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리는 오늘 이 시대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부활은 실재에 있어서의 하나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었고, 실재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새로운 지평을 드러내 주었다. 인간 존재들과 우주 세계 자체가 향해 나아갔던 목표가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모습을 이 세계를 향하여, 과거에 있었던 한 행복한 사건을 향수에 젖어 기억하며 사는 그러한 종교로서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는 한 현존에 대한 선포와 기쁨에 찬 경축,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그것으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스도는 부활로써 이 세계를 떠나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은 훨씬 더 심오한 양식으로 이 세계를 관통해 계시고, 하느님이 모든 사물에 현존해 계시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금 현재 모든 실재에 현존해 계시는 것이다.
부활은 실재에 있어서 이렇듯 하나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주었고, 실재 파악에 필요한 하나의 새로운 지평을 드러내 주었다. 인간 존재들과 바로 저 우주 세계의 목표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이다. 총체적인 우주적 – 인간적 – 신적 실현 내지 충만이 바로 그 목표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물질적인 실재 안에서 영광을 입으신 예수에게서 인간 존재들과 물질에 있어서의 미래의 운명을 발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변모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학적 인식 영역에서 헤아릴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갖고 계시다. 그분은 실재의 해석과 관련하여 일종의 혁명을 일으키신 것이다.
우리들에게서의 경우 세계의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발생할 그것이 그분 안에서는 시간 속에서 이미 발생하였다.
그리스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실재 안에 현존해 계시는 방식들은 다양하다.
육화는 – 이것은 신화가 아니라 신앙을 통하여 인식된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다. – 예수께서 인류 속으로 끼어들여지셨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는 몸으로서의 당신의 인간 존재를 통하여 물질의 한 결정적인 부분을 취하셨다. 결국 우리의 세계에 대하여 그분이 갖는 관계는 우주 창조적인 것이다. 그분은 이 신체적 조건 (깨어지기 쉬운 인간적 조건)을 띠고 그에 따라 사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의 예수의 현존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지상적 조건 특유의 제한들에 에둘러져 있었다ㅣ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은 인간-예수의 전적인 개방성을 하느님-예수에 비례하게 성취시켰다. 그분의 신체적 조건들의 영광과 변보를 통하여 그분은 이 세계와 저 몸을 버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보다 더 충만하고 보다 더 심오한 양식으로 이를 취하셨다. 세상적인 공관과 시간 속에도 현존해 계시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완전히 실현되었던 것이다. 부활을 통하여 예수 안에 감추어져 있던 인간이 완전히 계시된 인간으로 변모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바울로가 부활한 그리스도가 이제 영의 형상으로 살고 계시다고, 그리고 그분의 육적인 몸이 영적인 몸으로 변모되었다고 말할 때, 그는 바로 이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가 영이시라고 말함에 있어서 바울로는 아직 삼위일체의 세번째 위격의 견지에서 ‘영’에 대하여 생각치않고 오히려 부활한 예수의 존재 방식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이로서 저 부활의 기쁜 소식의 실질적인 차워느들을 계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시 자신을 은밀한 양식으로 계시하셨던 그분이 이제 부활을 통하여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폭발처럼 당신 자신을 공개적으로 밝히 드러내고 계시다. 결국 부활은 맨 처음 시작 때부터 이 세계와 인간 역사를 충만에 이르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차원들을 계시하였던 것이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부활 사건의 우주적인 차원들을 성찰하고 여기서 이미 성취된 세계와 인간 존재들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의 목표를 보는 가운데 우주적이며 초월적인 그리스도론의 첫째가는 요소들을 개진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중대한 신학적 의미를 밝히는 주장들은 오로지 우리가 신약성서와 더불어서 부활한 예수가 당신 자신 안에서 예기되었던 세계의 목표와 모든 창조계의 철저한 의미를 계시하였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가능하고 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요한은 이들보다 한 걸은 더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는 ‘그분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기’때문에 물질 세계의 바로 저 역사가 그분에 의거해 있다고 말한다.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성찰이나 신앙이나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길의 시작이자 중간이요 그 마지막이시고 모든 것의 척도이시라고 고백한다. 감각들은 사물들의 핵심을 지각하지 못하고, 눈들은 이를 포착할 수 없다. 이 세계의 궁극적인 내오심에 이를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은 신앙이다. 이 세계는 바로 이 내오심에서 그 자체를 하느님과 변모된 우주의 그리스도의 성전으로 계시되는 것이다.
만일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비추어 내 주는 그러한 식으로 잎에의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분을 위해서,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그분의 인성에 의해 가누어진 것은 특히 인간 존재들, 그분의 형제들과 자매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어떤 의미에서 각 인간 존재가,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타자는 사랑하고 받아들였을 때 크게든 작게든, 뚜렷이 초월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의 최오심이시다. 하느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의 인간 조건을 취하셔서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셨다. 따라서 각 인간 존재는 우리에게 예수였던 그 ‘인간 존재’를 일깨워준다. 한 가난한 인격을 가난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저 가난한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제와 자매의 성사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의 동일시가 선명해진다. 이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존엄과 오로지 하느님에 의새서만이 관통되어 있는 궁극적인 거룩함의 토대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을 저 우리으 부활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비로소 육화하고 부활한 예수에 대한 우리의 형제 관계를 보고 즐기며, 즐기고 사랑하며, 사랑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부활이후에는 더 이상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지상에서 하늘로, 가시적인 세계에서 불가시적인 세계로 떠나가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표현은 새롭게 새겨지게 되었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기에 이르렀다. 즉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과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과 성령과 성사들을 통하여 자신들은 그리스도께 붙들어 매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그분 안에 있게 되고, 그분과 더불어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모두 안에 현존해 계신다. 설령 가톨릭 교회와 충만한 친교를 나누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의 자녀들은 이들을 주님 안의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 또한 성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음으로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성찬적 현존은 성찬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이를 통해서 그분 자신의 사람들 한가운데서 계속 살기를 바라시는 것으로서, 결국 성찬적 현존은 도구, 수단이 되는 것이다. 성찬은 상호성이 성사 밖에서 매일의 일상 생활 가운데 영위되기를 호소하는,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로 이 세계 안에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존의 성사요 징표가 될 수 있기를 호소하는 간청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다.
