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승천의 의미와 파스카

3. 예수 승천의 의미
3.1. 현양의 상징인 승천 : 현양 신앙
우리는 앞서 루가 전승에서 말하는 예수 승천이 현양의 진리를 묘사하기 위해 기록된 것임을 살펴보았다. 즉, 승천은 현양 신앙의 표현인 것이다. 사실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오는 현양 신앙은 제자들에게 시공의 제약을 벗어나 수시로 나타나시는 예수를 뵙고서 그분이야말로 부활 순간에 현세의 속박에서 풀려나 하느님 나라로 옮겨갔다는 확신에 찬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서 전반에 나타나는 현양의 표현과는 달리 루가 전승이 가시적 승천기사를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사가가 현양 신앙을 승천기사로 기록해야 하는 필요성을 가지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루가 복음사가가 속한 공동체는 당시의 현양 신앙을 매우 소중히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나타내는 현양을 초대교회의 새로운 신자들에게 교육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그 공동체는 초자연적 사건인 현양을 마치 역사적 사건처럼 소개할 필요성을 느끼고 두 번에 걸쳐 예수 승천기를 엮는다(루가24,50-53; 사도1,9-11). 즉 예수 승천기사는 신자 교육의 필요성에 의해 사실적으로 가르쳤고, 교회 전통에서 이를 계속 이어오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주교 명동교회 교육관 편집부,『믿을 교리Ⅱ: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②』, 쳥년 명례방 문고 9 (서울: 천주교 명동교회 교육관, 1990), 19-21면 참조.
그러므로 루가는 승천사화를 이용함으로써 이미 현양을 받으신 예수의 모습을 보여 준 것 같지만 사실은 현양의 신비를 시각적으로 상징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예수의 승천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그것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문제에 얽매일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부활의 신비를 표현하는 현양 신앙은 예수의 승천을 통해 신앙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성서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승천 기사는 그분이 영광을 받은 그 사건에 대한 문학적 개방체인 것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승되어 온 예수 승천 이야기는 종말론적 한 사건을 둘러싸고 여러 양상으로 나타나는 문학-신학적 개방체, 바로 그것이라고 하겠다.’ H. Hendrickx, 앞의 책, 183면 참조.
결국, 예수 승천기사는 예수의 부활과는 다른 별개의 한 사건이 아니라, 루가가 역사적인 사실(史實)을 바탕으로 하여 시간과 공간개념 속에 부활의 신비를 개진한 신앙의 진리인 것이다. “발현들이 부활을 상징하듯이 승천은 현양을 상징한다. 마지막 이별의 발현으로 작성된 승천은 신비롭고도 실질적인 현존을 말하고 있다.” 문세화, 앞의 글, 18면.
하느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아 높이 들려진 예수 그리스도라는 현양 신앙의 상징적 표현의 정점이 예수의 승천으로 성서에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2. 예수 승천의 신학적 의미 분석
전통적 교리에서는 예수의 승천을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사건으로 알아듣고, 이 바탕 위에 예수께서는 부활 후 승천하셨고 승천 후 성부 우편에 좌정하신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윤형중,『상해 천주교 요리(상): 믿을 교리편』, 개정초판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0), 202-204면 참조.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수의 승천과 성령강림의 일련의 사건들은 역사적 사실을 뛰어 넘는 신앙의 진리로써 예수 부활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과 하나의 종말론적이며 신론적(神論的)인 사건이 내면적(內面的)으로 일치를 이루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W. Kasper, 앞의 책, 265면.
이러한 심의(深意)를 드러내는 부활에 대한 표징으로서의 예수 승천에 대한 의미를 올바로 이해함은 당연한 과제일 것이다. 그러면 예수 승천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하는 그 의미를 신학적으로 몇 가지 구분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예수의 승천은 강생(하강)과 현양(상승)이라는 도식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이전부터 성부와 성령과 한 하느님으로 존재하고 계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와 선재 사상과 함께 ‘육화 그리스도론’적 면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요한 복음서이다. 특히, 요한 복음서의 서언에서는 말씀이 ‘하느님이셨고’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1절)로부터 출발하는 그의 언급은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3절) ‘인가이 되셨고’(14절) 다시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18절)이라는 사실을 정의하고 있다. R. Schnakenburg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한에 의하면 그 어떤 지점에 육화와 함께 도달한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도에 관한 시 인 필립2,6-11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왕위 착좌를 전체적으로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로 통해서만이 출발점을 가질 수 있는 선재에 관한 고찰과 세상의 정복자에 관한 것이다. 그분의 전대미문의 ‘파멸’과 ‘낮추어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의 생각을 볼 필요가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이러한 천상으로부터의 첫 변화는 지상에서의 거주에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비치게 된다. 그리스도의 모든 길은 전적으로 인간의 아들의 오름과 내려옴으로 고찰된다(3,13.31; 16,62). 이는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고 다시 성부께로 돌아가는 것처럼 표현되며(13,1; 16,28),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던 그분의 영광에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고찰된다.”(17,5.24) (Cristollgia del Nuovo Testamento. op. cit., pp. 426; 429). M. Serenthà,『어제와 오늘 그리고 항상 계실 예수 그리스도』, 곽승룡(역) (충남: 대전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8), 229면, 주26 재인용.
