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왕족의 제휴, 십자군 운동,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결별,클뤼니수도원 개혁,그레고리오

 

중세교회 (750-1054년)




  게르만민족의 이동과, 프랑크왕족과의 교황청의 제휴라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시작되는 중세기(750-1300년)는 시대적으로 양분될 수 있다.




  중세 전기에는 프랑크왕족을 중심으로 서구 그리스도교제국이 창설되었고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교세의 확장과 교황령(敎皇領)의 탄생등, 외적 발전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로부터 물질적인 혜택을 받은 반면, 황제의 내정간섭을 받아 교권이 약화되고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가 밀착되었던 프랑크제국이 무너지고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한이 쇠퇴하는 교회의 암흑기를 맞게 된다.  암흑기 동안에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로마 귀족의 지배를 받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교회 내정간섭으로 자율성을 잃게 된다. 




  아울러 ‘성화상(聖畵像, Ikone) 파괴’ 논쟁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신학적으로 충돌하였고, 교리논쟁 이후 서방 라틴교회와 동방 비잔틴 교회는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게 된다.   






  2-1. 교황청과 프랑크왕국의 제휴




  클로비스가 죽은 뒤 관습에 따라 왕국은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고 그 국가는 약체를 면할 수 없었다. 


  왕의 실권은 궁재(宮滓)에게 귀속되고, 그 중 한 사람인 카알 마르텔이 점차 국가령의 완전한 처분권을 행사하는 막대한 권한을 갖고 모든 세력 위에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에스파니아(스페인)에서 갈리아(프랑스)로 침입한 이슬람을 맞이하여 포아띠에 전투(732년)에서 승리함으로써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던 아를르와 아비뇽에서 그들을 추방하였다.


  이탈리아에서 달려온 랑고바르디족의 후원을 받은 이 군사적 성공은, 서유럽과 교회발전에 결정적인 의의를 지니는 세계사적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카알 마르텔의 아들 피핀3세는 메로빙왕조의 마지막 왕인 킬데릭2세를 폐위시키고 751년 프랑크 귀족들에 의해서 스스로 프랑크왕국의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보니파시오에 의해 도유(途油, 기름부음), 축성되었다.




  피핀은 로마교회의 충고에 따라 국와에 즉위함으로써 프랑크왕국의 건설을 교회의 기반 위에 놓고자 하였다.  752년 랑고바르디족이 라벤나를 점령하고, 로마를 침공하여 함락을 위헙하고 있을 때 스테파노2세 교황은 프랑스왕국을 방문(754년)하여 교황청과  프랑크왕국과의  동맹을 체결하였다.  피핀은 교황에게 점령한 영토를 돌려주기도 약속하였다.  한편 교황은 피핀을 왕으로 도유하고 그에게 ‘로마의 보호자’라는 명예 칭호를 부여하였다. 


  이것은 로마교회를 보호할 임무가 비찬친에서 프랑크 왕에게로 넘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어 피핀은 랑고바르디족을 격퇴시키고(756년), 정복한 지역과 중부 이탈리아를 교황에게 기증하였다.  이로써 교황이 세습 군주로서 통치하는 교회국가(교황령) 건설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2-2.  그리스도교제국의 형성




  피핀3세의 아들인 카알 대제(768-814년)에 이르러  보니파시오와  피핀이 시작한 프랑크왕국과 교황칙을 결합시키는 사업이 완성된다. 


