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화 논쟁 聖畵論爭 Bilderstreit
동로마 황제 레오 3세(Leon Ⅲ. 717~741년)는 726년 최초로 성화 공경을 금지하는 칙령을 포고하였다. 그 이면에는 정치적이고도 신학적인 이유가 작용하였다. 성화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아라비아인들은 백성들과 수도승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성화 공경 관습을 경멸하는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유다인 역시 우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십계명을 근거로 해서 성화 공경 관습을 비웃었다. 그리고 성화 공경 금지와 관련해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신학적인 논쟁도 한몫을 거들었다.
단성론을 주장하던 자들은 그리스도의 성화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의 참된 인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이 신적인 것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때문에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아리우스주의의 주장과 일맥상통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원시 종족이나 성화를 미신적으로 공경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성화 공경 금지와 더불어 황제 레오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많은 사람들이 거세게 배척했던 ꡐ그리스도-이콘ꡑ(Christus-Ikone)을 파괴할 것도 명령하였다. 그 결과 백성들은 격분에 사로잡혔고, 군대들은 황제를 거슬러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는 새로운 황제의 옹립까지도 시도되었다. 황제 레오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게르마노스(Germanos)와 교황 그레고리오 2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했으나 두 사람 모두 황제의 조치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황제 레오 3세는 새로운 칙령을 반포하여 성화 공경 금지를 더욱더 강화시켰다. 이에 따라 전 제국에서 수많은 성화들이 파괴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게르마노스는 좀더 유순한 주교로 대치되었고, 교황은 살해당할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로마의 백성들은, 교황을 살해하기 위해 황제가 파견한 밀사에 대항하여 다섯 번이나 교황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후 교황들은 비잔틴으로부터 등을 돌려 독일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731년 11월에 개최된 시노드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3세는 성화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자들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축출시키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황제 레오는 로마에 속한 재산을 몰수하고 이탈리아의 남부, 그리스 그리고 시칠리아를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시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귀속시키는 정치적인 조치로 보복하였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화 공경의 금지 조치를 거듭 확인하기 위한 의도로 752년 공의회의 소집을 준비했고, 754년 보스포루스(Bosporus) 근처 히에레이아(Hiereia)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여 의도했던 바를 성공시켰다. 이로써 황제는 다시금 성화 논쟁을 둘러싼 소용돌이를 앞장서서 선동하였다. 이제는 성화 공경 자체를 금지하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성화 공경을 옹호하는 자들까지도 고문, 추방, 사형 등으로 위협하였다.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동방 교회와의 일치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자신의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4세를 위해 섭정 정치를 수행하고 있던 이레네(Irene) 황후는 성화 공경을 둘러싼 논쟁을 조정하기 위해 787년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공의회는 ꡐ흠숭ꡑ과 ꡐ공경ꡑ이라는 두 단어를 분명하게 구별하여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다. ꡐ흠숭ꡑ은 오로지 하느님에게만 해당하고, ꡐ공경ꡑ은 피조물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ꡒ만일 누군가가 성화를 공경한다면 그림을 통해 묘사되는 인물을 공경하는 것이다.ꡓ 성화의 의미는 성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화에 묘사되어 있는 그리스도 또는 성인과 관련되어 있다.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일치는 다시금 회복되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카롤링거(Karolinger) 황조 출신의 칼 대제는 공의회에 초대를 받지 못하였다. 자신을 서구의 강력한 지배자로 여기고 있던 칼 대제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고 심지어 모멸감마저 느꼈다. 그래서 칼 대제는 790년 자신의 궁정 신학자들로 하여금 성화 공경 문제에 대해 저술하도록 지시했고,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비난하였다. 그리스어를 배우지 못했던 신학자들은 공의회의 결정과 관련된 라틴어 번역만을 알고 있었다. 라틴어 번역은 ꡐ흠숭ꡑ과 ꡐ공경ꡑ 두 단어를 동일한 단어로 번역해 놓았다. 그래서 이들은, 동방 교회는 성화를 ꡐ흠숭ꡑ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실제로 칼 대제는 신학적인 문제에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그보다는 교회와 정치적 영역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프랑크 제국의 항의를 표출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794년 칼 대제에 의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소집된 시노드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비난하였다(물론 그 결정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칼 대제는 이 시노드를 공의회로 격상시키려고 모색하였다. 하지만 칼 대제가 소집한 시노드는 교황의 사절이 2명이나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제국의 시노드로 머물고 말았다. 이로써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칼 대제를 불쾌하게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성화 공경에 대한 칼 대제의 비판을 수용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칼 대제의 지시로 만들어진 이른바 ꡐ카롤링거의 저술ꡑ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서방 교회의 경우 성화 논쟁은 곧 잠잠해졌다.
그러나 동방 교회의 경우 사태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황제 레오 5세(813~820년)는 새롭게 성화 논쟁에 불을 당겼고, 성화 공경을 옹호하는 자들을 박해하였다. 황제 미카엘 2세(820~829년)는 성화 논쟁과 관련해서 추방되었던 사람들을 재소환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선임자가 제정했던 성화 공경에 대한 금지 법률을 폐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성화 공경에 적대감을 드러내는 자들 편에 가담하였다.
성화 공경의 금지를 찬성하는 노선과 그것의 금지를 반대하는 노선 사이에 모색되었던 공동의 논의는 성화 공경을 지지하는 노선에 의해 거부되었다. 더 나아가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공표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으나, 미카엘 2세 황제는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는 성화 공경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주교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로 임명했고, 이로써 성화 논쟁을 새롭게 부활시켰다. 이러한 성화 논쟁은 황제 테오필로스(Theophilos, 829~842년) 재위 기간 중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성화 논쟁의 격렬한 양상은 상당히 감소되었다. 황제 테오필로스 사후 그의 왕비였던 테오도라(Theodora)는 성화 공경의 재도입을 신중하게 준비하였다. 그사이 새로 임명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와 함께 성화 논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시노드를 개최하였고, 그 결과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은 다시금 적법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로써 성화 공경을 둘러싼 논쟁은 서방 교회는 물론 동방 교회에서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