만일 변모된 주님이 모든 인간 존재들 속에 현존해 계신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사명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잔의 의미를 살지 않으면 안된다. 잔은 마시고 겸비함은 섬기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시각 내지 전망에 있어서 새로운 빛을 가져다 주었다. 지금 현재 우리의 지상적 상황에 처하여 한정적인 실재들의 영역 속에서 방황하고 암중 모색하는 자들로서 존재하는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거의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베드로의 답변과 같은 말에서 우리 자신을 위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베드 1.8-9참조)
4. 우리는 오늘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삶과 인간 존재들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허락하는 한, 그분이 의미하는 그것에로 계속해서 이끌려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래서 자신의 실존적인 행위요 삶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내 개인적, 사회적, 교회적, 문화적 삶의 총체를 예수의 실재와 대면시키는 것이다. 부활은 예수라는 인격의 도래와 더불어 역사가 그 마지막에 도달했다는 것을 즉, 그 마지막을 성취했다는 것을 확증시켜 주었다. 연대기적인 의미에서는 이것이 참이 못된다. 역사는 오늘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표와 절정이라는 의미에서는 역사는 그 마지막을 성취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는 역사가 전략해 나갔던 그 오매가 점에 다달았던 것이다. 죽음은 극복되었고, 존재와 존재들 안에 잠재해 있던 일체의 능력들이 실현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인격은 신적인 영역에 이끌려들여지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실재의 전적인 생명력과 독창성이 비로소 처음으로 역사 안으로 돌입해 왔다. 오늘 이 시대의 우리도 지난 전 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화해를 이루어주고 총체적이게 하는 실재를 바로 에수에게서 찾아내는 것이다.
여러가지 아직 풀지 못한 어려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 내지 세계 개념은 진화론적인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 세계는 현재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불완전하 형태들이 점진적으로 보다 더 완전한 것을 형성하기 위하여 서로가 서로에 수렴되어 나가는 일련의 오랜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원시 공동체는 예수를 인성의 최고 계시로서, 지극히 인간적인 분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양식으로 역사의 역동성을 실현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역사 ‘안에서’절대적인 분이시라고 천명할 때 여기에는 그리스도는 절대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것과 같은 이러한 역사 형태의 밖에 존재하신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는 적대자들의 화해의 상징이다. 인간의 증오와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의하여 오늘 이 시대의 우리에게 와닿아 있고, 영원토록 지속될 역동성과 역사적인 행업으로 갈라져 있던 세계 안에서 화해된 세계, ‘신적인 영역’, 새로운 인류를 창조해 내신 것이다. 신앙과 그리스도의 제자 직분, 희망과 사랑과 성사들을 통하여 우리가 이 화해시키고 재 화해시키는 중심에 참여하는 자들이 될 때, 바로 그 순간 우리 역시 새로운 창조물들이 되고 또 미래 세계의 저 힘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상당한 정도로 반대자요, 해방자, 개혁가요 혁명가로 여겨지고 있고 또 그렇게 추종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혁명가’와 ‘개혁가’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현실의 불의를 그냥짚고 넘어가지 않으심에서 개혁자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이를 뛰어넘어 가신다. 그분은 사회 정치적 구조에 맞서는 폭력적이고 폭동적인 반응을 보이는 감성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에서라면 그분은 전혀 혁명가가 아니시다. 아마도 예수에 대한 적절한 서술은 그분이 죄와 일체의 소회들에 의하여 억압된 의식의 해방자요, 세계와 타자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저 슬픈 인간 조건의 해방자이시라는 말일 것이다.
예수께서 이루신 당신 자신과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통합은 장대한 삶의 형태 속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리내림이 있는 하루 하루의 삶 속에서 실현되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형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이 거의 모든 인간 존재들의 익명성에 참여하셨기 때문이고, 모두에게 있어서 동일한 인간적 상황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삶은 그 속에서 단조로운 매일 매일의 일과 씨름하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그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는 요청을 띤 채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이러한 삶의 구조 안에서 예수는 우리의 맏 형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신학적으로 극히 중대하다. 즉 인간 존재의 소명-천분은 곧 신화인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뛰어 넘어가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인간화하시려는 그것을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는 ‘그리고’를 어떻게 활용할지와 우리가 통상적으로 ‘혹은’을 어디에 배치시키는지를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적대자들을 화해시키고 인간 존재들과 모든 것들의 중재자가 되시는 데 성공하였다. 그분은 우리가 되어야 할 것과 되어서는 안될 것이 기록되어 있는 항구하고도 껄끄러운 기억이시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인성이 현재 드러나는 그것에 전혀 만족할 수 없는 혹은 성취했어야 할 그 인성에 대한 비판적 의식인 것이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죄와,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