  그는 우선 북이탈리아의 랑고바르디왕국을 정복하고, 774년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과 영원한 우호동맹을 선언한다.  그리고 동시에 랑고바르디족이 점령하였던 땅을 교황에게 기증하기로 약속하고 781년 몇몇 지역을 증여하였다.  이로써 교회국가가 건설되었고, 이것은 1870년까지 11세기 동안 교황직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교황령이 교황의 교회적, 정치적 독립을 보증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동시에 이것은 교회의 종교적 사명을 위해서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카알 대제는 아우구스띠노의 ‘신국(神國)’이상에 고취되어 그의 왕권을 그리스도교정신으로 이해하고, 그는 게르만족의 토대 위에 그리스도의 새 나라를 건설하려는 이상을 가졌다.  때문에 그는 영토확장을 위한 원정을 정치적, 군사적 입장에서 뿐아니라 종교적, 교회적  입장에서  해석하였다.  그에게 있어 정치와 중교, 군사적 정복과 선교는 하나였다. 그는 점령 지역의 이교인이나 미신자 주민들을 프랑크왕국에 예속시키는 동시에 그들을 집단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고, 그의 제국에 수많은 교구를 건설하였다.  이로써 서구 그리스도교제국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그는 부황, 피핀3세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교회와의 관계를 계승하여, 정치적 문제와 중교적 문제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결합한 기반에서 그의 통치와 대외정책을 운영하였다.  그가 발표하는 입법 조치는 교회의 조직을강화하고, 재산을 보호하며, 교회의 수입을 증대시키는 목적과 분리되지 않았다.  또한 성직자의 자질과 행동양식을 향상시키고 예배양식의 규격화와 표준화에 힘쓰고, 일반 대중의 신앙심을 정화하고 심화시키는 일을 행정의 목표와 일치시켰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책을 간행하고, 교회를 새로 짓거나 보수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을 완수하는 목적에 이바지하였고, 심지어는 호교를 위한 신학논쟁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앙심을 기초로 한 그의 군사적 정복 사업은, 백성과 신하들이 왕에 대한 성실한 종사(從事)관계처럼 해석되어 로마교황의 적극적 지원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인 교황에 대해 깊은 존경을 표시하여,정치적 난관에 직면할 때마다 교황의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또한 그는 카롤링거 문예부흥을 꾀하면서 영국, 이탈리아, 아일랜드, 에스파니아 등지에서 학자들을 초청하여 이들의 도음으로 그의 정치, 종겨적 통치를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영국에서 초빙된 알퀸을 중심으로 이들 학자들은 교육을 증진시키고, 고전을 전사하는 보관하고, 신학적 논문, 성서 주석, 시문, 사료 편찬 등의 작업을 하였다.  또한 그는 에술적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이러한 문화활동은 궁전으로부터 수도원학교나 교회학교로 확장되어 카롤링거문화의 융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카알 대제의 신앙심과 종교적 열정을보고 레오 3세 교황은  800년 성탄절, 성베드로대성전에서 그를 로마황제로 축성하였으니 이것은 매우 주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당시 비찬틴제국에도 로마의 황제가 있었으나 그리스 문화권을 대변한 이 제국은 서방세계를 대표하는 정치적, 종교적 대리자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카알 대제의 대관식을 바로 황제권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옮겨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황제 지위의 정통성이야 어찌 되었든 유럽에 확산된 그리스도교의 정치적, 종교적 체계를 관리하는 중심적 역할이 카알 대제의 위임된 결과가 되었다.


 


  이로써 제국과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대리자인 황제에게 위임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역가적 의미는 한결 두드러졌다.




  2-3.  로마 교회의 암흑기




  814년 카알 대제가 사망한 후, 루이1게(814-840)가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도 그의 부친처럼 로마교회의 보호자로서 교황권의 신장에 노력하였다. 


그는 [루이 특전]을 반포하여, 교황령의 행정과 사법에 있어서 자치권을 인정하였다.  왕제는 로마교회에 있어서 자신의 권한  행사를  극소화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 법규와 재속 성직자 수도자에 관한 규율의 개혁을 단행하여 프랑크제국의 교회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루이1세가  프랑크왕가의 상속법에 의해서 그의 아들들에게 국토를 분해해 주면서 왕족의 영토분쟁으로 카올링거왕조는 붕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교황 니꼴라오1세는 프랑크왕국의 보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교황권을 강화하였다.  교황은 세속권의 교회 내정간섭을 배격하면서 교회의 자주권을 수호하려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목표는 교황 그레고리오7세의 교회 개혁에서 반영되었다.  그러나 니꼴라오1세 이후  대부분의 교황들은 무능하였고, 교황청은 지방주교좌 수준으로 전략하였다.  더욱이 프랑크의 제국권이 이탈리아 귀족들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동시에 교황청 역시 이 포악한 귀족들의 권력투쟁의 희생물이 되어 로마 교회는 880년 이후로 1046년 그레고리오 개혁의 시초까지 완전히 암흑기에 들어갔다.   






