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오 2세 교황 Julius 2.

 255. 율리오 2세 교황  Julius Ⅱ.   1503~1513

교황 선거가 시작된 지 하루 만인 1503년 11월 1일에 추기경들은 교황 비오 3세의 후임으로 – 성직 매매를 통해 – 줄리아노(Giuliano della Rovere) 추기경을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에게는 율리오 2세라는 이름이 선택되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1443년 12월 5일에 출생하였고,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였다. 그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고, 1471년 삼촌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강한 힘을 소유하였던 교황 율리오 2세는 르네상스 교황 가운데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한 교황으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교황 율리오 2세는 사제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보다는 오히려 국가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교황 율리오 2세는 자신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서 교회 국가 권력의 강화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교황 율리오 2세 재임시에 성 베드로 대성전의 건축을 위한 계획이 수립되었고, 미첼란젤로에게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 벽화를 의뢰하였고, 라파엘로에게는 바티칸의 프레스코를 의뢰하였다.


  프랑스 국왕과의 불화는 피사 공의회의 소집을 초래하였고, 프랑스의 추기경들도 피사 공의회 소집을 요청하였다. 공의회 소집은 교황의 권한에 속하였으나 만일 교황이 이단의 협의를 받고 있을 경우에는 추기경들이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을 행사하였다. 독일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도 공의회 소집에 동의하였기 때문에 교황 율리오 2세는 1552년 4월 19일에 바티칸을 개최지로 하는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래서 피사 공의회의 소집은 무산되고 말았다. 라테라노에서 개최되었던 공의회 –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 는 종교 개혁이 발생하기 전에 교회 개혁을 시도하였던 마지막 공의회였다. 교회 개혁을 둘러싸고 다양한 개혁 구상들이 제안되었고, 이러한 제안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실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교황청의 개혁과 주교들의 상주 의무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교황 율리오 2세와 독일의 황제 막시밀리안 사이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교황 율리오 2세가 와병 중에 있었을 때 막시밀리안 황제는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교황 율리오 2세가 건강을 회복하자 막시밀리안은 이 계획을 철회하였다. 교황 율리오 2세는 – 정작 자신은 성직 매매를 통해 교황으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 성직 매매를 통한 교황의 선출을 금지시켰다. 1506년 4월에 교황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정초를 놓았다. 1513년 2월 20일에 교황 율리오 2세는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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