‘이는 초대 교회때부터 암묵적으로 믿는 바였으며 구약 성서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은 이 사실을 이해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또한 신약성서 여러 곳에 이를 뒷받침하는 구절을 볼 수 있다.’ P. Benoit, et al., 앞의 글, 335면 참조.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강생하시어 지상 생활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인간 구원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다시 성자의 자리에 올림 받으시게 된다. 그래서, ‘승천’하시고 ‘하느님 우편에 좌정하시다’는 표현은 “초기 그리스도론에 암시된 것처럼(사도2,22-36; 10,36-42) 한 인간이 승리자로서 신격화 된 것만이 아니고 그의 고향인 하늘 나라에 돌아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위의 책, 같은 면.
그래서 요한 복음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는 확신(요한6,33.38.41-42.50-51.58)과 함께 승천으로 귀향했다(요한3,13; 6,62)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바오로 서간에서는 귀향이라는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의 하강과 상승의 의미를 보다 넓게 해석하여 ‘죽은 자들’ 혹은 ‘땅의 낮은 곳’에 내려 가셨다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상을 전제로 하기도 한다. 위의 책, 같은 면; 로마10,6-7; 에페4,9-10; 필립2,6-11 참조.

둘째, 예수 승천은 그리스도께서 우주에 대한 최고의 권능을 가지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모든 세력에 대한 승리인 ‘부활 하셨다’는 표현에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점, 즉 지금 바로 하늘에서 모든 세력 위에 권능을 가지시고 군림하고 계시다(에페 1,20-21)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위의 책, 같은 면.
사도 바오로는 “시편 68장 19절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하늘 위에 오르셨다는 것은 그가 소유하시고 만물을 완성하시고(에페4,10) 만물을 하나로 모으시어 그 머리가 되신다는 뜻이라 한다(에페1,10).” 위의 책, 같은 면.
이러한 사상은 디모테오 전서 3장 16절의 찬미가에도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승천이 초대 교회 당시부터 현재에까지 전하는 두드러진 메시지인 종말론적 의미라고 하겠다.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1,11) 라고 전하는 두 천사의 말은 승천의 의의를 간결히 설명함과 더불어 세상 종말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 즉, “재림은 우리들이 그저 서서 바라보는 구경꾼으로 있을 수 없는 사건으로서 우리와 인류 전체, 우주 전체에 부활의 결정적인 면을 확장해 보여주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분을 ‘현존하게 하는’ 곳이며 그분을 드러내 보이고 계시해 결정적으로 우리가 그곳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M. Serenthà, 앞의 책, 523-524면.
우리가 흔히 승천하신 예수에 대한 현존을 인간적 측면에서만 이해한다면 승천의 의의를 반쪽 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분의 하늘에서의 체류는 그분 자신에게는 결정적인 상태이지만 구원의 경륜에서 보면 잠정적인 것이다.” 위의 책, 336면.
예수께서는 최후심판 때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지금 죽음의 승리자로 모든 권능을 가지시고 성부 하느님과 함께 새롭게 살아 계심을 ‘승천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그분의 승천 사화는 세상 종말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예수 부활 신비를 체험한 이들은 예수의 모든 가르침을 믿게 되었고, 다시 오실 예수를 희망하게 되었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그들로부터 ‘승천’의 영적 의미를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고 ‘신앙’하였던 것이다. 예수의 승천은 종말론적 희망의 기초이며, 종말을 기다리는 현세의 삶이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깨닫게 한다.

4. Pascha Domini :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
“십자가, 부활, 현양 그리고 성령 파견의 상호연관성이 가장 분명하고 집약적(集約的)으로 나타나는 곳은 요한 복음서이다.” W. Kasper, 앞의 책, 260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현양’ 개념이 십자가에 높이 들어올린다는 뜻과 아버지 하느님께 들어 높임을 받았다는 뜻으로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말하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은 예수 존재의 가장 내밀(內密)한 중심이요(요한4,34; 5,30),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예수의 자기 헌신이요 동시에 아버지 하느님께로 올라가심(요한13,1)이요 영원한 영광에로 들어가심(요한17,5.23 이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의 책, 261면 참조.
