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9세 교황 Gregor 9.

 210. 그레고리오 9세 교황  Gregor Ⅸ.  1227~1241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조카로서 1206년 이후 오스티아(Ostia) 교구의 주교 추기경으로 재직 중이던 우골리노(Hugolin von Segni)가 그레고리오 9세라는 이름으로 1227년 3월 19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매우 개성이 강한 인물이었고 교회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는 인물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돈독한 우정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간청에 따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옹호자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아울러 프란치스코 제2회인 글라라 여자 수도회의 규칙과 제3회인 재속회의 규칙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 사후 2년 만인 1228년에 그를 시성시켰고, 1232년에는 파도바(Padua)의 안토니오를, 그리고 1236년에는 엘리사벳(Elisabeth Thuringen) – 독일 출신으로는 첫 번째 제3회 회원임 -을 시성시켰다. 아울러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 당시 설립된 도미니코회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34년 도미니코회의 창설자인 도미니코를 시성시키기도 하였다.


  1230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라이문도(Raimund von Pennaforte)에게 1918년까지 효력을 발생할 수 있는 통일된 교회법전의 편찬을 위임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재임 기간은 독일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마찰로 점철되어 있다. 그레고리오 9세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난 후 독일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재차 십자군의 출정을 서둘렀고, 실제로 1227년 십자군을 출정시켰다. 하지만 십자군이 계속 진군하는 동안 프리드리히 2세는 득병(得病)을 이유로 독일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제공된 정보에 입각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황제의 귀환을 속임수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파문의 처벌을 내렸다. 황제의 편을 들고 있던 일단의 무리들이 로마에서 일으킨 소요 때문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페루자(Perugia)로 대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228년 6월 20일 다시 시작한 십자군 출정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렸다. 프리드리히 2세는 1229년 술탄과 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조약에 따르면 나자렛과 베들레헴을 포함하는 성지는 – 오마르 모스크는 예외로 하고 – 그리스도교에 속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유롭게 예루살렘을 순례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이 조약은 약 10년 6개월간의 효력을 발생하는 한시적인 조약이었다. 1229년 3월 17일 프리드리히 2세는 매우 성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였고, 교황과의 화평을 시도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여전히 파문의 처벌을 받고 있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는 성지 전체를 파문에 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독일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이 점령한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혼란이 발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황과 황제 사이에 있었던 교섭은 서로간의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 문제를 둘러싼 교회의 요구를 수용하였고, 1230년 파문의 처벌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9년 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사이에 다시금 불화가 발생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가 로마에서의 통치권의 행사를 요구할까 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39년 재차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하였다. 이에 대해 프리드리히 2세는 교회 국가와 로마를 점령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소집한 시노드(1241년)는 개최되지도 못하였다. 왜냐하면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국에서 참석하는 주교들의 참석을 방해하였기 때문이었다. 로마를 점령하기 위한 프리드리히 2세의 진군은 1241년 8월 22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서거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