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7세 교황 Pius 7.

 290. 비오 7세 교황  Pius Ⅶ. 1800~1823

교황 비오 6세는 프랑스에 의한 감금 상태에서 서거하였다. 이로써 나폴레옹의 권력은 확대되었고, 교황권은 종말을 고하는 듯하였다. 새로운 교황 선출을 위한 선거는 베네치아에서 약 4개월 만에 시작되었다. 이 교황 선거는 오스트리아의 보호 아래 그레고리오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개최되었다. 교황 선거는 1799년 12월 1일에 시작되었고, 1800년 3월 14일 루이지(Luigi Barnaba Chiaramonti)가 교황 – 비오 7세 – 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비오 7세는 1742년 출생하였고, 16세의 나이로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였다. 교황 비오 6세는 그를 1782년 티볼리(Tivoli)의 주교로, 1785년에는 이솔라(Isola)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1785년 그는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교황 비오 7세는 조국 프랑스로부터 추방당하였던 사제들을 돌보아 주었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 교황 비오 7세는 로마 귀환을 준비하였고, 1800년 7월 3일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면서 로마에 도착하였다.


  그사이 프랑스에서는 변화가 일어났다. 즉 나폴레옹은 교황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가톨릭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였음을 고백하였고, 그래서 프랑스의 교회는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약속하였다. 이렇게 해서 1801년 7월 15일 정교 조약이 체결되었다. 교구는 60개로 확정되었고, 그 가운데 10개는 대교구로 확정되었다. 지금까지 주교직에 머물고 있던 모든 주교들은 사임해야 했고, 나폴레옹에게는 주교 임명권이 부여되었다. 주교들은 정부에 충성 서약을 이행해야만 하였다. 나폴레옹은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다. 나폴레옹은 정교 조약에 27개의 조항을 추가하였고, 교황의 서한, 공의회의 문헌, 지역 시노드의 결정은 정부의 승인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조항에 대한 교황 비오 7세의 항의는 별다른 효력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과 직접 만나서 현안을 논의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교황 비오 7세는 파리 여행을 서둘렀다. 백성들은 교황 비오 7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주지 않았고, 나폴레옹은 교황을 마치 신하를 대하듯이 그렇게 영접하였다. 1804년에 교황은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을 주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관식이 끝난 후 나폴레옹은 교황에게 프랑스에 계속 머물고 아비뇽을 교황의 정주지로 삼을 것을 제안하였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도 교회의 권리 행사에 간섭하였다.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7세에게 자신이 정교 조약에 추가한 조약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고, 프랑스의 총대주교 임명권을 요구하였으며, 끝으로 추기경 가운데 적어도 1/3 이상을 프랑스인으로 임명할 것도 요구하였다. 교황 비오 7세가 나폴레옹의 요구를 묵살하자 나폴레옹은 1808년 2월 2일 로마를 점령하였고, 1808년 9월 6일 교황좌 역시 군인들에 의해 농락당하였다. 나폴레옹은, 교황의 권한은 오로지 영혼의 지도에만 국한된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 비오 7세는 1809년 6월 10일 나폴레옹을 파문시키는 칙서를 발표하였다. 그 결과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7세를 국무성 장관 추기경 파카(Pacca)와 함께 체포하여 프랑스로 이송시켰다. 피렌체, 그르노블, 발랑스, 아비뇽을 거쳐 1809년 8월 17일 사보나(Savona)로 이송하였다. 이로써 나폴레옹은 원래 의도하였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보다는 오히려 교황권이 더 강화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809년 말경 추기경들은 파리로 이주하도록 강요받았다. 1811년 6월 17일 파리의 대주교좌 성당에서는 나폴레옹에 의해 소집된 국가 공의회가 개막되었다. 이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의 주교들이 초대되었다. 하지만 공의회는 나폴레옹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독일의 뮌스터 교구의 보좌 주교는 교황의 석방안을 제안하였고, 이 제안은 전폭적인 동의를 얻었다. 나폴레옹은 공의회가 자신의 기대대로 진행되지 않자 1811년 7월 11일 공의회를 해산시키고 3명의 주교를 제포하였다. 1811년 8월 5일 나폴레옹은 재차 국가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의회는 역시 나폴레옹의 구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1811년 10월에 다시금 공의회를 해산시켰다. 동시에 1801년에 체결되었던 정교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였다.


  1812년 6월 19일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의 비밀 명령에 따라 퐁텐블로(Fontainebleau)로 이송되었다. 나폴레옹이 대 러시아전(戰)에서 참패하여 귀환하면서 교황과의 화평을 모색하였다. 그래서 1813년 1월 19일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7세를 방문하였고, 새로운 정교 조약의 체결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 협상을 통해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에게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하였고, 이러한 양보에 대해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 특히 추기경들이 심하게 반발하였다. 교황 비오 7세 자신도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1813년 3월 24일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보내어 정교 조약을 수정하기 위한 협상을 다시 시작하자고 초대하였다. 연인은 패배로 나폴레옹은 교황의 초대를 수락하였다. 나폴레옹은 1814년 1월 교황 비오 7세를 사보나로 이송시켰고, 1814년 3월 10일 교황을 석방시켰다. 1814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는 5년간의 감금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금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의 귀양살이로부터 다시금 귀환하자 교황 비오 7세는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1815년 3월 22일 나폴레옹의 제부(弟夫)였던 나폴리의 국왕 무라트(Murat)는 교황으로 하여금 로마를 떠날 것을 강요하였다. 1815년 7월 7일 교황 비오 7세는 로마로 귀환하였다.


  비엔나 국제 회의를 통해 교황 비오 7세는 1815년 6월 9일 교회 국가를 다시금 획득하였고,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에 의해 해체되었던 예수회를 다시금 원상 회복시켰다. 교황 비오 7세는 프랑스 혁명이 남긴 여파 때문에, 유럽의 각국에 교회의 새로운 질서를 바로잡는 일로 고심하였다. 특히 독일의 경우 새로운 질서의 필요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독일의 국가 교회는 무조건 자신의 권리를 유지하기를 원하였고, 교회는 정부로부터의 독자성을 유지하기를 원하였다. 교회의 새로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유럽의 각국과 정교 조약이 체결되었다.


  교황 비오 7세는 로마의 재건축 사업에 열중하였고, 아울러 고대 로마의 발굴 작업도 추진하였다. 아울러 교황 비오 7세는 세계 선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822년 로마에는 신앙의 전파를 담당하는 부서가 설립되었고, 1823년 교황 비오 7세는 이 부서를 승인하였다. 23년이라는 긴 재임 기간을 마치고 교황 비오 7세는 1823년 8월 20일 서거하였다. 교황 비오 7세는 매우 신심이 돈독하고 자신을 헌신하는 인물이었고, 재임 기간 동안 체험하였던 고통을 통해 자신을 항구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교황 비오 7세는 재임 말년에 이르러 위기에 처했던 교황권을 다시금 상승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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