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궁녀 전경협과 박희순

 

동정 궁녀 전 경협과 박 희순


21.1.2 입교


  전 경협(아가다, 1786-1839)은 1786년에 한양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사망한 후에 집안 형편이 빈곤하여 어느 궁녀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몇 년 뒤에 오빠가 궁녀의 집에 찾아와 여동생을 출가시키기 위해 돌려 달라고 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 전 경협은 결국 그를 양육한 궁녀를 따라서 궁중에 들어가 의빈궁의 나인(內人)이 되었다. 그는 왕궁에서 정숙하고 총명한 궁녀로서 궁중 생활을 보내던 중에 같은 궁녀인 박 희순을 만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천주교에 대한 교리도 배웠다. 얼마후에 입교하기로 결심한 전 경협은 대궐에서 마음놓고 천주교를 열심히 신봉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사치스러운 궁녀 생활을 청산하고 병을 핑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집안의 강경한 반대로 어느 가난한 여교우의 집으로 가서 신자들과 함께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제 궁녀가 아닌 전 경협은 성서 독서와 기도 및 묵상 생활 속에서 덕을 쌓으면서 온화하고 겸손한 태도로 신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자주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보잘것없는 의복과 음식으로 만족하면서 극기 생활에 전념하였다.


  박 희순(루치아, 1801-1839)은 신유대박해가 일어난 해인 1801년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재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궁녀로 간택되어 왕후의 시녀9창녕위궁의 나인)가 되었다. 그는 궁중에서 어느 나인보다도 총명하였으며 온화한 마음씨와 정직한 성품을 보여주었다. 박 희순은 15세가 채 되기 전에 17세의 어린 국왕 순조 임금이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유혹하였지만, 그녀는 강직한 용기로써 국왕의 유혹을 물리쳤다. 그리고 왕비는 한문과 한글에 능통한 박 희순을 시녀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선임하였다. 정순왕후 왕대비 김씨도 박 희순을 총애하여 궁녀들을 감독하는 상궁으로 임명하였고, 승하하신 선왕 정조 임금의 위패를 지키는 소임을 부여하였다.


  1830년경에 박 희순은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입교하려는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궁중의 중요한 직책에 몸이 매여 있어 천주교를 신봉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빠져나오지 못하였지만, 그의 종교적 소원은 더욱 열렬하였다. 마침내 박 상궁은 병을 핑계로 왕궁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외교인으로서 천주교를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 들어갈 수 없어 조카 집에 살게 되었다. 박 상궁이 아니라 경건한 신앙인이 된 박 루치아는 지난날 왕궁에서 사치와 환락 그리고 영화 속에서 허송한 생활을 뉘우치고 이에 대한 보속으로 더욱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완수하면서 특별히 의복과 음식을 절제하는 극기 생활을 하였다. 그는 모범적 언행을 통해서 조카의 가족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그러나 조카가 밀고를 당하자 가산을 반값에 처분하고 식구를 데리고 전에 궁궐에서 함께 천주교 신봉을 결심하고 나온 전 경협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1839년에 천주교 박해(기해대박해)가 일어나자 박 루치아는 전 경협과 함께 한양의 “큰사리뭇골”이라는 동네에 집을 한 채 장만하여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1839년 4월 15일에 집으로 들이닥친 포졸에게 전 경협과 함께 체포되었다.




21.1.3 순교


  박 희순과 전 경협은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침착하게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섭리라고 이야기를 서로 주고 받으면서, 우선 식구들에게 관청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고 권하였다. 동시에 포졸들에게 소리지르지 말라고 청하고 돈과 술상을 마련하여 대접하였다. 관청에 끌려온 루치아와 아가다는 포장의 심문을 받았다. 두 사람은 궁녀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의 심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너희들은 궁녀로서 다른 여자들보다 고등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이비 종교로서 국왕이 금지하는 사교인 천주교를 믿느냐?”는 심판관의 물음에 박 희순은 “우리는 사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님께서는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천주님을 찬미 흠숭하고 섬겨야 합니다”고 대답했다. 전 경협도 비슷한 대답을 하였다. “하느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며 주재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고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나쁜 사람을 벌하시는 것이며 이분은 우리의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을 흠숭하고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사도(邪道)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재목 없이 어떻게 집이 서 있을 수 있겠읍니까? 그러므로 만일 대들보가 집의 가장 중요한 재목이라면 하느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아닙니까?”


