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당신들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 가운데 하나라도 없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마태 18,14)
어느 인자한 아버지에게 아들 둘이 있었다. 어느날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청하여 그것을 받아 가지고 멀리 다른 지방으로 떠나갔다. 객지에서 자유롭게 된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까맣게 잊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 마침내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다. 때마침 그 지방에 심한 흉년이 들어 알거지 신세가 된 그는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는 참다못해 남의 집 더부살이로 들어가 돼지 치는 일을 맡아보며 돼지 먹이로라도 배를 채우려 했으나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아들은 드디어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가 계신 집에 가면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품군들이 먹고도 남으련만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이렇게 탄식하며 작은아들은 아버지 집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무슨 낯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는 날마다 집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하면서도 또 망설였다. 그러나 어느날 굶주려 죽을 것만 같은 생각에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자기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며 아들 될 자격은 잃었지만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 간청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집을 뛰쳐나간 후로 매일 동구밖에 나가 행여나 아들이 돌아오지 않나 기다렸다. 그러던 중 어느날 거지의 몰골로 지쳐 쓰러질 듯 돌아오는 아들이 멀리 나타났을 때 아버지는 견딜 수 없는 연민에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의 영접을 받은 아들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하며 품꾼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지난 잘못을 꾸짖지도 않았다. 오히려 거지꼴이 된 아들이 불쌍하여 돌아온 것만 대견했다. 아버지는 하인을 시켜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주고 신을 신겨 주라고 서둘렀다.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크게 베풀게 하여 온 집안이 기쁨에 넘쳤다.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나는 아들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이다”하며 아버지는 기뻐했다.
이 이야기는 문학적으로도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저 유명한 예수님의 ‘잃었던 아들의 비유’(루가 15,11-32참조)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골자는 탕아의 돌아옴에 있기보다 오히려 돌아온 아들을 측은히 여겨 자비와 사랑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고 아들의 지위를 되살려 주는 아버지의 자비에 있다.
우리 하느님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이 무한히 자비하신 분이다. 이 세상의 어느 아버지보다도 비할 수 없는 높으신 위엄과 사랑과 자비심을 가지신 분이다. 앞의 비유에서 나오는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맞아들여 그 전의 지위만 되돌려 주었을 뿐이지만, 하느님은 당신을 배반한 우리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심은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갖가지 은총을 한없이 베푸시는 무한히 자비하신 분이다.
예수님이 이 비유 말씀에서 아버지가 아들의 귀향을 축하하는 잔치는 하느님이 곧 사랑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요한 사도의 이 말씀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깨닫게 해 준다.
“하느님은 배워서 알 분이 아니라 사랑하여 모실 분”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랑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며 우리도 그렇게 부르라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9-10)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준 ‘기쁜 소식’이었다. 구약시대에도 여러 번 엄숙하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요, 선택된 왕의 아버지요, 경건한 이들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예수님에 의해 알려진 아버지 하느님은 구약에 계시됐던 아버지보다도 더욱 새로이, 그리고 친밀한 아버지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을 언제든지 ‘나의 아버지’로 부르시고(마태 26,39.53; 마르 14,36; 요한 14,2.7) 우리에게 이르시는 말씀 속에서는 ‘여러분의 아버지’라 하셨다(루가 6,36; 마태 6,4.6.8;7,11). 이는 예수님이 하느님과 맺고 계신 부자(父子)관계가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맺은 부자 관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세성사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의 양자로 삼으심으로써 이루어지는 부자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 단순히 자비하시고 인자하신 보호자로서 표현됐던 아버지와 신약의 하느님 아버지와는 그 뜻이 전혀 다른 것이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5-16).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심으로써 우리 인간은 ‘아버지’란 친밀한 말로 두려움 없이 하느님께 무엇이나 말씀드리게 되었다.
하느님은 우리가 머리로만 생각하는 허공의 하느님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자고 제의하며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분이다. 그분은 자비와 사랑을 갖고 우리를 자식으로서 돌보고 계신 분이다. 따라서 하느님께 대해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 해도 그분을 사랑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려면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죄 많은 인간이라도 좋다. 뉘우치며 돌아서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언제나 자비를 베푸신다.
“나는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아니하고 회두함을 원하노라”(에제 33,11), “야훼께서는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며 화를 참으시고 사랑이 넘치신다”(시편 103,8),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 주소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시편 51,1)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노래한 성서 구절은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약하여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심에 의지하여 그분께 용서를 청해야 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살 때 우리는 길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지도 않고, 헛된 일에 우리의 힘을 낭비하는 일이 없게 된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 속에서 용기와 신뢰를 갖고 희망을 가지며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예수 그리스도)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그대들은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9-11)
사랑이신 하느님을 따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을 때,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섬길 때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이 말씀은 하느님처럼 전능해지고 전지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아버지 하느님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