에 의한 사형판결을 받았으며, 결안대로 전주로 다시 이송되어 백성들이 모인 곳에서 참수를 당하게 되었다. 이 때가 바로 1801년 10월 24일(陰, 9월 17일)로 토마스의 나이는 4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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