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 체험-(차)


나중에 칸트(I.Kant)가 “존재론적 논증”(ontologisches Argument)라고 명명한 이 논증방식은 이미 안셀모 생전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서 가우닐로라는 수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하나의 완전한 섬에 관해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생각에서 섬이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비판은 사고와 존재의 관계, 생각한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의 관계에 집중되었다. 개념에서는 단지 생각 안의 존재를 이끌어 낼 수 있지, 개념이 의미하는 실제 존재를 이끌어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안셀모도 이런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즉 그는 한 사람의 화가가 한 가지의 작품을 구상하고 있을 때, 그 작품은 아직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안셀모는 계속 자신의 신증명을 고수하면서 가우닐로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즉 완전한 섬에 관한 비유는 논증의 핵심을 비켜간다. 왜냐하면, 신에 관한 관념은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서, 우리들은 이 관념에서 모든 완전성을 필연적이고 영원하게 내포하고 있는 한 존재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하나의 섬이란 항상 한정되어 있는 한 가지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안셀모의 신존재 논증의 핵심은 모든 완전성을 자체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는 개념에 있다.
안셀모의 사고체계는 생각도 존재와 존재의 해석에 참여한다는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안셀모는 인간 자체 안에, 인간의 생각 안에서 발견되는 인식 ―안셀모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조명(illuminatio)라고 전제한다―에서부터 초월적인 운동을 통해서 최고의 실재가 존재한다고 추론한다.
안셀모의 신학적 노력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 중요한 점은 그가 어디까지나 부정신학적 요소를 받아들여서 강조한다는 것이다. “하느님, 당신은 단지 그 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분이 아니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큰 분입니다(quiddam maius cogitari possit)”(Prosl. cap., 15).


3.3.3.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느님 이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미 그에게 알려진 사상들을 비판하거나 수용하면서 자신의 하느님 이해를 형성하였다.
그는 안셀모의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이 사고와 존재가 부당한 방식으로 동일시 된 것으로 간주한다고 보고서 이를 거부하였다. 토마스는 그 자체로서 명백한 명제와 그 자체로서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명백한 명제가 있다고 구분하고서, 안셀모의 논증은 전자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또한 토마스는 자신과 동시대의 신학자인 보나벤뚜라(Bonaventura, +1274)의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보나벤뚜라는 신의 개념이 인간에게 나면서부터 주어진 고유한 것으로서 논증이 필요없이 직접적이고 명백한 진리라고 이해하면서 이성적인 신존재 증명의 의미를 상대화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서 토마스는 신앙의 실현과 실제 체험 세계와 연결점을 중개함으로써 하느님이 단지 추상적인 가설로 머물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면서 인간 사고의 길을 통해서 하느님께 향하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였다.
토마스 견해의 특징은 우리에게 체험 가능한 세상의 질서에서 시작해서 그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인 조건을 캐묻는 점이다. 즉 토마스에게서 하느님 존재에 이르는 사고의 길은 플라톤 사상의 부정신학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긍정신학을 출발점으로 한다. STh I q.2a.3에서 토마스는 우선 “신은 존재하는가”(utrum Deus sit)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다섯 가지 길”(quinque viae)을 통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합리성을 보여주고 있다. 참조: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1-12, 정의채 역, 성바오로출판사, 1985, 65-70.

