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골짜기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언제나 진실하시니 약속을 어길 줄 모르시는 분이시다”(2디모 2,13)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주님은 영원히 계십니다. 만물은 옷처럼 낡아질 것이요 주님은 만물을 겉옷처럼 맡아 치우실 것입니다. 만물은 옷처럼 변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같으시고 주님은 영원히 늙지 않으십니다”(히브 1,11-12)

1. 하느님은 가장 진실하시다.
우리의 인생은 속음과 속임의 연속이라고들 한다. 인간은 쉴새없이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속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타인에 대한 불신풍조는 과거보다는 현재에, 또한 시골보다도 도시에 더욱 더 만연되어 있는 듯하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과연 우리가 찾아야 할 불변의 진리는 무엇이며 지켜야 할 윤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정말 모든 것이 다 허위요 계속적으로 변하는 것뿐이라면 진리 탐구에 전심 전력하는 인간의 피나는 노력은 온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진리 탐구가 헛수고가 될 수 없으니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실된 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의 근원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가장 진실한 분이심은 지극히 당연하다.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하느님이 인간을 속였거나 혹은 인간에게 속으셨다는 기사는 한 군데도 없다.
하느님은 우리를 속이시거나 실망시킨 적이 없어, 그분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같지 않고 참되다는 것을 수차 강조하고 있다.

2.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인간은 겨우 몇 치밖에 안되는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산다. 즉 나는 학교에 있으면서 동시에 집에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한하신 하느님은 일정한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와 함께 여기에 계시면서, 바다 건너 외국 땅에도 계시고 하늘 높은 곳에도 계신다. 이것은 사실 육체를 지닌 인간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설명하기도 힘든 일이다. 하느님이 안 계신 곳 없이 어디든지 다 계시다는 것을 하느님의 편재(遍在)라고 한다.
구약의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을 피해서 세상 끝까지(당시는 지구가 평평하여 그 끝이 있다고 생각했다) 도망가려 하나 결국 하느님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요나서 참조).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안에까지 계시기에 구약은 “주의 눈은 태양보다도 훨씬 밝으사 사람들의 모든 길이나 구렁의 깊은 곳까지도 바라보시며 사람들의 마음을 그 은밀한 곳까지 통찰하신다”(집회 23,19 참조)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이렇듯 하느님이 어디든지 다 계시다는 것만을 말할 뿐 아니라, 더욱 뚜렷이 내게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임을 선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우리 옆에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처럼 거짓말하실 리도 없고 사람의 아들처럼 변덕을 부리실 리도 없으시다오. 말씀만 하시고 그대로 하지 않으실 리 없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지 않으실 리 없으시다오”(민수 23,19).
진실성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데 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 있어서 이 셋은 온전히 일치한다. 하느님은 이미 천지 창조 때부터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불성실한 인간이 자주 계약을 깨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히 이행해 오셨음을 성서는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진실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한분이시기에 “당신만을 믿고 바라면 망신을 당하지 않으나 당신을 함부로 배신하는 자 수치를 당하리이다”(시편 25,3)라고 시편의 저자는 자신 있게 노래하며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얻는 생명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 하느님께서 아득한 옛날에 벌써 약속해 주신 것”(디도 1,2)이라고 고백한다.
하느님은 항상 진리만을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24,35)라고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불변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진실하심을 믿고 그분의 약속에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기로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깔고 누워도 거기 계시며,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거기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시편 139,7-10). 그러나 하느님이 어디든지 안 계신 곳 없이 다 계신다고 해서 이 세상에 있는 유형 무형의 만물이 곧 하느님이라는 사상은 그릇된 사상이다(이것을 범신론이라 한다). 왜냐하면 만드신 분과 만들어진 것들은 결코 동일할 수 없고 하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시지 하늘이나 땅이 곧 하느님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하느님은 악이 만연되어 있는 이 사회에도 항상 계신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면 무서울 것 없어라”(시편 23,4)

3. 하느님은 영원하시다.
지질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지구는 수억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늙어가고 있다고 한다. 사람도 세상에 태어나면 대개 백년을 살지 못하고 땅에 묻히게 마련이다. 이렇게 볼 때 우주만물은 시간의 길고 짧음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작과 마침이 있다. 그런데 오직 한 분, 하느님만은 시작도 마침도 없고 변하심도 없는 영원하신 분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므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하느님께는 항상 현재만 있을 뿐이다. 시간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다만 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하느님은 누구에게서도 낳음을 받으신 분이 아니며, 나는 얼마 후에 죽을 것이지만 그분은 언제까지나 죽지 않으실 것이고, 나는 쉬지 않고 늙어 가고 있으나 그분은 늙지 않으시는 분이다.
구약시대에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출애 3,14-15)
하느님은 이 말씀에서 당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해서 변함없이 계신 분임을 나타내셨다. 또한 요한복음 1장 첫 머리에서도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영원한 왕이시며 오직 한 분뿐이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불멸의 하느님께서 영원 무궁토록 영예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1디모 1,17)라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찬미했다.
이에 대해 요한 묵시록 또한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Α)요 오메가(Ω)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1,8). 알파는 희랍어의 첫글자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로서 하느님께서 알파요 오메가라고 하심은 시작도 마침도 없이 항상 변함없이 계신 분이심을 의미한다. 만일 하느님께서 인간처럼 과거의 어느 때에 태어나셨다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 돌아가실 분이라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그분께 둘 수 없음은 물론이고 무신론자들의 주장대로 이미 죽어 없어진 신이라고 하는 말이 더 타당하겠다.
하느님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시지만 구체적인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멀리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말씀을 나누신다. 때문에 우리는 “야훼님 어지시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그 미쁘심 대대에 이르리라”(시편 100,5)고 소리 높여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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