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7세 교황 Gregor 7.

 177. 그레고리오 7세 교황  Gregor Ⅶ.  1073~1085

그레고리오 7세의 본래 이름은 힐데브란트였다. 힐데브란트는 1020년경에 출생하여,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클뤼니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5명의 교황들의 조언자로서 활약하였으며, 여러 차례 독일 황제에게 파견된 특사로서 직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많은 것들이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 하여금 교회의 개혁에 헌신하도록 자극하였다. 1073년 4월 22일에 있었던 선거는 1059년에 반포된 교황 선거 법령을 위반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선임자인 알렉산데르 2세 장례식 때, 백성들이 ꡒ힐데브란트를 교황으로ꡓ라는 구호를 외쳤기 때문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회 내적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개혁의 정신에 입각해서 교회의 질서를 회복하려고 모색하였다. 1074년과 1075년 라테라노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성직 매매와 사제 결혼을 금지하는 예전의 법령들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법령들이 독일과 프랑스에서 강한 반발에 부닥쳤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자신의 개혁 노선을 견지하였다. 1078년에 개최되었던 로마의 시노드는 결혼생활을 하는 사제로부터 돈을 받고 결혼 생활을 계속하도록 허락하는 주교는 성무 집행을 정지당한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비록 어려움이 없지 않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 독신 제도가 정착될 수 있었다. 아울러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평신도의 성직 임명, 세속의 제후들에 의한 주교들의 직무 부여에 반하여 투쟁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의 자유, 국가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교황권과의 강한 결속 등을 요구하였다. 물론 이러한 요구의 제기는 특히 독일과 프랑스에서 자신들의 특권을 주장하는 주교들 사이에 불화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노가 『신국』(Der Gottesstaat)에서 제시하였던 사상에 의존하여, 교회 정책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서한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상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ꡒ그리스도께서는 사도 베드로에게 죄를 풀고 매는 권한을 위임하셨다. 이에 따라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종교적인 사안과 관련하여 최고의 재판관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울러 베들에게 현세의 왕국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 교황은 황제를 퇴위시킬 수도 있다.ꡓ이러한 주장은 당연히 독일의 국왕들 또는 황제들과의 갈등을 초래하였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 황제는 교황을 적대하여 저항하지 않았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사전에 접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074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의 쇄신을 추진하기 위한 개혁 시노드를 주재하려는 목적으로 두 명의 특사를 독일에 파견할 것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독일 주교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평신도의 성직 임명과 관련해서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다른 교구에서처럼 밀라노에 주교들을 임명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의 행위가 법령을 위반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였고 파문의 위협을 가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독일의 주교들은 교황의 지위는 전체 교회 안에서 논란의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여겨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교황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드디어 하인리히 4세도 이 갈등의 상황에 개입하였다. 황제(하인리히 4세)의 재상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보내는 하인리히 4세의 편지를 공개하였다. 이 편지는 ꡒ부당한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섭리로 왕으로 등극한 왕 하인리히는 이제 더 이상 교황이 아니라 단지 형편없는 수도승에 지나지 아니한 힐데브란트에게ꡓ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으며 ꡒ이제는 물러나라, 물러나라! 당신은 두고두고 저주받을 것이다ꡓ라는 요구로 끝맺고 있다. 1076년에 개최되었던 시노드를 통해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킴으로써 이 편지에 응답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하인리히 4세의 정적들에게는 좋은 빌미를 제공하였다. 즉 이들은 1076년 마인츠(Mainz) 근교의 트레부르(Trebur)에 모여, (일부 참석자들은) 즉각적인 국왕 선거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의 특사는, 하인리히 4세는 일 년 이내에 서면으로 교황에게 순종과 속죄를 약속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하인리히 4세의 적대자들은 교황과 왕 사이의 불화를 종식시키기 위해 교황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로 초대하였다. 이 초대를 수용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로 향한 여행길에 올랐다. 아울러 파문의 처벌을 철회해 줄 것을 청원하기로 결심한 하인리히 4세 역시 여행길에 올랐다.