1) 첫째 길은 운동이라고 하는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출발한다(ex parte motus). 그 골자는, 아무것도 스스로를 움직일 수 없으므로,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들은 움직여지고 있는 자가 움직이게 하는 자에게 의존하고 있는 관계를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서 추구할 수는 없으므로 결국 첫 번째로 움직이게 하는 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첫 번째로 움직이게 하는 자는 어떤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자이며 이것을 모두 신이라고 한다.
2) 둘째 길은 능동인(能動因)의 이유에 근거한다(ex ratione causae efficientis). 이 길은 모든 원인들은 어떤 것에 의해 원인이 주어진 것이며, 이것은 다시 또다른 어떤 것에 의해 그 원인이 주어진다는 사실에 착안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스스로의 원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때에도 역시 원인의 계열을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무것도 증명해내지 못한다는 것이 강조된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맨 마지막 원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3) 셋째 길은 가능(可能)과 필연(必然)에서 취해진 것이다(ex possibili et necessario). 이 길은 모든 사물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관찰에서 출발한다. 즉 기존의 모든 사물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으로서 우연의 것, 다시 말해서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렇게 오직 가능하기만 한 존재는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만약에 우연적인 존재만 있다면, 지금은 아무것도 없을는지 모른다. 기존의 우연적인 존재를 거슬러 올라가면 맨마지막에 어떤 필연적인 존재, 순수한 가능성을 실재로 바꿀 수 있고 또 실제로 바꾼 필연적인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이상의 세 가지 증명은 실상 한 가지의 증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증명에 있어서의 두 자기의 중요한 사상은 인과율(因果律)과 추론과정에서 무한한 후퇴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명제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들을 “우주론적 증명”이라고 일컬었다.
4) 넷째 길은 사물계에서 발견되는 완전성의 단계(段階)에서 취해진다(ex gradibus perfectionem). 보다 더 완전한 것이나 보다 덜 완전한 것의 배후에는 하나의 최고로 완전한 것을 추정하게 된다. 이 최고로 완전한 자는 우리가 ‘보다 많이’ 또는 ‘보다 적게’라고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전제가 되는 척도이다. 이 최고로 완전한 자는 동시에 가치있는 모든 것들의 근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가치들은 이 최고로 완전한 자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최고의 완전성을 지닌 존재를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5) 다섯째 길은 “목적론적 신증명”이라고 일컫는다. 이 길은 세상 사물에는 질서가 있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노력이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ex gubermatione mundi). 따라서 이 합목적성(合目的性)을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최고의 지성이 있어야 한다. 마치 화살이 사수에 의해 지휘되는 것과 같이 모든 자연적 사물들을 목적에로 질서지어주는 어떤 지성적인 존재가 있는데 이런 존재를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토마스는 ‘아래로부터’ 계속 인과 관계를 찾아서 ‘위로’ 올라가서 찾는 마지막 원인인 초월적인 존재에 대해서 매번 “사람들 모두는 이를 하느님이라고 부른다”(…et hoc omnes nominant Deum)로 표현한다. “omnes”는 토마스의 언어 용법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인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토마스의 시도는 신앙인에게 이미 알려진 하느님에 대해서 지성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이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토마스의 이런 하느님의 존재증명에서 동시에 하느님의 본질에 관한 해명도 주어진다. 이 증명에 따르자면 하느님은 자립적인 존재(ens a se)여야 한다. 그래서 토마스가 하느님의 본성에 가장 잘 적용하는 특징은 “자존적 존재”(ipsum esse subsistens)라는 개념이다. 하느님은 자립적인 존재로서 첫 번째의 동인, 첫 번째의 원인, 절대적인 필연성, 최고의 완전성, 세상 질서의 조종자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속성으로는 단순성, 완전성, 무한성, 불변성, 유일성이 있다(STh I qq.3-11).
토마스는 인간 이성을 도구로 체험가능한 세상 사물에서부터 출발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추론하든데, 하느님과 인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그의 신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STh I q.3은 부정신학적 요소를 앞세우고 있다.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인식한 후 남는 것은, 그것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그것이 어떻게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무엇이지는 알 수 없고 무엇이 아닌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하여 어떻게 있는지는 알 수 없고 어떻게 있지 않은지를 고찰할 수 있다”. 이런 부정신학적 요소는 토마스가 퀠른(Köln)에서 자신의 스승 대(大) 알베르뚜스(Albertus Magnus)에게서 위 디오니시오 아레오파기타에 대해서 여러 학기를 배운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 그는 “하느님은 어떤 류(類, genus)에도 속하지 않는다”(STh I q.3 a.5)고 말하면서 하느님께는 단지 유비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예컨대 선의 개념이나 정신의 개념, 생명의 개념이나 존재의 개념은 피조물에도 하느님에게도 본질적으로 꼭 같은 그대로의 선이요 정신이며 생명이요 존재는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러한 말은 항상 일의적이며, 신적인 것과 지상의 것을 같은 분모(分母)에 싣는 것이요, 따라서 범신론으로 기울어지고 말 것이다. 물론 이런 개념에 완전히 다른 뜻을 연결지을 수는 없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불가지론으로 흐르게 된다. 그래서 이 개념들을 일종의 유비적인 뜻을 갖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동일성과 차이성을 서로 연결짓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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