  포장은 며칠 동안 감언으로 달래거나 혹독한 고문을 가하면서 배교할 것과 교우들을 밀고하도록 강요하였다. 다른 신자들은 형벌에 대한 공포와 고문의 고통, 그리고 친척들의 강요로 배교하였지만 두 사람은 온갖 가혹한 고문을 꿋꿋하게 견대어내고 형조에 이송되었다.


  박 희순과 전 경협은 형조에서도 비슷한 강요와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끊임없이 예수와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참아내어 결국 심문관도 이들의 인내심에 탁복하기에 이르렀다.


  박 희순은 세 번 심문과 앞에 끌려나가 매번 곤장 30대를 맞아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상처는 기적적으로 나아 다음 번 문초에 출두하자 재판관은 이것을 마술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박 희순은 아주 명료하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여 재판관이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박 희순은 옥중에서 하느님의 은혜를 찬미하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편지를 써서 옥밖의 교우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아울러 그는 함께 갇혀 잇는 여교우들을 영적으로 지도하여 근심과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을 위로 격려하기도 하였다. 루치아의 신앙에 대한 증거 정신이 확고부동함을 깨달은 형조의 관리는 사형을 선고한 후에 의정부에 다음과 같은 사형 재가 신청을 내었다. “박 희순은 교우들과 긴밀히 결합하여 밤낮으로 사도에 빠져 있었으며, 그의 행동과 언어와 침묵까지도 요술과 마술뿐이요, 입으로 외는 것이나 손으로 표시하는 것이 모두 사특한 저주이며 이에 확증을 얻어 사형 선고를 하였으니 재가하심을 청하나이다.” 의정부에서는 3일 동안 토의한 후에 이 요청을 재가하였다.


  박 희순은 형리에게 칼날을 잘 세워두었다가 단칼에 목을 잘라줄 것을 청하였다. 1839년 5월 24일에 그는 다른 8명의 신자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전 경협은 다섯 차례에 걸쳐 삼릉장으로 맞아 살이 헤지고 뼈가 부스러지고 피가 흘러 땅을 적시었으나, 조금도 얼굴색을 변하지 않고 가혹한 형벌을 꿋꿋하게 견디어냈다. 주위의 외교인들이 이 신앙 증거자의 용기를 보고 놀라와하였다. 또한 아가다는 이러한 혹독한 형벌속에서 집안의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지방에서 낮은 관직에 있던 그의 오빠가 누이 동생 때문에 관직을 잃을까 전정긍긍하며 동생을 배교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옥중에서 살해하기 위해서 독약을 탄 음식을 들여보냈다. 이를 모르는 아가다는 그 음식을 먹었으나 토해내고 하느님의 은혜로 목숨을 건졌다. 이 계획이 실패되자 그의 오빠는 옥졸에게 뇌물을 주어 가혹한 고문을 가해서 누이 동생을 죽이도록 부탁하였다. 그래서 아가다는 다시 여섯 차례에 걸쳐 삼릉장으로 매를 맞았으나, 순교 원의는 더욱 열렬해질 뿐이었다. 마침내 그의 원의는 1839년 9월 26일에 참수형으로 성취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전 경협과 박 희순 순교자 이외에도 김 율리엣따(1784-1839)라는 궁녀가 있었다. 그는 지방의 열심한 가정에서 태어나 후에 한양에 이사와 성장하였다. 그가 17세 되었을때에 혼담이 오가자 동정 생활을 원하던 율리엣따가 삭발함으로 연기되고 말았다. 신유대박해로 그의 집안이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게 될 때에 율리엣따는 왕궁의 나인(內人)으로 선발되어 10여 년 동안 궁녀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궁에서는 도저히 신앙생활을 완전하게 실천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곳에서 나와 교우집에 머물면서 길쌈하며 지냈다. 율리엣따는 약간의 돈을 모아 작은 집 한 채를 사서 혼자 살았다. 신중하고 내성적인 그는 다른 신자들과 접촉하지 않고 조용히 신심 생활에 전념하였다.


  1839년 6월경(음력)에 율리엣따는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신앙을 버리고 교우들의 이름을 밝히라는 강요를 받았으나 다음과 같이 거절하였다. “매를 맞아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읍니다. 또 제가 누구를 밀고하면 그 사람이 죽겠지요. 그러니까 저만 죽으면 그만입니다.” 김 율리엣따는 다시 형조에 이송되어 같은 고문을 받았으나 그의 신앙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9월 26일에 전 경협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55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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