  교항과 하인리히는 여행 도중에 카노사(Canossa)에서 만났다. 하인리히 4세는 삼 일간 참회 복장으로 파문의 철회를 청원하였다. 1077년 1월 28일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의 청원을 받아들여 성체 배령을 허락하였다. 이러한 사태 진행은 하인리히 4세의 겸양을 드러내 보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교황에게는 패배를 안겨 주었다. 즉 하인리히는 자신의 왕권을 회복하였으나, 교황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희생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실현된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 철회에 불만을 품은 독일의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의 의형제 루돌프(Rudolf von Rheinfelden)를 대립 왕으로 옹립하였고, 그 결과 시민 전쟁이 발발하였다. 루돌프는 점점 더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루돌프를 파문으로 처벌하도록 청원하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은 대립 교황을 옹립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이러한 위협에 대해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1080년 3월에 개최되었던 시노드를 통해 하인리히 4세를 재차 파문시키고 왕권으로부터 퇴위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주교들은 하인리히 4세를 계속 지지하였고, 하인리히 4세의 의도에 따라 1081년 초에 비베르트(Wibert von Ravenna)를 교황 클레멘스 3세라는 이름의 대립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하인리히 4세는 로마를 공략하였으나 점령하지는 못하였다. 108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레오 시를 점령하였고, 1084년에는 나머지 시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15명의 추기경들이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 편에 가담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3세는 하인리히 4세의 제안으로 로마의 성직자들과 백성들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라테라노에서 착좌식을 가졌다. 1084년 부활 대축일을 기해 교황 클레멘스 3세는 하인리히 4세를 황제로 대관시켰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독일의 군대가 포위하고 있던 천사의 성으로 퇴각하였다. 노르만족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해방시켰고, 도시 전체를 지금까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시켰다. 이 때문에 노르만족은 로마 시민들의 적개심을 샀다. 이들의 적개심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도 전이되었다. 그 결과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측근 중 몇몇 소수와 함께 로마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살레르모(Salermo)에 거주지를 정하였으며 1085년 5월 25일 그곳에서 서거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남긴 마지막 말들은 이렇게 전해지고 있다. ꡒ나는 정의를 사랑하였고, 하느님을 잊어버린 존재들을 미워하였다. 그래서 나는 추방 중에 죽음을 맞이한다.ꡓ교황 그레고리오 7t는 자신의 적대자들 못지 않게 많은 지지자들의 후원을 받았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인물됨과 교황으로서의 그의 재임 기간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가 자신의 삶과 과제를 전적으로 종교적인 관점 아래에서 파악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예언자로서의 자아 의식에 충만해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였다. 주변의 사정이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직면했을 때라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타협을 몰랐다. 그는 책임감에 사로잡혀 양심에 입각해서 처신하였다. 이 모든 대결과 갈등의 핵심에는 어떤 개별적인 사안이 아니라 누가 – 교회 또는 국가 – 서구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인 특성과 가치 때문에 지도자의 역할을 담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적어도 그가 교황으로 재임하였던 시기에는 역사가 그의 생각이 올바르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시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은 이슬람을 대적하여 투쟁하는 유럽 지도자로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일치를 위해 기울였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노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국왕에게 강하게 예속되어 있던 독일의 교회가 자유롭게 됨으로써 제국 교회로 부상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독일 교회는 세계 교회 안에서 아주 각별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아울러 교황의 보편 수위권 문제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백성들의 의식 속으로 깊이 침투하여 자리 잡았다. 교황 그레고레오 7세가 교황으로 재임하던 기간 동안 교회는 서구에서 절정의 권력을 소유하였고, 강한 의식으로 교회 내적인 쇄신에 몰두하였다. ꡒ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결코 형편없는 정치가가 아니었다. 가끔 그는 불가능한 것을 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으로 진정한 의미의 성인이었다ꡓ(J.Lortz). 교황 바오로 5세는 1606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시성하였고, 교회는 그의 서거일 5월 25일을 전례 기념일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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