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힐데브란트 Hildebrand
힐데브란트는 1020/1025년경 남부 토스카니아(Tuscien)에서 출생하였다. 아마도 그는 로마의 아벤티노(Aventin)에 있던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했고, 나중에는 클뤼니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교황 그레고리오 6세는 1046년 수트리(Sutri)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폐위되었고, 쾰른으로 추방되었다. 힐데브란트는 교황 그레고리오 6세가 추방될 때 쾰른까지 동행하였다. 교황 다마소 2세의 서거 후(1048년) 힐데브란트는 툴(Toul)의 주교 브룬(Brun) – 이미 황제 하인리히의 지명이 있었다 – 에게 교황직을 수락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브룬은 교황직을 수락하였고, 레오 9세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레오 9세가 서거한 후 로마인들은 힐데브란트가 교황으로 선출되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힐데브란트는 거절하였다. 힐데브란트는 독일을 향해 떠났고, 아이히슈테트(Eichstätt)의 주교 게브하르트(Gebhard)를 교황으로 선출하도록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조언하였다. 그 결과 게브하르트는 로마에서 교황 빅토리오(Victor) 2세로 선출되었다. 교황 스테파노 9세는 서거하기 전(1058년), 로마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서약하도록 하였다. 즉 교황 스테파노 9세가 서거한 후, 독일에서 교황의 사절로 재직 중인 힐데브란트가 로마로 귀환한 이후에 교황 선거를 위한 절차를 시작하도록 한다는 것이 서약의 내용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교황 선거는 여러 달 동안 연기되었다. 그사이 투스칼리니(Tusculaner) 가문이 로마에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소요와 양분된 교황 선거가 발생하였다.
분열된 상태에서 진행되었던 교황 선거로 베네딕토 10세와 니콜라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황제 알렉산데르 2세의 장례식에 모였던 로마의 백성들은 ꡒ힐데브란트를 교황으로ꡓ라는 구호를 외쳤고, 이렇게 해서 힐데브란트는 1073년 4월 22일 그레고리오 7세로 교황직에 즉위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교황 즉위는 교황 선거와 관련해서 1059년 반포된 교령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1085년 5월에 서거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다섯 명의 교황을 가까이에서 보좌한 조언자로서 클뤼니의 개혁 이념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고,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이미 교회의 개혁을 실천했던 중요한 인물이었다. 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논쟁에 있어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독일의 국왕들과 세속의 제후들로부터 교회의 자주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교황으로서 그는 중세기의 교황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직책 수행뿐 아니라, 개인적인 사생활마저도 교회의 개혁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1606년 교황 바오로 5세는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고, 그의 전례 기념일은 5월 24일이다. 이날은 그가 서거한 날이기도 하다.
