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다마소 1세 교황 Damasus I. 366~384
리베리오 교황 서거 후 366년 10월 1일에 이중 선거가 있었다. 즉 소수파가 우르시노를 교황으로 선출한 데 대항하여 다수의 사람들은 다마소 1세를 상당히 어렵게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 이중의 선거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발생했으며, 이 싸움에서 우르시노는 패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마소 1세 교황은 여전히, 패배한 소수파에 의해서 중상모략을 당했으며, 심지어 교황은 살인자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러나 황제의 관여로 교황 다마소 1세의 무죄가 밝혀졌다.
371년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한 시노드에서 교황은 자유로운 교황 선거의 실시를 약속하였으며, 황제는 이를 확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제는 서방의 모든 주교들보다 우선하는 로마 주교의 권한과 모든 신앙과 도덕에 대한 로마 주교(즉 교황)의 최고 결정권자로서의 권한을 추인하였다. 교황 다마소 1세는 동방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일치의 노력은 세 명의 위대한 인물, 즉 체사레아의 성 바실리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그리고 니사의 그레고리오의 도움으로 결실을 보았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서방의 황제 그라티아누스와 함께 380년 2월 28일 제국 내의 모든 시민들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일 것을 의무화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가톨릭 교회의 신앙은 제국의 법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가톨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이러한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이 법을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리석으며 이단적이고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서방의 교회들이 이러한 신앙의 법제화에 대하여 저항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동안 동로마 제국은 이 법령을 토대로 하여 교회를 다스렸다. 수세기에 걸친 투쟁을 통해 교황권은 교회에 대한 비잔틴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투쟁은 교회 스스로를 강화시켰다. 교회 일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다마소 1세 교황은 믿을 만한 라틴어 성서의 출간을 위대한 신학자 예로니모에게 위임하였다. 사람들은 이 성서를 불가타 역본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대중라틴말성서(Vulgata)라고 부른다. 아울러 교황 다마소 1세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헌사를 지하 묘지 안의 순교자의 묘비에 새겨 넣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교황은 교회로부터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그의 전례 기념일은 서거일인 12월 11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