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 교안
황해도 지방, 즉 해서 지방에서는 천주교가 베르뇌(Simeno-Francois Berneux) 주교의 재임 기간(1856-1866) 중에 전파되었다가 병인대박해로 교세는 쇠미하였다. 1896년에 빌헬름(Nicolas-Joseph-Marie Wilhelm) 신부가 선교사로 파견되어 황해도 지방의 천주교회는 급속적 성장을 하였다. 빌헬름 신부는 안악(安岳)의 매화동(玫花洞)에 최초의 본당을 창설하고 1898년에 안 중근 의사의 부친인 안 태훈(安泰勳)의 요청으로 신천(信川)의 청계동(淸溪洞)에 제2의 본당을 설립하였다. 이후로 1902년까지 장연, 재령, 은율, 황주 등 8곳에 본당이 설정되었고 선교사 8명, 신자는 7천여 명에 이르렀다.
천주교의 급속적 교세 확장에 대해서 지방 관리들은 처음부터 경계하면서 선교 사업을 방해하였다. 여기서 천주교측(빌헬름 신부)과 지방 관리들과의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897년에 관찰부에서는 ‘교도 단속 훈령’을 내려 신천에서는 신자들이 관가에 구금되었고, 1898년 안악에서는 4명의 신자들이 도둑의 누명을 쓰고 군수에게 체포되었다. 1900년에 이르러 교회와 신자들의 수난은 잦아져 옹진에서는 천주교인들이 재산을 강제로 빼앗기고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1902년 6월에는 황주 본당의 신부댁이 습격을 받고, 1903년 3월에는 재령의 성당 기물이 파괴되었다. 이러한 경우에 빌헬름 신부는 관청에 항의하였지만 천주교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던 지방 관리들은 교회측에 불리하게 판정을 내리거나 천주교 배척 훈령을 선포하여 전멸시키고자 시도하였다.
이렇게 황해도 지방에서 천주교인과 주민, 교회와 관청 사이에 일어난 갖가지 충돌 사건(여기에는 일부 몰지각한 교우들이 주민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도 있었음)이 송사로 발전하고 외교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천주교와 개신교의 마찰 사건도 개입되어 사건들은 더욱 복잡해지고 해결이 어려워졌다. 결과적으로 조선 정부와 프랑스 공사관은 문제 해결을 위해 각기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합의하고 교회측에서는 부주교인 두세(Eugene-Camille Doucet : 丁加 ) 신부가 파견되었고 정부측에서는 사핵사(査覈使)로이 응익(李應翼)을 보냈다. 그러나 사핵사의 반(反) 천주교적 감정으로 천주교측이 조사에 불응한 가운데 반대파인 관리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사핵사보’(海西査翮使報)를 작성하여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빌헬름 신부가 프랑스 공관으로 소환되어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프랑스 공사는 사핵사를 피고인으로 고발하여 조선 정부와 프랑스 공관이 대립은 극도에 달하였다. 이 교안은 1903년 11월에 타결되었지만 이로써 황해도 지방의 교세는 격감하여 전체 신자수의 3분의2가 배교 또는 냉담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