이것은 곧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하느님 아버지 뜻에 순종하신 예수의 자기 헌신이 하느님께 도달함인 동시에 예수의 현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생애와 수난이 끝난 다음 비로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함께 죽음의 심차원(沈次元)에서 일어난 종말적인 사건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동일한 사건의 두 측면이며, 하나이요 동일한 ‘Pascha Domini’, 곧 ‘주님의 지나가심’이라는 사건을 이룬다. 위의 책, 266면 참조.
이러한 예수의 부활은 하느님 아버지께 도달하여 모든 권능을 가지시고 인간의 존재 방식과 다르게 현재 우리와 함께 계심을 드러내는 승천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의 승천이 부활 이후에 일어난 시간적 선후 관계의 한 사건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루가 전승에서는 “승천은 부활과는 분리된 것처럼 취급하는 것을 보이면서도 그 어떤 연대학적 정확성을 기하고 있다. 이는 반대로 부활하신 분의 땅에서의 마지막 발현들의 결론처럼 다루어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교의 시작과 연관되어 소개되고 있다(마르16,15-20의 결론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M. Serenthà, 앞의 책, 516면; 예수 부활과 선교라는 연관성에 관한 이해는 M. Serenthà, 위의 책, 517-518면의 각주44를 참조하라. 이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와의 만남에 대해 부활과 승천의 시간적 관계를 넘어 그 연계성을 설명하고 있다. 즉, 부활하신 분을 만난다는 것은 성부로부터 올림 받은 상태(승천)에서 성부께로부터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분을 만난다는 것은 곧 느끼고 만지게 된다는 의미로서 그분과 함께 움직이는 속에서, 그분과 함께 오르는 속에서 가능한 것이며 성부와 성자의 은총으로 그분은 모든 이들에 속한 것이며 이렇게 그분에게 속해 있으려는 노력은 복음 선포인 바로 선교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말한다고 J. Ratzinger 말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
이는 예수 부활 후 발현의 결론으로서 제자들은 모든 이에게 복음 선포의 의무에로 초대됨을 말한다. 위의 책, 519면 참조.
또한 부활하신 예수는 부활과 더불어 그의 발현을 통해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당신 권능에 참여케 하고자 성령을 베푸신다(요한20,22). 요한20,22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19절), 다시 말해 부활하신 바로 그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신다.
이 성령을 받은 삶은 파견된 삶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 복음 선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루가 복음사가는 사도행전에서 성령강림이 승천 후 50일 뒤에 일어나는 하나의 신비한 사건으로 한정 짓고 있다(사도2,1-3). 이러한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그 사건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사도들의 마음이 가득 찼었다는 단순한 귀절로 눈으로 불 수 없고 오관으로 체험할 수 없는 사실을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문세화, 앞의 책, 110면.
루가는 성령강림의 의미를 밝혀 주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부활과 함께 부활을 통하여 그분 안에 충만한 성령을 드러내 보이시고 또한 제자들에게 사랑 가득한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과 함께 성령을 베푸심은 부활의 신비 자체가 결정적인 종말론적 사건임을 드러내고 있다. 제자들이 받은 이 성령은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 계시한 순간부터, 성부의 구원 사업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로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확인 가능했던 순간인 부활의 순간부터 하느님의 성령은 바로 부활하신 분의 성령으로서 성부의 오른편에 들려 올려짐 받으신 예수의 성령이 되었다.” M. Serenthà, 앞의 책, 521-522면.
이것은 성령의 이끄심이 예수 부활을 통해 종말론적 시기에 포함됨을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성령의 이끄심과 인도하심은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일어나는 초역사적인 종말론적 행위이다. 이것은 또한 부활하신 예수와 성부와 함께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관계 안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위의 책, 522면 참조.
결국, 성령강림 또한 예수 부활과 함께 예수 부활을 통해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는 하느님 구원 업적의 한 면인 것이다. 성령강림은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 후의 어떤 신비한 하나의 사건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함께 종말론적 시기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인 것이다. 이렇게 “성 금요일,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이 갈릴 수 없는 하나의 신비, 곧 Pascha Domini, 즉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는 예수의 ‘지나가심’[通過]이라는 신비를 이룬다.” 위의 책, 26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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