  2-4.  초기 신성로마제국의 교황직




  프랑크왕국은 오토1세(936-973) 하에서 비로소 전반적인 붕괴에서 회복되었다.  그는 왕위에 등극한 후 국가 통일 사업을 추진하는 주위의 공국(公國)들을 정복하고 통합함으로써 왕국을 확립하였고 슬라브족  등의 침략을 격퇴하고 국력을 증강하였다.  오토1세는 가부장적 통치체제를 통해 국가를 통솔하고자 하였으나 제후들의 반란으로 실패한 후 교회 지배에 의한 집권으로 정책을 수립하였다.




  그는 교회의 주교들을 지지 세력으로 확보함으로써 국가 질서를 유지하기를 원하였다.  당시 교회는 지방귀족으로부터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 세력을 필요로 하였고, 오토1세는 관직 세습과 지방 세력의 형성이 불가능한 독신인 주교들이 국가의 붕괴나 정복의 위험이 없음을 깨닫았기 때문에 여기서 교회와 국가의 상호 이해 관계가 성립되었다.






  오토1세는 교회에 재산을 증여하고 국왕에게 유보된 특권을 주교에게 부여함으로써 주교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그는 중세 봉건 교회가 탄생할 토대를 놓았고, 그것은 1803년 교회재산이 완전히 국유화될 때까지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이후 오토1세는 국가를 교회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그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이며 두 세력의 이해 관계는 서로 일치되어 있다고 보았다.  어러한  체제는 그의 후계자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제공 하였는데 그것은 후에 제국교회, 즉 93개의 대교구, 교구, 수도원은 독일의 황제들에게 가장 믿음직안 지지자로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회도 이러한 제휴로 새로운 가능성을 얻었다.  즉 교회는 일반사회에서 자유롭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니 이때  독일에서는 수많은 훌롱한 주교들이 나와 교회 발전에 공헌하였고, 수도원은 그리스도교 예술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룩한 중심지가 되었다.  962년 교황 요한12세는 오토1세를 황제로 축성 하였는데 이것이 독일에서 1806년까지 지속된 신성로마제국의 기원이 되었다.  이때 오토대제는 [오토특허장]을 공포하였는데 이 문서에 의하며 오토는 교황청에 이탈리아의 3/4을 부여하는 대신에 교황 피선자는 축성되기 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충성 선서를 해야 했다. 




  이제 로마 교황청은 로마귀족에게 벗어났지만 독일 황제의 지배 아래에 들게 되었다.  이후 로마 교황청을 두고 투쟁하던 로마의 크레센티 가문과 투스쿨룸 가문은 1045년에 이르러 저마다 대립 교황을 세웠다.  그리하여 교황이 3명이 됨으로써 혼란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자 1046년 하인리히3세가 교회 개혁가들의 요청을 받고 이탈리아에 와서 수트리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3명의 교황 모두를 폐위하고 로마인들이 선출한 클레멘스2세를 교황으로 선출시켰다.  교황의 선출에 있어 황제의 권력이 이때처럼 우세하게 드러난 적인 없었다.




  그러므로 1064년은 교황권이 최하로 몰락함과 동시에 황제권이 최고로 상승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두 권력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이후 교황권은 상승하고, 황제권은 쇠퇴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황제권의 우위시기인 중세 초기가 끝나고 교황권의 우위시기인 중세 전성기가 시작된다.






  2-5.  성화상(聖畵像) 파괴 논쟁




  동방(비잔틴)교회에서 100여년 이상 지속된 성화상 파괴 논쟁은 제국 안에서 교회 박해, 폭력 사태, 정치적 혼란, 사회 소요를 야기시켰다.


  성화상 파괴란 어원적 의미로는 모든 종교 예술품에 대한 적의에서 비롯된 외적 표현이었고 당시의 주요 쟁점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전례에 관한 문제였다.


  성화상 파괴 논쟁은 십게명의 제1게명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출애 20,4: 레위 26,1: 신명 4,16-19) 즉 하느님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 숭배에서 구하고, 불가시(不可視)한 신의 영적 본성을 살리기 위해 어떠한 형태의 모상(模相)도 만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이 가시적인 인간의 모습을 갖춘 이후로 이 금령은 더이상 구약시대의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5세기에 이르러 성화상은 특히 동로마제국의 동방교회에서 많이 등장하여 신심의 대상이 되었고, 6-7세기에는 성화상에 대한 입맞춤, 무릎 끊음, 분향, 엎드럼 따위로 나타났다.




