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십자가

Ⅰ. 그리스도의 十字架로 다가감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선포한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소식’이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산등성이를 타고 달려와서 외치는 ‘기쁜소식’ 바로 그것이었다(이사 40, 9). 이는 너무도 ‘기쁜소식’이라서 도저히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반드시 苦痛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점에 착안하여 본 단원을 전개할 것이다. 기쁨과 十字架의 딜레마에서 그리스도 信仰 實存의 뿌리인 十字架에로 시선을 끌고가겠다.

1. 기쁨과 十字架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 1 고린 15, 17 ). 바울로의 이 말 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復活이 없었다면 우리의 信仰은 헛 것이 되고 만다. 마지막 원수인 죽음(1 고린 15, 26 참조) 마저 물리친 復活로 인해서 우리에게는 기쁨과 희망이 가득차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상은 苦痛과 부조리가 난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復活 信仰을 체험한 우리 자신들도 이런 苦痛과 아픔의 사건들을 직접 맞딱들이게 되면 휘청거리게 된다. 그 정도가 심할 경우에는 기쁨과 희망의 삶은커녕 信仰의 뿌리마저 뒤흔들리고 만다. 그때마다 우리는 苦痛의 신비에로 날카로운 물음들을 수 없이 던지게 된다. 아직 아무 철학자나 시인도 기쁨 혹은 행복의 의미를 심각하게 문제삼지 않았다. 기쁨은 그 자체로 충분하기 때문이요, 오히려 다른 것들에게 의미를 제공하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은 고통의 의미를 물었고, 앞으로도 물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뼈를 에이는 듯한 고통을 당해야 하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과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가? 그리고 고통의 의미가 자명하지 않다는 자체가 다시 하나의 고통이 되어왔고, 좀 과장한다면 모든 문제는 고통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苦痛과 아픔은 죽음의 순간까지 끊임없이 찿아든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불안케 한다.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그리스도교 信仰人이라면 누구나 다 한 번쯤은 十字架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신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苦痛을 당하고 참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復活 사건과 十字架 사건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일한 사건의 두 측면이다. 十字架와 復活은 하나요, 동일한 빠스카 사건을 함께 이루고 있다. 復活없는 十字架를 운운할 수 도 없고 十字架 없는 復活만을 말할 수 도 없다. 우리 信仰의 근거는 사도로부터 이어온 復活 信仰을 받아들이는데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W. KASPER, 「예수 그리스도」, 박상래 역, 분도출판사, 1991, 216-252면에서 저자는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의 근거”를 신학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부활과 十字架 사건을 동일한 사건의 양면임을 설명한다. 즉 “부활” 을 “顯揚”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함(필립 2,6-11참조)에 착안해서, 예수 부활은 예수를 들어 높이심(顯揚)을 의미한다; 정양모, “예수 그리스도와 현실”, 「신학전망」 27호(1977년 겨울), 광주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38면에서는 “사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만나는 분은 이천 여년 전 十字架에 달린 예수가 아니고 復活하여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시다. 復活하여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걸어가신 길을 우리에게 재촉하고 지원하신다는 뜻에서, 즉 죽기까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요구하고 그렇게 할 힘을 주신다는 뜻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때 그리스도와 함께 十字架에 못박히고 묻히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부활을 전제로 十字架를 언급한다. 사실 十字架는 복음선포에 장애가 되지만, 동시에 언제나 죽음을 통하여 생명에로 이끄는 救援의 길이 된다(2고린 12, 7­10 참조).
그러나 復活 信仰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뒤따르는 것이 있다. 十字架다. 苦痛이다. 이들의 관계를 보자. 復活 信仰과 十字架 信仰의 관계 말이다. 復活 信仰은 기쁨을 선사한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가 기쁜 소식이라는 것, 그리고 그 바탕이 분명히 기쁨이라야 한다는 것은 바로 Euanggelion(기쁜 소식, 복음)이란 말 자체안에 내포되어 있다. H. U. VON. BALTHASAR, “기쁨과 十字架”, 「신학전망」 20호(1973년 3월), 광주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52-53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Euanggelion이란 ‘지상의 평화’를 전하는 기쁨의 報告’이며 (루가 2, 10-14에서는 평화와 기쁨이 가끔 신이 주는 최고 행복을 의미하는 동의어로 사용된다 ; 요한 14, 17. 16. 33 ; 갈라 5, 22 등 참조), 신의 계시의 말씀을 믿던 구약의 사람들이 가질 기쁨 보다 더 큰 기쁨임과 동시에 축제가 있을 때 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느껴온 ―오늘도 유대인들은 축제를 거행할 때 얼마나 기뻐하는가는 잘 알려져 있다― 기쁨 이상의 큰 기쁨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기쁨은 어떤 것도 능가할 수 없는 최고의 대상, 즉 ‘神’의 완전한 사랑의 계시를 대상으로 가졌기 때문에, 인간의 주관적 입장에서 볼 때도 이 기쁨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요한은 그것을 ‘충만된 기쁨’이라고 부른다(요한 15,11; 16,24; 17,31; 1 요한 1,4 참조). 이와같은 완전한 충만성은 ‘종말적 완성에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D. MOLLAT, “복음“, 「성서신학사전」, 광주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1984, 211-213면 참조.
