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리아주의 ~主義 Gallikanismus
17세기의 프랑스에서는 절대주의가 황성하게 번창하였다. 이 절대주의는 국왕 루이 14세(1643~1715년)에 의해 특별한 방식으로 구체화되었고, 추기경 리셸리외(Richelieu, 1585~1642년)와 마자랭(Mazarin, †1661년)에 의해 교회에 수용되었다. 이 절대주의는 교회와 종교는 국가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프랑스의 교회는 로마의 중앙 집권제와는 달리 국가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절대주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왔었다. 즉 프랑스의 국왕이 교황에 대한 지배를 결정한 아비뇽의 유배와 공의회 지상주의를 통해,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개혁 헌장을 반포하는 것을 프랑스가 거부함으로써 이미 준비되어 왔다, 갈리아주의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교의 신학적인 시각에서 볼 때 갈리아주의는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사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교회 정치적인 시각에서 볼 때 프랑스 교회의 자주성 – 로마로부터의 독립 – 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프랑스 교회의 자주성은 프랑스, 즉 갈리아 교회를 위한 특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교황 비오 2세는 1460년 공의회 지상주의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우 공의회 지상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절대주의의 진행은 프랑스의 국왕들로 하여금 교회에 부단한 요구를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른바 왕의 지상권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프랑스의 국왕들은 어떤 교구에서 공석이 되어 발생하는 성직록과 공석이 되어 있는 자리를 국왕이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였다. 국왕 루이 14세는 이것을 왕이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권리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1673년과 1675년 이 권리는 프랑스의 왕권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법령을 제정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 처음에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프랑스 교회의 주교 2명이 이러한 법령과 관련해서 교황에게 소원을 제기하자, 교황은 1678년과 1679년에 발표한 교서를 통해 프랑스의 국왕들이 이러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경고했고, 1680년에 발표한 교서를 통해서는 프랑스의 국왕들이 이러한 권리룰 포기하지 않을 경우 하느님의 처벌을 받으리라고 위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80년의 프랑스 성직자 회의는 왕의 권리 요구를 지지하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1681년 다시 한 번 더 프랑스 국왕들이 이러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호소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1681년 성직자 전체 회의를 소집하였고, 이 전체 회의는 국왕이 요구하는 권리를 전 교구에 확대하여 적용시킬 것에 동의하였다. 아울러 이 전체 회의는 ꡐ갈리아의 자유ꡑ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결과는 주교 보쉬에(Bossuet)에 의해 정리되었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1) 교황은 하느님으로부터 단지 영적인 권리만을 위임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은 왕을 퇴위시킬 수 없다.
2) 교황보다도 공의회가 더 우위에 있다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재확인한다.
3) 오래 전부터 존속해 왔던 갈리아 교회의 특권은 계속 보장되어야 한다.
4) 신앙의 문제와 관련한 교황의 결정은 오로지 전체 교회의 동의를 얻어야만 효력을 발생한다.
프랑스의 대다수의 성직자들은 이른바 ꡐ갈리아의 자유ꡑ또는 ꡐ갈리아 4개 조항ꡑ을 지지했고, 국왕은 신학 교수들과 교회법 교수들에게 이 조항을 준수해야 할 의무를 부과하였다. 1682년 4월 11일 교황은 교서를 통해 프랑스 성직자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프랑스의 국왕 루이 14세는 놀랍게도 프랑스 성직자 회의의 결정의 발효를 정지시켰다. 왜냐하면 국왕은 로마와 계속해서 담판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담판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났다. 또한,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가 여전히 존속하고있었다. 즉 ꡐ갈리아의 자유ꡑ에 대해 지지를 보냈던 프랑스 교회의 다수의 주교들은 자신들의 직무 수행과 관련해서 교황으로부터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교황 인노첸시오 12세는 왕과 타협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682년에 개최되었던 성직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과 ꡐ갈리아의 자유ꡑ에 서명한 사람들은 교황에게 복종한다. 그리고 왕은 ꡐ갈리아의 자유ꡑ를 준수해야 할 의무를 취소시킨다. 그리고 난 후 프랑스의 다수의 주교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교황의 승인을 얻는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국왕 루이 14세는 승자로 부각되었다. 이후 갈리아주의 사상은 프랑스 교회를 두 적대 진영으로 분열시킨 얀세니즘과 페브로니우스주의를 통해 계속 이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