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레시아의 아르놀드 Arnold von Brescia
아르놀드는 파리에서 수학한 후 1136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회원으로서 귀향하였다. 그는 종교와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1139년 피신한 프랑스에서도 아르놀드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후에는 스위스의 취리히(Zurich)에서, 그리고 1144년 이후부터는 로마에서 자신의 견해를 전파하였다. 아르놀드는 로마에서 로마 공화국의 재건을 부르짖었고, 국민들로 하여금 성직 신분의 군주들을 거슬러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항할 것을 선동하기도 하였다. 아르놀드는 특히 추기경들을 거슬러 대항하였다. 그는 추기경단의 오만과 부패를 비난하면서 도둑의 소굴이라고 악평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사도적인 열성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이 아니고, 영혼의 목자도 아니며, 그 대신 냉혈 인간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냉혈 인간에게 순명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로마는 자유의 진원지이며, 그렇기 때문에 교황에 의해 굴복당하게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Eugen) 3세는 아르놀드를 파문했고, 로마의 성직자들에게는 아르놀드와의 어떠한 형태의 관계 유지도 금지시켰다.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1154년 교황 선출 이후 라테라노에 거주하지 못하고, 그대신 레오 시에 거주지를 마련해야만 했다. 어느 추기경이 교황 하드리아노 4세를 방문하는 길에 아르놀드의 추종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교황은 1155년 로마 도시를 파문하였다. 이로써 교회 역사상 최초로 로마에서 모든 미사 전례 거행이 정지당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백성들은 불만을 품었고 아르놀드는 로마를 떠나야만 하였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교황의 파문 처벌에 불만을 품고 로마를 떠나는 도주자들을 체포하여 교황에게 인도하였다. 아르놀드는 1155년 이단자로 유죄 판결을 받아 화형에 처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