  이러한 성화상 공경에 발생 동기는 지상, 연옥, 천국에 있는 교회 구성원 사이의 영적 교류인 성인통공(聖人通攻)의 교리에 근거하였다.  이 교리에 의하면 지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의 전구(轉求) 즉 중재(仲裁)의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신자들의 성화상이 인간사를 좌우하고 질병에 대한 효과있는 구제약이며 영적 및 세속적 축복을 내리고 하느님 은총의 유력한 통로하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이 그들 사이에 널러 펴져 있던 전설이나 기적들을 쉽게 믿고 공경한 것이 성화상 신심을 더 부추겼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 성화상 공경을 배격하는 견해도 강하였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주장하고 그분의 완전하고 참된 인성(人性)을  부정한  단성론자(單性論者)들은 성호상 공경을 배척하고 있었다.  그외에 비잔틴교회 안에서 성화상 공경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이 모상과 그것이 뜻하는 대상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신심 행위가 오히려 우상 숭배에 딸어지지 않을까 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육화(肉化)한 그리스도의 모상은 신성과 인성을 내포해야 하는데 신성은 나타날 수 없었고 인간의 모습만이 표현됨으로써 성화상 공경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이단인 네스토리우스 사상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성화상 공경을 방해하는 논증에 대해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는 성화상은 ‘침묵의 설교’ ‘하느님의 신비를 담은 기록, 문맹자들을 위한 교리서’일 뿐만 아니라 성화(聖化)한 물질의 표상은 그리스도의 육화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고 신학적 설명을 담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학과 성화상의 의미를 연결시켰고 하느님과 성인에 대한 공경을 정리, 구분하였는데 이는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흠숭(欽崇)’,  성인들에게  드리는 것은 ‘공경(恭敬)’이었다. 




  또한 성화상 공경의 대상은 성화상 자체가 아니라 성화상이 표현하는 주제를 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제국에서는 성화상 문제가 수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성화상 파괴운동으로 발전하여 동방교회를 격심한 대립 세력으로 양분하였고 교회 박해, 폭력 사태, 정치적  사회혼란을 야기하였다.  레오3세 황제로부터 성화상 공경 반대조처에 동의를 얻어 소아시아이 주교들은 각자의 교구 성당에서 성화상을 제거하고 성화상 공경을 금지하였다.




  콘스탄티누스5세 때에 이르러 성화상 파괴 운동은 극에 달하였는데 황제는 754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참석한 338명의 주교들의 만장일치로 성화상 공경을 우상 숭배로 금지하였고, 성화상 공경을 주장하던 교회 지도자들, 특히 수도자들을 처형하였다.  따라서 성화성 파괴 운동은 반수도회 운동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786년 이레네의 섭정으로 성화상 신심을 다시 회복시켰고 787년에는 제2차 니체아공의화를 개최하여 성화상의 공경을 우상숭배로 단죄한 754년의 콘스탄티노플공의회의 결정을 무효화하였다.




  미카엘3세 때인 848년에 콘스탄타노플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성화상 공경을 부활시킴으로써 100여년 이상 동로마제국과 비잔틴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성화상 논쟁은 끝맺었다.  






  2-6.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결별




  동.서 교회는 9세기 포시우스로 인해 한때 분열되었다.  그는 858년 평신도로서 일약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되엇다.  그는 황제 니꼴라오1세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착좌(着座)사실을 알렸고 미키엘3세는 아직 비잔틴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성화상 피괴 운동을 단죄하기 위하여 개최하는 공의회에 교황 특사들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816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교황특사들은 교황과 사전 의논 없이 포시우스를 합법적인 총대주교로 승인하였다.  이에 교황은 포시우스의 선출을 위법으로 규정하였지만 이 결정은 동로마제국에 의해 무시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교황이 비잔틴교회에 부당하게 내정간섭을 하였다는 적의적 감정이 폭발하였다.  이로써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의 분규가 공개화되기 시작하였다.




