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자의식(自意識)

問 3)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가 진정한 인간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가 굳이 하느님의 아들일 필요가 있습니까? 하느님의 단순한 대리자로서도 인간의 구원을 위한 어떤 행위들을 할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答 3) 가능한 질문입니다. 굳이 ‘하느님의 아들’까지 이르지 않고도, 단지 석가모니나 알라처럼
훌륭한 인간이어도 되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성서에서 보여지는 예수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심
을 스스로 인식하고 계셨음을, 그리고 그 표징을 여러 기적과 말씀으로 드러내 주고 계십니다. 성
서에서 그려지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들을 차례로 살펴보면 수긍할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하신 질문 이전에 이런 질문도
나올 수 있겠지요. “한말씀으로 구원을 이루실 수 있는 분께서 왜 어렵사리 인간의 길을 택하시고,
그 고통을 당하셔야 했는가?”라는 질문 말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유들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서, 그리고 합당한 결론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이시다>라는 발판에서 출발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 없으면 존재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간
조건들을 무시하지 않는, 즉 당신께서 인간에게 선사하신 가장 큰 선물인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무시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그분은 당신 구원 사업의 대리자를 당신 아들로 정하
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즉 당신 스스로 그 사랑의 짐을 지신 것입니다. 이제 실제로 성서 안
에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이해하고 계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
습니다.


예수님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부르시는 데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십니다. 그분
의 아들되심은 다른 사람들의 아들됨과 완전히 다른 질서에 속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
서는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물론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실 때,
이 말씀을 쓰시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지, 그분 자신의
표현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내’ 아버지 혹은 ‘여러분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를 단순히 자신을 파견하신 명령권자로 느끼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더 친근감을 더해 주는 것은,
초대교회가 예수님 말씀을 친히 듣는 것 같이 다른 말로 옮기지 않고 우리에게 아람어(예수님 시
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로 그대로 보존해 준 예수님의 말 가운데 <압바, abba>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말의 의미나 어감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조금은 딱딱하고 관
계에 중심을 둔 말이라면, <압바>는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와 얼마나 친숙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
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말들은 모두 희랍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데, 유독 이 말만은 그대로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언어인 아람어로 전해준다는 점은, 예수께서 이 단어를 직접 사용하셨고,
이 단어를 사용하심에 있어서 얼마나 가까운 친밀감을 느끼셨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
겠습니다. 더욱이나 지금도 유대인들은 불경스럽다 하여 하느님의 이름(야훼)을 입에 올리지 않는
데,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하느님을 <압바>라고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이 친밀감의 표현은 역사적이고 신학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무
한히 단순하고 무한히 개성적이며 내면적인 깊은 현실, <아빠-아들>의 현실을 당신 스스로 인식하
고 계셨으며, 이를 드러내신 것으로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루가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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