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교- 이단은 아니고 교회의 분열에 그치는 것

 

서구의 대이교(大離敎) 1378-1417


 


  신앙의 분열로 이단에까지 이르지는 않고 특히 교황의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는데 그치는 것을 이교라고한다.  이교는 종종 있었는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도 있고 중국의 애국교회처럼 최근에 생긴 것도 있다. 그러나 큰이교는 동방과 서방에 각각 한 번씩 있었는데 1054년의 동방 대이교와 서구 대이교가 그것이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11세가 로마에 들어옴으로써 아비뇽의 교황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1378년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우르바노6세는 전제군주형의 인물로서 추기경들과 불화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프랑스와 스페인의 추기경들은 교황 선거가 로마인들의 강압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효라고 선언하고 아비뇽에서 대립 교황으로 클레멘스7세를 선출하였다.  이제 교회 안에서 2명의 교황이 현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황청 분규를 수습하기 위하여 1409년 피사에서 열린 공의회는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을 해임하고 알렉산델5세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때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들이 반대하고 나서서 교회는 3명의 교황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교황청의 분열은 콘스탄스공의회의 결정으로 끝났다.  모라의 교황 그레고리오12세는 공의회에서 정통 교황으로 인정받은 뒤에 가진 사임하였고 아비뇽 교황과 피사 교황들은 해임되는 동시에 1417년 새 교황으로 마르티노5세가 선출되었다. 




  교황청의 아비뇽 체류와 분규는 교황권의 약화와 함께 공의회 우위 운동과 이단 운동을 초래하였다.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 권위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왔고, 교회의 모든 문제는 교황이 아니라 공의회에 재소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공의회 지상주의’가 주장되었다.  이 사상은 콘스탄스공의회와 바젤공의회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공의회 우위 운동은 비오2세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이로써 교황의 수위권은 재정립되었지만 실추된 윤리적, 영신적 권위까지는 회복될 수 없었으니 이것은, 루터가 교회와 교황청에 저항하면서 그 개혁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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