  불가링에서 로마 성직자들이 니체아 신경에 ‘성자로부터’란 단어를 첨부하여 사용하였다.  867년에 포시우스 ‘성자로부터’를 이단 교리로 배척하였고 교황을 이단자라고 하며 그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그후 포시우스의 단죄와 복직 등으로 긴장관계가 완화되었고 교황 요한8세는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을 내세우기 위한 의도에서 포시우스를 승인하고자 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회의가 개최(879-880)되어 포시우스에 대한 과거의 단죄를 무효화하고 그를 합법적 총대주교로 승인하였으나 ‘성지로부터’의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호 몰이해, 상호 불관용, 관할권 논쟁 등의 문제와  함께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합의하지 못한 교황의 수위권과 ‘성자로부터’교리문제는 두 교회가 결별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간 교황은 남부 이탈리이에서 노르만족과 사라센에 대항하고자 비잔틴과 제휴를 시도했었는데 그것이 레오8세 교황 때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때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체톨라리우스는 그의 관할 지역인 남부이탈리아에 교황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 분규를 일으킴으로써 비잔친제국과 교황청의 상호 이해관계 조성을 저지하였다. 


  이러한 분규가 일어난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로마 교황청이 남부 이탈리아의 비잔틴전례 교회에서 라틴전례로 통일하고자 하였고, 반면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그의 관할 지역에 있는 라틴전례의 성당에서 비찬틴전례를 사용하도록 조처를 취하여 미사성제에서 누룩없는 빵의 이용을 금지하였고, 신조에 ‘성자로부터’란 단어를 삽입하여 사용하는 것을 단죄하였다.




  둘째, 로마 교황청은 교회개혁 의지를 갖고서 전 교회의 수위권을 주장하였고 비잔틴교회는 전통적 가치권을 고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영향력있는 동반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9세 교황은 두 교회의 협력관계를 도모하기 위하여 훔 베르토 추기경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협상은 처음부터 잘못 시작되었다.


  사절단을 고압적인 자세로 총대주교를 대하였고 ‘콘스탄티누스의 로마 헌납서’와 사도전승에 의한 교황의 절대적 권한에 의거하는 총재구교에게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토록 강요하면서 서방교회의 관습이 유효하고 전승에 맞는 것임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총대주교는 협상이 결렬되도록 유도하였고 사절단의 주장을 받아이들이 않았다.




  한편 훔 베르토 추기경도 성급하게 행동함으로써 신중한 중재자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1054년 7월 16일 성 소피아 성당의 제대 위에 미리 작성한 총대주교와 그의추종자들에 대한 파문 칙서를 총대주교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파문 칙서를 놓고 로마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파문서는 콘스탄티누스9세 황제의 명령으로 소각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교회회의는 훔베르토와 그의 일행을 파문하였다. 




  이로써 두 교회는 결별하였고, 그리스도교 세계는 양분되었다. 이 불행한 사건에 있어서 오늘날까지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훔베르토 추기경이 월권을 행사하였다는 사실이다.  왜나햐면 총대주교의 파문이 선포되었을 때는 이미 4월 19일 레오9세 교황은 사망하였고 12월 4일에 후계자로 아드리아노4세가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후기 일부 비잔틴교회가 되돌아오고 1965년 양교회가 서로 파문을 폐지함을 선언했지만 이것으로 완전한 일치가 회복된 것은 아니고 다만 재결합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1054-1300     중세 후기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과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교회 쇄신을 위한 노력으로 교회가 자주권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속권을 지해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개혁 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각성시켰고, 평신도의 영성 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는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 운동과 청빈 운동에서 나타나게 된다. 십자군 운동은 서유럽의 그리스도교의 신앙심에서 우러난, 성지 예루살렘의 회복에 목적을 둔 가톨릭의 공동 사업이었지만 이로 인한 영향은 대단하였다. 


즉 당시 교회의 권위와 세속권에 대한 로마 교황의 우월권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 십자군 운동은 신앙면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 변화를 초래하는 큰 자극제가 되어 유럽 사회의 변질을 가져왔다.






   2-7.  클뤼니 수도원 개혁




  중세 봉건제도에서는 토지가 권력의 중심 역할을 했다.  땅을 가진 영주나 재후들은 그들의 땅을 나누어 주어 성당이나 수도원을 세우게 했다. 그러고는 그들은 그것을 매매하거나 상속하였고, 또한 수도원장을 멋대로 임명하고 수도원에서 거처하며 상전 노릇을 하였다.


  그 결과 수도원은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고, 클뤼니 수도원은 이런 폐해들과 맞서 개혁의 선두에 섰다.  그리하여




  첫째, 엄격한 베네딕도회칙으로 되돌아가는 것.


  둘째, 수도원을 교황에게 직속시키는 것.