이것은 영혼의 기쁨이다. 이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 된다. 이 기쁜 소식을 삶으로 살아야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信仰人이라면 누구나 다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중개자가 되어야 한다. 마치 예수가 그렇게 했던 것 처럼 말이다. 문제는 이 기쁨이 늘 항상 내곁에 머물지 않는다는데 있다. 苦痛과 아픔과 찡그림의 시간이 온다. 이는 누구한테든 마찬가지다. 十字架다. 十字架의 시간 때 기쁨의 復活 信仰은 싸늘해지게 된다. 하느님의 위로는 커녕 기도 조차 하기 힘들게 되며 나아가 하느님의 不在를 느끼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우리의 復活 信仰은 벼랑위에 서있게 된다. 信仰이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일찍이 이같은 상황에 처했던 초대 敎會의 사도들이 어떻게 十字架에로 시선이 머물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자. J. STOTT, 「그리스도의 十字架」, 지상우 역,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1, 44-50면 참조; 사도들의 초기 설교에서 눈을 떼어 그들이 이보다 나중에 기록한 편지들에 표현되어 있는 좀 더 성숙한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는 우선 그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十字架에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로의 개종의 경우를 보자(사도 9, 1-22 ; 22, 6-16 ; 26, 12-18 참조). 그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復活하신 예수를 체험한다. 그는 神체험으로 말미암아 예수야말로 메시아임을 확신한다. 그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로 꽉 차버렸다. 이제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 기쁨은 말할 수 없다. 그는 이 사실을 증언하기위해 나선다. 그러나 쉽지 않다. 크고 작은 十字架들이 엄청나게 뒤따름을 볼 수 있다. 그의 편지들을 비교해 보자. J. A. FLTZMYER, “PAULINE THEOLOGY 8”, THE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 Avon, 1989, 1384 면에서 저자는 바울로의 편지들을 연대적으로 3분하고 있다. ㉠ 초기 편지들(50-51년) : 1데살, 2데살. ㉡ 중요한 편지들(54-58년) : 갈라, 필립, 1고린, 2고린, 로마. ㉢ 囚人 편지들(61-63년) : 필레, 골로, 에페.
초기의 편지들 안에는 그리스도 신자의 영광스러운 復活과 그리스도의 復活에 관한 언급이 있을 뿐 이다(1 데살 4, 14 참조). 다시말해 몸소 체험한 復活의 기쁨을 토대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 다음 시기의 편지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復活과 인간 救援 사이에 있는 긴밀한 연관을 강조하고 있다. 위의 글,8.
이렇게 볼 때 그가 처음 信仰을 가진후 復活의 기쁨을 증거하기위해 열심을 다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과정에서 무수히 따르는 인간적인 고난과 苦痛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復活의 기쁨 이면에 있는 十字架 사건에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바울로는 어떤 사도보다도 더 十字架 信仰에 대해 강조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갈라 2, 19-20 ; 3, 1 ; 5, 11 ; 6, 14 : 1 고린 1, 17.18.23 ; 2, 2 : 2 고린 5, 17-19 : 히브 2, 5-18 등에서 잘 드러난다; J. MOLTMANN, 「十字架에 달리신 하느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 1994, 85면에 의하면 十字架에 대한 이러한 바울로의 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復活 사건에 근거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된다고 한다; H. MAES, “十字架의 신비와 설교“, 「신학전망」 6호(1969년 12월), 광주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89-95면은 바울로의 十字架 설교를 설명하고 있다. 바울로는 十字架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채우는데 필연적인 고통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쳐주고 있다.

바울로가 그랬던 것처럼 사도들에게도 苦痛과 고난을 이기는 힘을 얻을 수 있는 터전이 있었다. 그 힘의 터전은 바로 復活하신 예수께서 어떻게 세상을 사셨는가를 알고 그대로 따르는데 있다. 復活 信仰을 선포하고 살 수 있는 힘의 터전은 예수 안에서 드러난 十字架의 의미를 배워 사는데 있었다. 十字架를 지는 자세, 苦痛을 이겨내기위해 아버지께 무릅꿇는 자세,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세 등을 배워야 했다. 베드로 사도 역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고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여러분에게 본보기로 남겨 주셨습니다”(1 베드 2, 21). 神의 不在에 처한 상황, 고난에 짖눌린 상황 속에서도 復活 信仰을 증거할 수 있는 힘은 바로 十字架에서 배울 수 있다. 그래서 十字架 信仰은 그리스도교 信仰의 뿌리이며 그리스도교를 오늘날 까지 實存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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