  세째, 각 수도원을 협회로 총장 밑에 통합하는 것을 개혁의 자유로워졌으며, 수도원들을 협회체         제로 통합하니 중앙집권적인 통제도 가능해졌다.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이상은 수도자로         부터 성직자로 확대되었고, 마침내 로마에까지 영향을 미쳐 그레고이오 개혁을 낳게 하였         다.






  2-8.  그레고리오 개혁과 서임권(敍任權) 투쟁




  그레고리오 개혁이란 교황 그레고리오7세가 시작하여 50년 동안 전개된 교회의 자율권 회복 운동을 일컫는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황제나 귀족들을 통해서 또는 성직 매매의 방법으로 주교와 수도원장이 서임되던 제도를 반대하여 교회의 독립권을 보장하기 위해 성직자의 자유선출권의 회복과 그 권한의 행사를 요구하였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개혁의 주요 과제는 성직 매매와 평신도(황제)의 성직 서임권에 투쟁하는 것이었다.




  서임권 문제에 있어서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는 교회에 복종해애 하는 평신도로 규정하고,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이 육신 위에 있듯이 그리스도교 국가에 있어서 영혼에 해당되는 교회와 교황은 육신에 해당되는 국가와 황제에 우선한다는 신학적 주장을 내세웠다. 


  1075년에 교황은 27개 항목으로 작성된 교황 훈령을 선포하였고, 이는 개혁의 기본 지침석 되었으며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교회는 하느님에 의해 설립되었고 교황은 전체 교회의 수장(收藏)으로서 주교를 임명하거나 해임하고 전임시킬 수 있으며 교황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성직자로 서품할 수 있다.  교황의 결정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취소될 수 없으며 교회는 어떠한 오류도 범할 수 없다.  교황만이 황제 휘장을 사용할 수 있으며 황제를 폐위할 수 있다.”




  교황은 이 훈령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을 강조하면서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성을 주장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리하여 교항과 황제 사이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마침내 독일에 제국 교회의 붕괴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 충돌은 ‘카놋사 굴욕’이라고 하는 카놋사 사건으로 일어났다.  카놋사 사건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권에 회복될 수 없는 치명적 타격을 주었고 이로써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도권은 황제에게서 교황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성직 서임권 투쟁은 그레고리오 교황이 사망한 후에도 후임 교황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우르바노2세는 한때 로마를 떠나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십자군 운동을 서유럽에 호소, 성사시킴으로써 교황이 그리스도교계의 실제의  우두머리임을 과시할 수 있었다.




  1102년 파스칼2세 교황은 로마 교회회의에서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 금령을 선언하였고 서임권 행사를 고집하는 하인리히4세 황제를 파문했다. 


1105년 황태자가 반란을 일으켜 그의 부친을 폐위하고 하인리히5세로 등극하였으나 새 황제도 서임권을 요구하다 단죄되었다.




  1111년에 파스칼2세는 수트리 종교 협약을 통해서 황제의 서임권 포기를 받아내고 신성로마제국의 재산과 속권(俗權)을 황제에게 양도하기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의 측근들에게서 심한 반발이 일어나 하인리히5세는 교황을 구금하고 서임권을 황제의 특권으로 승인하도록 강요하고 받아냈으며 파스칼2세는 추기경단의 강력한 항의로 1116년 라테라노 교회회의에서 이 특권의 무효를 선언하였다. 




  갈리스토2세 교황에 이르러 새로운 타협안이 모색되었다.  그것은 주교가 지니고 있던 주교와 재후의 두 직무(교권과 속권)를 대립시키지 않고 분리해서 서로 양보하는 중간 해결책이었다.  즉 주교에서 영토를 수여하는 속권에 의한 서임과 성직을 수요하는 교권에 의한 서임을 구별하였고, 황제는 교권의 서임을, 교황은 속권의 서임을 서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러한 타협으로 1122년 보름스 교회회의에서 정교 협약(政敎協約)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양보 사항은 하인리히5세에 국한되어 있어 황제가 사망한 후에는 효력이 소멸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승리였다. 




  이 정교 협약은 독일 제국의회에서 인준을 받았고, 교회에서는 1123년의 라테란공의회(9차)에서 추인되어,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 논쟁은 종식되었으며 아울러 싱직 매매와 사제 결혼의 금지 등 그간 꾸진히 추진되어 온 개혁과 혁신의 원칙을 재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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